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킷 7 댓글 공유 작가의 글을 SNS에 공유해보세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오늘의 식사 #5. 맥주와 주꾸미볶음

청양고추가 잔뜩! 속 쓰릴 각오하고 먹는 매운 주꾸미볶음

by 빈둥 Apr 05. 2023

한동안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최근 너무나 봄이었잖아요?


그냥 평소처럼 걸어갈 뿐인데 바람에 벚꽃 잎이 날리고, 이쪽을 봐도 저쪽을 봐도 색색깔의 꽃들이 펴 있는데 세상이 말 그대로 동화 속 같은 요즘이었습니다.


긍정과는 거리가 먼 제게도 긍정적인 기운이 샘솟았던 건 다 봄꽃 효과였던 거겠죠. 


머릿속도 벚꽃 잎이 깔린 거리처럼 꽃밭이 되어서 행복회로가 마구마구 돌아갔습니다. 4월엔 분명 뭔가 좋은 소식이 들려올 것 같은 확신까지도 들었어요.


그래서인지 에세이도 잘 안 써졌습니다. 요즘 느낀 건데, 저한테 이 에세이는 일기장 같은가 봅니다.


저는 기분이 안 좋을 때만 주로 일기를 쓰거든요(다행히 일기를 안 쓴 날이 훨씬 많습니다). 좋은 기분은 혼자만 간직하고 나쁜 감정만 익명 뒤에 숨어 쏟아내다니.. 좀 못나 보이긴 하네요. 익명 만세!


어쨌든 오늘 결국 저의 그 대책 없는, 어디서 나왔는지 모를 핑크빛 비전이 깨져버렸어요.


한껏 부푼 제 마음속 풍선을 터뜨린 화살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날아왔습니다. 그간 제가 노력해 왔던 것에 대한 누군가의 피드백이었는데, 요약하자면 "별루!"였어요. (물론 그분이 저렇게 말하진 않았습니다. 어디까지나 많이 축약하자면 그렇습니다.)


이쯤 되면 제 자신한테 화가 나는데, 사실 그런 피드백을 예상 못했느냐 하면 그건 아니거든요. 저도 제가 부족한 점이 뭔지 잘 알고 있고, 정확히 그 얘기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전 제가 좀 성장한 줄 알고 기대를 했었습니다. 기대를 좀 많이 했었나 봐요. 현실을 직시하자 풍선은 순식간에 펑! 터져버렸습니다.


이쯤이면 다 온 건 줄 알았는데, 다 왔길 바랐는데, 아직도 아니라네요. 조금 더 가라네요.


에라이 정말. 운동할 때도 "하나 더! 마지막 하나 더!" 하는 게 얼마나 사람 힘 빠지게 하는데요!


정신이 육체에 영향을 끼치는 건 분명한 사실 같습니다. 피드백을 다 듣고 나자 기운이 빠져서 드러누워 의미 없이 핸드폰이나 들여다보다 이불을 뒤집어썼습니다. 


더 생각하지 않고 일단 좀 숨고 싶었던 제 무의식이었던 건지, 뇌가 셔터를 내리듯 피곤하지도 않았는데 그냥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들어 버렸습니다.


아무튼 몇 시간을 자고, 저녁이 되어 여전히 개운하지 않은 기분으로 일어났습니다.


엄마가 일하고 돌아왔는데 밥이 없다고 하는 소리가 들렸거든요. 나이 먹은 백수 딸 먹여주고 재워주시는데 밥도 안 해놓다니, 이거 영 찔리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남은 된장국에 물과 야채, 멸치액젓을 넣고 야매 칼국수를 끓여 저녁을 차리고, 싱크대를 가득 채운 설거지 거리들을 대충 해놓고, 거의 인도의 빨래터마냥 쌓여 있던 빨래들을 세탁기에 돌리고 잠시 TV를 보며 아무 생각 없이 낄낄대다 운동을 하러 나섰습니다.


공교롭게도 운동을 가는 길, 어제만 해도 아주 예쁘게 폈던 흰 목련이 갈색으로 변해 흉하게 저물었습니다. 하루아침에 변해버린 제 마음처럼요.


터덜터덜 걸어가며 주머니 속에, 마음속에, 한숨 속에 담아뒀던 우울함과 걱정, 패배감 따위를 조금씩 떼어서 버립니다.


'몰랐던 것도 아닌데 뭐.'


'한 두 번이냐?'


'어차피 내 사주에 대운은 아직이랬어!'라고 정신 승리도 시도하면서요.


물론 저는 정신 승리에 능한 편이 아니기 때문에 운동 전 몸을 풀면서 다시 잡생각들이 떠올랐습니다. 이럴 땐 이 모든 생각들을 잠재울 마법의 한마디가 있습니다.


'저녁 뭐 먹지?!'


오늘은 아무래도 매운 음식이 답인 것 같습니다.


매운 음식 고르는 건 은근 어렵습니다. 매운맛도 종류가 다양하기 때문에 지금 내가 뭘 원하는지를 정확히 파악하는 게 중요하죠. 마라탕 같은 국물류? 떡볶이? 매운 족발이나 치킨?


고민해도 그럴싸한 답은 안 나옵니다.


운동을 마치고 마트로 향하면서도 고민은 이어집니다. 일단은 카트부터 끌고 탐색을 시작했는데.. 배고플 때 마트 오면 안 된다는 거 깜빡했네요.


어느새 생각지도 않았던 냉동식품과 과자까지 마구 담고 있습니다.


그러다 발견한 시뻘건 이것.


바로바로.... 주꾸미볶음!


조리되지 않은 채 고추장 양념만 된 냉장 주꾸미를 보자마자 그래! 이거다!라고 (속으로) 소리 질렀습니다.


주꾸미와 함께 먹을 병맥주, 병맥주와 함께 먹을 육포, 입가심으로 먹을 요거트까지 사서 돌아가는 길.


너무 오버해서 사는 바람에 카드값에 죄책감이 조금 들지만 에라 모르겠습니다. 난 오늘의 나를 좀 더 기운 나게 해줘야 할 의무가 있으니까요. 크라잉 넛 음악으로 내적 헤드뱅잉까지 하며 집으로 향합니다.


샤워를 마치고 나와 일단 주꾸미부터 조리하기 시작했어요. 야채는 안 들어 있으니 파, 양파, 콩나물을 넣어주고 집에 있던 청양고추를 아끼지 않고 넣은 뒤 그래도 부족하면 고춧가루까지 탈탈. 


주꾸미가 익었으면 밥 위에 주꾸미볶음을 얹어 덮밥으로 만들고 좋아하는 예능을 세팅합니다.


냉동실에 넣어 차갑게 둔 병맥주를 따서 잔에 따르고 뒷맛이 매운 주꾸미 볶음과 함께 페어링 했습니다.


씁씁하하 해가며 먹는, 얼얼해서 아무 생각 안 나게 하는 매운 주꾸미 볶음. 청양고추 잔뜩 넣은 이 한국인의 매운맛으로 오늘도 나한테 한 방 먹인 걱정이란 놈, 패배감이란 놈에게 소심한 반격을 해봅니다.



자, 이제 오늘은 쓰린 속이나 부여잡고 잠들고 내일은 속을 달랠 음식을 먹어야겠네요.



그럼 내일 뭐 먹을까요?




<속 쓰리게 매운 주꾸미 볶음 레시피>

저처럼 시판 양념된 주꾸미 볶음이라면 야채만 기호에 따라, 냉장고 사정에 따라 추가해 주세요!

야채는 파, 양파, 당근, 깻잎, 콩나물 등이 어울립니다. 

시판 양념은 보통 단맛이 강해 맛을 보고 간장과 물을 추가하는 편이 좋습니다.


*양념장 제조 시*

고추장 1T, 고춧가루 2T, 청양고추 알아서, 진간장 2T, 맛술 1T, 설탕 1T, 마늘 3알


정도.. 넣으면 되겠죠?


작가의 이전글 오늘의 식사 #4. 후라이드 치킨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