퇴사는 멀었지만요,,
나는 가끔 상상한다.
퇴사를 하는 내 모습을.
진짜 진지하게 상상을 해보곤 한다.(상상하면 이뤄진다던데..?)
자리를 정리하고 큰 짐들은 미리 퇴사일 이전에 다 옮겨둬야지. 회사를 돌아다니면서 인사를 할까? 아님 그냥 조용히 나갈까?
'저 이제 퇴사합니다. 그동안 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는 메일을 쓸까? 말까? 별로 잘해준 사람도 없는 것 같긴 한데.
퇴사하는 날 팀원들에게 작은 선물을 전달하는 게 좋을까? 나름 정들었으니까. 등등.
물론 현재 퇴사를 앞두고 있어서 상상하는 건 아니다.
그냥 상상만 하는 것이다. 하하.
벌써 이 회사를 다닌지 어언 10년.
천성이 남들에게 살갑고 붙임성 좋은 스타일은 못되다 보니, 그 오랜 시간을 한 회사를 다녔어도 회사에 이렇다 할 친구도 몇 없다. 그리고 사실 내 업무의 특성상 어설프게 친해지는 동료가 생기면 난처한 상황이 더 많이 생기기도 했다. (안면을 텄다는 이유로 부탁을 하면 딱 잘라 거절하기 애매한 상황들...)
그래서 내가 퇴사를 한다해도 나의 부재를 슬퍼하며 울어주거나, 나를 굉장히 그리워 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기도 하다. (너무 정없는 회사생활을 한걸까...? ㅎㅎㅎ)
그렇지만 여느 고속도로 휴게소 화장실에 붙어있는 글귀마냥 나 역시 '머문자리가 아름답고' 싶은지라, 퇴사할 때 그래도 나쁜 기억을 남기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올해 초 나를 채용해주고 오랜 기간 일을 가르쳐주며 때론 혼내기도, 때론 칭찬해주기도 했던 부장님이 퇴사를 하셨다. 그는 일을 참 잘했고, (11화 에피소드 참조..) 대쪽이었기 때문에, 구부러져야 하는 상황에서 끝내 부러지고 퇴사를 선택했다. 누구보다 일에 열정적이었고 그 열정의 기반에는 회사에 대한 애정과 이 회사가 업계에서 다른 회사보다 더욱 성장하길 바라는 마음이 깔려 있었을 거라 생각한다. 돈을 벌기위해 회사를 다니는 것이 목적이라면 할 수 없었던 일들도 늘 열의를 다해 해내던 사람이었기 때문.
그렇게 20년이상의 시간을 한 회사에서 열정을 다 바쳤다.
▼대쪽의 에피소드가 담긴 11화
그는 20대 푸르렀던 청춘의 시기에 이 회사에서 성장했고, 30대 누구보다 뜨거웠던 시기에 회사의 고락을 함께 견뎠다. 40대엔 회사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고, 50대를 눈 앞에 두고선 결국 회사는 그의 손을 놓았다.
한 회사에서 20년을 보낸다는 것이 어찌 쉬웠겠는가. 말그대로 더럽고 치사한 순간 순간마다 내 삶을 위해 참아내고, 또 회사를 위해 애정과 열정을 다한 순간도 얼마나 많았겠나. 그런 그의 유종의 미는 그저 그렇게 마무리가 되었다.
그는 아마도 자리를 비워가며 사라지는 티를 내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티나게 물건을 치우지 않았다.
회사를 돌아다니며 인사를 하지도 않았다. '뭐 좋은 일로 나가는 거라고 인사씩이나' 라고 생각했던 듯 하다. (물론 그가 보내온 세월과 쌓아올린 명성에 맞게 직접 그에게 인사를 건네러 온 직원들이 십수명이었다.)
'저 이제 퇴사합니다. 그동안 잘해주셔서 감사합니다.'하는 메일도 없었다. 원래 이 곳에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그냥 조용히 퇴사를 선택했다.
퇴사의 길에 누군가 레드카펫을 깔아두고 꽃가루를 뿌려주며 '그동안 고생했어!! 앞으로 펼쳐질 너의 길도 행운이 가득할거야!' 라는 것을 바라긴 물론 어렵지만, 조용히 사라지는 것도 꽤나 서글프게 느껴졌다.
언젠가 내게도 찾아올 그 날.
반드시 올 수 밖에 없는 그 날.
나는 어떤 유종의 미를 거두게 될까.
유종의 '미'이긴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