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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ining days Apr 09. 2023

낯선 게르에서의 잊지 못할 하룻밤

게 주어진 자유 이번이 마지막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년까지 일할 수 있다는 공무원의 장점은, 쉬지 않고 일해야 한다는 단점이 될 수도 있으니까.(육아휴직 때는 아이를 키워야 하니까 논외로 하고).


어떻게 하면 이 시간을 특별하게 보낼 수 있을까 고민이 됐다. 너무 한가하게 보내고 싶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빡빡한 계획을 숙제하듯 보내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기회가 주어지면 (웬만해선) 다 해보기로 결심했다. 가 됐든, 일단 인연이 닿면 발이라도 담가보자. 그것이 2년의 자유를 알차게 보내고픈 (구) 직장인, (현) 대학생의 마음가짐이었다.




"언니도 학생회 같이 하실래요?"

25살에 대학생이 된 내가 학교에 적응할 수 있었던 건 아마도 학생회 한 덕분이 크지 않았까 싶다.


가장 좋았던 점은 과방에 들르기가 머쓱하지 않는 점이었다. 거기에 가면 어떤 수업이 빡빡한지, 과제는 얼마나 많은지에 대해 들을 수도 있고,  좋으면 따끈따끈한 시험 족보까지 얻을 수 있었다. '그 교수님은 매 그 파트에서 시험문제를 내시더라', '도저히 쓸 내용이 없을 땐 편지라도 써내면 도움이 된다' 등의 증언이 쏟아져 나오는 곳이 바로 과방이었다. 밥 먹을 사람이 없으면 과방에 가서 '자장면 먹을 사람?' 외치면 만사 오케이다. 짬뽕과 군만두는 덤으로 따라올 것이다.


점심을 먹고 학생회관을 어슬렁거렸다. 동아리방마다 회원모집에 한창이었다. 기왕 대학교에 왔으니 동아리나 한번 들어볼까 싶어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한 곳에 멈춰 섰다. 기타 동아리였다. 


똑똑, 문을 열고 들어갔으나, 아무도 주목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기타를 치고 있는 아무나를 붙잡고 "여기 가입하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라고 묻자 일단 개인 기타가 있어야 한다는 무심한 답변이 돌아왔다. 하긴. 제대로 연주하려면 집에서도 연습을 해야 하니까, 개인 기타가 있어야겠다 싶었다.


주변에 수소문  결과 '어느 선배가 요새 기타에 관심이 있더라'라는 소식을 들게 되었다. 며칠 뒤 우리 종로 낙원상가에서 만났다. 선배는 '기타 좀 칠 줄 아는' 동생을 데려왔고, 그 동생은 기타 소리가 괜찮은지, 이 정도면 적당한 가격인지를 봐줬다. 우리 셋은 기타를 하나씩 등에 메고 인사동 한복판을 걸었다. 그 모습이 제법 위풍당당 했(을 것이)다. 저녁을 먹으러 가는 중일뿐이었지만 벌써 뭐라도 된 것 마냥 기분이 좋았다.  


하면 축제 무대에 오를 수도 있다는 소릴 듣고 꿈부풀지만 손가락 끝을 파고드는 기타 줄의 고통을 참을 수 없어 몇 번 치다 말았다. 래도 그때 기타를 산 덕분에 몇 년 뒤 문화센터에서 기타 수업을 들을 수 있었으니 이 정도면 손해 본 장사는 아닌 걸로 결론지었다.  


그 이외에도 재미있는 일들이 많았다. 정신병원(입원병동)에서 사회복지 실습을 받은 일도 그렇고, '국제개발과 협력'이라는 교양수업을 듣고 미얀마로 봉사활동 갔던 일, 지역복지관 주최 공모전에서 학우들과 함께 장려상을 받은 일, 학과 공모전에 지원해서 30만 원의 상금을 받은 일  그랬다. 


우리 학교 성적장학금 학비의 70%만 지원됐다. 나머지 30%를 채울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다가 우연히 '장학생 선발안내'라는 공지사항을 보게 됐다. 밑져야 본전이지 싶어 자기소개서를 써서 대외 장학금에 지원했더니, 운 좋게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졸업할 때까지 전액장학금 받을 수 있었다. 국가장학금, 성적장학금, 대외장학금을 합치니 내가 낸 학비가 거의 없었다. 이 모든 경험들을 공짜로 누릴 수 있었다니! 학비 때문에 4년제 진학을 포기했던 나에게 이게 얼마나 신통방통하고 신기한 일이었지 모른다.




여름방학 때였다. 교회에서 몽골 선교팀을 모집한다고 하길래 이번에도 손을 번쩍 들었다. 


몽골 게르(전통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됐다. 여름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몽골의 밤 추웠다. 그날은 비까지 내려 평소보다 기온이 더 낮았다. 게르 중앙에는 어릴 때 학교에서 보던 것과 비슷한 난로 하나가 있었 적정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난롯불이 꺼지지 않도록 밤새 땔감을 넣어줘야 했다. 너무 세지도, 약하지도 않게 불조절을 잘하는 게 중요했다. 우리는 돌아가면서 불침번을 섰다.


몽골의 게르(출처: 언스플래쉬)


어깨를 톡톡 치는 손길에 잠에서 깼다. 내 차례가 된 거였다. 먼저 불침번을 섰던 동생들 잠이 안 온다고 했다. 우리는 각자의 침대에 걸터앉아 은은한 어둠 속에서 난롯불을 바라봤다.


퉁퉁퉁. 게르를 두드리는 빗소리.

타닥타닥. 나무 타는 소리.

그리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작 목소리.

낯선 땅에서의 어슴푸레하고 몽롱한 밤이 지나가 있었다.


잠시 게르 밖으로 나갔다. 어느새 가 그쳐있었고, 잔뜩 끼었던 구름도 한걸음 물러가 있었다. 빗물에 불어난 계곡물이 거센 물소리를 냈지만, 몽골의 밤은 불빛 하나 없이 캄캄해서 이 어디 있는지조차 보이지 않았다.


인적이 드물고 문명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 광활한 자연 속에 가 있었다. 하늘의 무수한 별들 가운데 내가 있었다. 시도해보지 않았더라면 마주하지 못했을 것이다. 평생 잊지 못할 몽골에서의 그 밤을.




몽골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을 때였다. 그날만큼은 아니었지만, 한국 치고는 밤하늘의 별이 유난히도 반짝이는 날이었다. '하늘이 참 예쁘네.' 그 아래로 높이 솟은 아파트가 보였다. 주머니 속에 있던 MP3(운동할 때 쓰는 용도)와 휴대폰이 만져졌다. 갑자기 신기하면서도 낯선 느낌이 들었다. '내가 어떻게 이런 삶을 살게 됐을까?'


MP3가 없어서 영어 듣기 공부를 하지 못하던 때가 있었다. 해성적은 좋았지만 듣기 성적은 늘 평균 이하를 맴돌았다. 전자사전이 없어서 두꺼운 종이사전을 들고 다니느라 가방은 늘 무거웠다. 교회 차를 탄 날, 친구가 나에게 속이 안 좋다며 창문을 열어달라고 하는데 어떤 버튼을 눌러야 할지 몰라 창피했던 기억났다. 집에 차가 없으니 모든 버튼이 낯설었던 것이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아파트는 이번에 새로 이사 온 임대아파트였다. 그동안 나는 (전문가를 부르기 돈 아깝다며 할머니, 할아버지가 손수 시멘트를 발라 만든) 삐뚤빼뚤 수평도 맞지 않는 계단의 오래된 단독주택에만 20년 넘게 살았더랬다. 친구들이 데려다주겠다고 해도 우리 집을 보여주기가 창피해서 손사래를 치 멀리서부터 도망쳤던 그곳. 끼익 하는 철문소리가 유난히 시끄럽고, 늦은 밤 계단 옆 컴컴한 공간에서 누군가가 튀어나올까 무서워서 속으로 노래를 불러야만 오를 수 있었던 그곳. 내 평생 그곳을 벗어날 수 있을 거라 상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 내가 아파트에 살될 줄이야.


10대 때에는 감히 꿈도 꾸지 못한 일들이었다. 나만 핸드폰이 없다는 게 창피해서 공부에 방해될까 봐 안 사주신다는 핑계를 댔다. 그런데 지금 내가 최신 스마트 갖고 있다니! 자동차도 낯설어하던 내가 비행기를 타다니! 그것도 두 번씩이나! 해외여행을!


이젠 물건이든 경험이든 보다 가지지 못한 게 딱히 없는 것 같았다. 충분하진 않아도 부족한 게 없었다. 아니, 사실 나에게는 이 정도도 충분하다 싶을 만큼 이미 많은 것을 갖고 있었다. Enough is as good as a feast!


20살 이전의 나를 돌아봤다. 그랬던 내가. 그랬던 내 주제에. 어느새 지금의 내가 되었다.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곳까지 아주 멀리 지나와 있었다.


적어도 내 인생에 있어서는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틀렸다. 내 자아는 어릴 적 경험에 고착화되어있지 않다. 지금도 나는 나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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