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밥그릇
계단을 옆에서 바라볼 때 경사면 아래는 직삼각형 모양이다. 사람들은 낮고 좁은 직삼각형 안에 쓰지 않는 짐을 보관하거나 비워두지만, 부모님은 그곳을 밥 먹고 쉴 수 있는 장소로 만드셨다.
내가 태어난 지 1년 정도 지났을 때, 부모님은 안동 최초 공동주택으로 지어졌다는 아파트에 들어가셨다. 내 나이 일곱 살 때, 부모님은 장사를 시작하셨다. 아파트 인근 2차선 도로 옆 상가 1층에 세를 얻고 전기철물점을 열었다. 아파트 상가에 있는 슈퍼마켓, 미용실, 피아노 학원을 지나 오른쪽으로 돌고, 열 걸음 정도 걸으면 횡단보도가 나온다. 약국이 있는 쪽 횡단보도로 건너 약국과 화장품 가게 같은 작은 상점들을 몇 군데 지나면 우리 가게가 보였다. 일곱 살은 방향 감각이 없어 상점 간판을 기억하고 다니면서 가게를 찾아갔다.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면 진열된 전기용품과 철물들이 보였다. 형광등, 전선, 철사, 사다리, 못, 망치, 펜치, 드라이버, 자물쇠, 테이프 그리고 이름 모를 공구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편히 쉴만한 곳 하나 없어 보였던 작은 가게. 가게 한쪽에는 계단 경사면이 있었는데, 부모님은 그 아래에 장판을 깔고, 이불을 가져다 놓으셨다.
어머니는 일곱 살 첫째 딸과 네 살 둘째 아들을 데리고 장사를 하며, 계단 경사면 아래에서 밥을 지어 우리에게 먹이셨다. 밥이 다 되었을 때 밥솥에서 올라오던 뜨거운 김과 밥 냄새를 기억한다. 어머니가 차려주신 밥을 먹고, 숙제하고, 남동생과 이불 속에 누워서 이야기 나눈 기억도 난다. 이불 밑 전기장판이 뿜는 온기도 기억한다. 일어서면 키가 닿을락 말락 하는 경사면이 어디 동굴 속에 들어온 듯 흥미로웠고, 낮고 좁은 계단 아래는 아늑했던 느낌이 가득하다. 그런데, 부모님은 그곳에서 어떻게 얼마나 쉬셨는지에 관한 기억은 없다. 어머니는 그곳에서 허리 한번 쭉 펴고 일어서 계셨을까, 아버지는 누워서 쉬셨을까, 싶다. 어린 자녀들 몸에 먼지 한 톨 묻지 않게, 습한 곳을 찾아오는 벌레가 오지 않게, 어둡고 퀴퀴한 계단 아래를 몇 번이고 쓸고 닦으셨을 부모님이다. 어린 남매를 아파트에 두고 나와 장사하기엔 걱정이 되어 가게에서 아이들이 먹고, 놀고, 뒹굴게 하려고 컴컴한 그곳에 빛을 열심히 불어넣으셨을 부모님이다.
부모님은 몇 년 뒤 가게를 아파트 골목 안쪽으로 이전했고, 다시 몇 년 뒤에는 동네를 옮겨 상가 건물을 지으셨다. 그간 공휴일 없이 1년 365일 가게 셔터를 올리고 내린 결과이다. 1층은 가게, 2층은 가정집. 어린 남매만 아파트에 따로 두고 장사해야 하는 걱정은 이제 없었다. 부모님은 1층 가겟방과 2층 거실을 연결하는 나무 계단을 만드셨는데, 드라마 속 부잣집에 나오는 고급 목재 계단은 아니었다. 계단 모양을 한 사다리라고나 할까. 계단을 오르내리는 시간은 대부분 밥 먹는 시간이었다. 밥때가 되면 어머니는 1층에서 2층을 향해 외치셨다. “밥 먹어라.”
2층에도 부엌이 있었지만, 장사를 하는 어머니에게 2층 부엌은 그림의 떡이었다. 1층 가게에 작은 방을 마련하여 싱크대를 설치하고, 조리도구를 갖췄다. 어머니는 장사하면서 밥을 짓고, 반찬을 만들고, 설거지했다. 밥 먹으라는 소리를 듣고 내려오는 계단에 걸터앉아 내려다보는 어머니는 바빴다. 순식간에 네 식구 밥과 국을 푸고, 반찬을 담고, 그 가운데 손님이 오면 물건을 팔고 들어오셨다. 나는 그런 어머니를 도와야 한다는 생각을 못 했던 숟가락과 젓가락까지 상 위에 올라오면, 그제야 계단에서 마저 내려온 철없던 딸이었다. 밥 먹는 속도도 느렸다. 느릿느릿 밥을 먹고 있다 보면, 나를 제외한 가족들은 밥을 다 먹었고, 어머니는 뒷정리하고 설거지하고 계셨다. 어머니는 거품 묻은 빨간 고무장갑을 낀 채 한 번씩 뒤 돌아 내 밥그릇에 밥이 얼마나 남았나 보셨다. 그러면 아버지가 “빨리 좀 먹어라. 야야.” 하고 다그쳤고, 그런 아버지에게 어머니는 “놔두소(그냥 두세요). 밥 먹다 얹히니더(밥 먹다가 체해요).” 하며 말리셨다.
가겟방은 좁아서 밥상을 펴고 네 식구가 둘러앉으면 방 안이 꽉 찼다. 어머니는 싱크대 앞에 앉아 있다가 반찬이나 국을 더 담아 주셨는데, 그러다가 손님이 오면 상 옆으로 몸을 비집고 나가셨다. 우리 남매는 어머니가 조금 더 편하게 나가시라고 손님이 올 때면 할 수 있는 한 몸을 가장 작게 웅크리거나 계단 경사면 아래에 허리를 굽혀 잠시 들어가곤 했다.
주부라면, 여자라면, 원하는 부엌에서 우아하게 요리하는 소망이 있었을 법도 한데, 어머니는 2층 부엌을 전시용으로 둔 채, 작은 가겟방 안에서 오래도록 밥상을 차리셨다. 늘 바삐 장사와 살림을 같이 하면서도 어머니는 우리 가족에게 찬밥을 준 적이 없다. 어머니는 된장찌개에 찬밥을 말아 드셨고, 우리가 먹은 밥은 언제나 갓 지은 따뜻한 밥이었다. 어머니는 찬밥을 좋아한다고 하셨고, 어린 난 그 말을 믿었다.
어머니는 찬밥을 스테인리스 그릇에 담아, 냄비에 물을 얕게 깔고 데워 드셨다. 아무리 기능 좋은 전자레인지가 나와도, 찬밥은 이렇게 데워먹어야 찰기가 살아있다고 하신다. 전자레인지에서 해동한 밥은 푸서그리해서 맛없다(푸석해서 맛없다)고.
어머니가 쓰시던 오래된 스테인리스 밥그릇에 갓 지은 밥을 담았다. 시간이 지나 반짝임은 사라졌어도 내구성만큼은 자랑할만한 튼튼한 이 그릇이 꼭 우리 어머니 같다. 반짝이던 젊은 날, 색 고운 신상 립스틱을 고르는 시간보다 품종 좋은 햅쌀 고르는데 시간을 더 할애했을 어머니. 휴가가 무엇인지 여행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계단이 닳도록 1층과 2층을 오르내리며 삶을 바짝 죄며 살았을 어머니. 지난한 날들만큼 어머니는 단단해졌다. 어머니가 살아온 날들이 눅진하게 배어있는 스테인리스 그릇이 참으로 뜨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