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hining days Oct 22. 2023

좋은 인연, 나쁜 인연

나와 할머니는

추석을 며칠 앞두고, 드디어 고모들이 남자친구를 데려와보라고 했다. 친척들이 다 같이 모인 자리에서 남자친구를 소개해드렸고, 결혼 준비를 시작해 보라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 주 토요일에 결혼식장을 계약하고 왔다(알아서 준비해 보라는 말에 결혼 날짜도 마음대로 정해버렸다).


지금 사는 집에 신혼살림을 차리기로 하고,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예전에 살던 곳으로 이사를 가셨다. 토요일에 남자친구와 시간을 맞춰 할머니를 뵈러 갔다. 할머니는 '혜원이가 키가 작아서 결혼을 못할 줄 알았다'는 우스갯소릴 제법 진지하게 하며, 남자친구에게 고맙다고 말씀하셨다. 마지막 남은 숙제를 끝마친 사람의 개운한 표정이었다.


그는 나뿐 아니라 우리 가족들에게도 다정하게 대했다. 작별인사로 그가 할아버지를 안아드, 그 빛에 못 이겨  쭈뼛쭈뼛 할머니를 안아드렸다. '그'라는 유성우가 돌덩이처럼 단단했던 우리의 우주에 균열을 내는 것 같았다.


그날 이후 우리의 작별인사는 자연스레 포옹이 되었다. 우리에게 필요했던 게 단 한 번의 포옹이었나 싶을 만큼, 맞닿은 체온 어색했던 속마음까지 녹였다(감정이란 건 어쩌면 감각에서 시작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내가 안아본 할머니의 어깨는 작고 연약했다. 더 이상 지난날의 억척스럽던 할머니가 아니었다.


"할머니, 사랑해요. 할아버지, 키워주셔서 감사해요."


그 말을 하고 보니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I love you, thank you. 별거 아닌 이 말을 하기가 너무 오래 걸렸던 것 같아서, 먼 길을 돌아 이제야 올바른 종착지에 도착한 것 같아서…….




결혼을 두 달쯤 앞뒀을 때였다. 할머니가 화장실에서 크게 넘어지셨다. 머리가 아팠지만 누워서 쉬면 괜찮아질 거라며 진통제를 먹고 며칠을 버텼는데 얼마 후 의식을 잃고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뇌출혈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결혼 준비에 한창이었는데……. 청첩장을 준비하고, 지인들과 약속을 잡고, 신혼여행에서 어떤 옷을 입을지, 집은 어떻게 꾸밀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인생은 늘 한 치 앞도 알 수가 없었다.


이대로 돌아가시면 평생 후회가 남을 것 같았다. 한 번도 할머니에게 최선을 다해본 적이 없었는데 이렇게 돌아가시면 평생 자책감이 들 것 같았다. 이기적 이게도 남겨질 나를 위한 걱정이었다.


할머니가 눈을 뜨시길 바랐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돌아가실 뻔했던 위기를 모면했으니 이번에도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결혼식 전에 깨어나셔서, 이때껏 당신이 키운 손녀가 웨딩드레스를 입고 결혼하는 모습을 혼주석에 앉아 뿌듯하게 바라봐주시길 바랐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효도 것 같았다. 그러나 할머니의 상태는 차도가 없었다. 평소에 좋아하시던 찬양을 들려드리면 손가락을 미세하게 움직이거나 울 것 같은 표정을 짓기도 했지만 딱 거기까지일 뿐이었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될지 알 수 없었다. 하루가 될지, 이틀이 될지, 아니면 반대로 너무 오랜 시간을 병석에서 보내실지 누구도 모를 일이었다. 결혼식을 미뤄야 할지도 몰랐다. 혹시 결혼식 직전에 돌아가시면 어떻게 해야 할지(심지어 결혼식 당일에 돌아가실지조차) 모든 것이 다 통제 밖의 일이었다. 내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은 늘 사소한 것들 뿐이었다.   


그러나 결혼식 당일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혼주석에는 큰 고모, 큰 고모부가 앉아계셨다. 내가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박수갈채를 받는 동안 할머니는 중환자실에 홀로 사경을 헤매고 계셨다.


어느덧 완연한 봄이 되었다. 꽃을 유난히도 좋아하시던 할머니는 철쭉이 흐드러지게 핀 4월 중순에 눈을 감으셨다. 이제 내 옆에 남편이 있으니 '이만하면 됐다' 싶으셨는지, 가장 화창하고 따뜻한 날을 골라 하늘나라로 가셨다.


"내 소원은 이제 그거 하나지. 우리 혜원이 결혼해서 애 낳는 것까지 보고 죽는 거."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던 할머니의 소원을 나는 끝내 이뤄드리지 못했다.




중환자실에 계셨던 몇 달 동안, 의식 없는 할머니의 귀에 대고 사랑한다고 속삭였다. 할머니가 쓰러지시기 전에 사랑한다는 말을 해둬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삶을 뒤돌아보면, 사랑이란 이름으로 행해지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만을 주진 않았다. 할머니의 사랑이 지나간 자리엔 크고 작은 생채기가 남아서 오랫동안 나를 아프게 했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완벽한 할머니는 분명 아니었지만, 나 또한 할머니에게 완벽한 손녀가 아니었음을.


할머니의 손을 붙들고 이야기했다. 당신이 줄 수 있는 전부를 주셔서 감사하다고. '원망'이 '감사'로 바뀌었던 것처럼, '아직 가시면 안 된다'던 나의 고백 또한 '이제는 가셔도 괜찮아요'로 변해갔다.


"할머니, 너무 힘드시면 이제 가셔도 돼요. 그동안 기다려주셔서 감사해요. 저는요. 생각해 보니까 이 집에 태어나길 잘한 것 같아요. 너무 힘들었지만, 남들보다 몇 배는 더 힘들었던 것 같지만, 남들은 쉽게 배울 수 없는 것들을 알게 된 것 같아요."


이별을 충분히 준비할 수 있어서 얼마나 감사는지 모른다. 못난 손녀딸이 뒤늦게 후회하지 않도록 할머니는 추운 겨울을 병상에서 버텨주셨다. 우리에게 이런 시간이 없었다면, 미워할만한 상황에서 미워했던 일들까지 두고두고 후회했을 것이다. 할머니의 서툰 방식을 좀 더 이해할 순 없었을까, 더 너그럽게 받아들일 수는 없었을까 하고, 결국 남는 건 후회뿐이었을 것 같다. 그러나 할머니는 마지막에 가장 큰 선물을 주셨다. '할머니'와 할머니를 미워했던 '나'를 이해하고 서하고 마침내 새로운 국면으로 넘어갈 수 있도록 시간이라는 선물을 주고 가셨다.


할머니 장례식장에서 고모들이 말했다.

"엄마는 혜원이 너를 제일 좋아하셨어."

내 앞에선 한 번도 표현해주지 않았던 할머니의 진심이었다.


오랜 시간을 잘 지내도 마지막에 사이가 틀어지면 악연으로 기억된다. 평생을 다퉈도 마지막에 화해하면 좋은 인연으로 남는다. 할머니와 나는 마침내 좋은 인연이었다. 끝이 좋으니, 다 좋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