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성폭행 사실을 글로 옮기기까지 참 많은 고민을 했다. 누군가는 놀랄 수도 있고 누군가는 대단하다고 할지도 모르는 나의 아픔을 세상 사람들에게 꺼내놓기가 사실은 두려웠다. 무엇보다 걱정이었던 것은 마음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나의 아픔을 눈앞으로 꺼내서 마주했을 때 과연 내가 그 아픔을 마주할 용기가 있을지가 가장 두려웠다. 그 아픔을 온전히 마주하고 더 이상 아파하지 않을 자신이 있을지가 가장 큰 걱정이었다. 그렇게 오랜 고민 끝에 마음속 깊이 묻어두었던 아픔을 글로 옮겼고, 다행히 그 아픔을 마주한 나의 모습은 걱정했던 것보다 훨씬 담담하고 용기 있었다. 그때의 아픔들이 더 이상 아프지도 두렵지도 않았다. 다만, 그때의 그 여리고 어린 소녀의 모습은 참 외로워 보였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홀로 무서운 세상에 내던져졌고 치열한 세상에서 홀로 살아남기 위해 애쓰는 당시의 어린 나의 모습에 눈가가 촉촉해졌다. 대견하고 기특하면서도 그 시간을 견뎌온 그때의 나를 마주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한편으론 마음속에 아주 깊이 묻어두었던 아픔을 글로 옮기며 홀가분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동안 혼자 외로운 싸움을 해온 나 자신에게 주는 해방이라고나 할까. 물론 내가 이 이야기를 세상 밖으로 꺼낸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다. 하지만, 적어도 나와 같이 성폭력, 가정폭력을 당한 피해자들에게 조금이나마 용기가 되고 희망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무엇보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의 기억은 신뢰도가 떨어지기 때문에 더 늦기 전에 나의 아픔을, 나의 고통을 기록해두고 싶었다. 내가 기억 못 하면 그 고통스러웠던 사실은 없던 일이 될 수도 있으니까. 기억하기도 싫지만, 내가 당한 이 폭력들이 없던 일이 되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나와 같은 폭력을 당한 사람들에게 이 말을 전하고 싶다. 아픈 상처를 애써 꺼낼 필요도 애써 감출 필요도 없다고. 하지만, 적어도 피해자인 본인 스스로 움츠러들고 세상으로부터 도망가진 말라고 말이다.
솔직히 가끔은 액션 영화에서 주인공들이 저마다의 이유로 복수하는 모습을 보며 나도 가해자들이 내게 줬던 그 고통을 그대로 돌려주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하지만, 복수의 끝은 어쩐지 공허해 보였다. 전혀 행복하거나 후련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복수라는 말을 마음속에서 지웠다. 차라리 그들을 용서하고 그 고통에서 나를 완전히 해방시켜 주기로 했다. 그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해서. 그리고 그 고통을 이젠 나에게서 완전히 떠나보낼 준비가 되었다.
아프고 고통스러웠던 그 시간을 떠나보내고 그 고통의 속박에서 자유로워 지기로 했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처럼, 시간이 흘러 어른이 된 내가 그때의 어린 나를 안아줄 수 있게 되었다. 눈을 감고 그 시간을 돌이켜 보니 작고 여린 소녀가 살기 위해 필사의 몸부림을 치는 모습이 눈에 아른거렸다. 얼마나 고통스럽고 치욕스러웠을까. 그럼에도 참 잘 살아냈다. 가족이라는 합법적인 이름 아래 철저히 고립된 폭력이었으니까. 이젠 그 아프고 고통스러웠던 기억을 이 글을 끝으로 자유롭고 행복한 기억만 가득 채우고 싶다. 누구보다 치열하게 간절하게 삶을 살아왔기에 내 삶을 행복하게 누릴 자격은 충분하지 않을까. 가장 외롭고 힘든 나와의 싸움에서 나는 살아남았다. 그리고 이 모든 여정을 통해 내 삶을 더욱 소중히 여기게 되었다.
고통으로 얼룩진 나를 만나는 일은 생각보다 큰 용기가 필요하다. 그럼에도 꼭 만나야 하는 시기가 온다면 외면하지 말고 용기내주길. 부디, 외롭고 고통스러운 나를 스스로 포기하진 않길 바란다. 아픔을 마주할 용기가 필요한 모든 이들에게 전하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