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사람 손을 거친 책은 자연스럽게 닳기 마련이다. 오래 입어서 해진 옷이나 오래 쓴 낡은 가구는 자연스럽다. 하지만 옷을 가위로 자르고 가구에 칼집을 내는 행동은 고의가 짙은 행동이다. 고의는 아프다. 고의로 책에 상처를 내면 그만큼 아프다.
잘린 책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했을까 싶은 파손 책들이 있다. 칼로 베어내고 가위로 자른 책들이다. 책 읽는 시간이 지루했을까. 단순히 무료했을까. 칼질 연습을 했을까. 잘라서 간직하고 싶도록 마음에 드는 문장이었을까. 온갖 추측을 해보지만 답은 모르겠다. 단정할 수는 없지만 장난이 지나친 학생들 소행으로 본다. 학생이 아니면 미성숙한 교직원이다. 처음 학교도서관에 왔을 때 누가 언제 했는지도 모르는 절취 도서를 보고 경악했다. 이런 책들은 보수할 희망이 없어 파손도서로 분류했다가 폐기한다.
표지가 떨어진 책
책을 던지고 노는 학생들이 있다. 그러다가 바닥에 떨어지는 책은 표지가 접히거나 찢긴다. 책을 조심스럽게 다루지 않고 함부로 다루면 표지는 떨어진다. 책상 서랍에 마구잡이로 쑤셔서 넣거나 사물함에 대충 집어넣으면 표지는 버티지 못한다. 표지 없이 나뒹굴다가 도서관으로 반납된 책들도 보수할 희망이 없다.
표지가 떨어지고 책장이 찢어지면 보수용 테이프와 접착제를 이용하여 보수작업을 하지만 더 이상 보수가 어려운 책은 대출가능 도서에서 파손도서로 넘긴다. 지나치게 더러워져 읽기 어려운 오손도서도 DLS(학교도서관업무지원시스템)에서 파손도서로 변경한다. 오손도서 가운데 읽기에 지장 없을 정도로 물을 쏟은 책은 잘 말리고, 과자 부스러기는 책 전용 소독 휴지로 닦는다.
한번은 얄미운 흔적을 봤다. 서가에서 《괭이부리말 아이들》 책 한 권을 빼는데 옆에 있는 책이 같이 빠진다. 같이 빠진 책만 집어넣으려고 했더니 처음 집었던 책이 따라 들어간다. 책과 책 사이에 껌이 붙어있다. 언제 뱉었는지도 모르는데 누구인지 찾을 도리가 없다. 찐득하게 달라붙은 껌을 책에 상처가 남지 않게 조심스럽게 떼어낸다.
책과 책 사이에 붙은 껌
가장 많은 오손은 낙서이다. 밑줄 긋기는 애교이고 형광펜으로 표시한 부분은 집중해서 읽다 보면 그럴 수 있지 하는 마음으로 이해한다. 그런데 책 군데군데 쓴 욕설과 비속어를 보면 마음이 상한다. 연필로 썼으면 지우개로 지우고, 펜으로 써서 지울 수 없을 땐 파손도서로 변경한다.
개중에 피식 웃음이 나는 낙서도 있다. ‘이 편지는 영국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다른 곳에 5개 이상 적어놓지 않을 시 큰 불행에 시달리게 됩니다.’ 2021년 중학생도 행운의 편지를 쓴다. 이 낙서 아래 누군가 ‘책에 낙서하면 좋냐?’고 썼는데 나도 묻고 싶다. 그러는 너는 좋니.
책에 한 낙서
파손도서 전시
파손도서를 모아서 전시했었다. 한쪽에는 부족한 포토샵으로 상처 난 얼굴을 그리고, 그 옆에 전하고 싶은 말을 남겼다.
누군가 칼로 눈을 찌르면 아프겠죠.
누군가 가위로 귀를 자르면 아프겠죠.
누군가 얼굴에 낙서하면 기분이 나쁘겠죠.
누군가 먹던 음식을 얼굴에 던지면 기분이 나쁘겠죠.
누군가가 나를 아프게 하면 상처받습니다.
책도 상처받습니다.
상처 주지 마세요.
많이 아픕니다.
책을 소중하게 다루기를 바라는 마음을 다소 강하게 전했다. 파손도서 전시 효과가 있었는지 그 이후 짓궂은 장난은 눈에 띄게 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