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뮤지컬 넘버 연기
오 마이갓! 어쩌면 좋아.
친구야 네가 해냈어.
하늘에서 내린 완벽 커플 바로 두 사람.
어쩌면 좋아!
뮤지컬 <금발이 너무해 (Legally blonde)> 중, 어쩌면 좋아
오 마이갓! 내가 다른 이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있을지 상상이나 했을까? 뮤지컬 배웠다는 내 말에 지인은 물론 부모님도 놀라며 “네가?”라는 반응이었다. 나는 춤과 노래에 자신이 없다. 그래도 연극은 몇 번의 경험이 있다. 대학교에서 잠시 연극동아리도 했었고, 교사가 되어서도 연극연수도 다녔다. 그렇다 해도 8월의 내가 뮤지컬 연습을 할지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인생은 자주 예상을 빗나간다.
소설을 한 편 완성해 보니 몸을 좀 쓰고 싶었다. 내 첫 소설은 종이인형극 같았다. 캐릭터도 더 실감 나게 세우고, 배경도 풍성하게 만들고 싶었다. 무대에 직접 서서 연기를 해보고 조명이나 음향 같은 장치를 경험하는 게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연극은 휴직기간동안 해보고 싶은 목록 중 하나였다. 무대에 올라가는 희열을, 함께 작품을 만드는 즐거움도 다시 느끼고 싶었다. 어디 연극 프로그램 올라온데 있는지 들여다보았다. 그러다 구청에서 하는 '뮤지컬 넘버 연기(부제 -캐릭터의 이해)'가 눈에 들어왔다. 분명히 굵은 글씨로 노래는 단체곡과 듀엣곡만 불러도 된다고 적혀있었다. 그럼 노래 좀 못해도 괜찮겠다 싶었다. 입만 뻥긋거리거나 묻어가도 되겠지?
산다는 건 늘 예상할 수 없다지만 웬걸. 참석하기 일주일 전 단체 카톡방에 안내문이 올라왔다. 첫날 자기소개에 부를 뮤지컬 넘버를 모두 준비해 왔으면 좋겠다는 메시지. 아마 이걸 보고 중도포기자가 많았을 것 같다. 나는 두 가지 마음사이에서 왔다 갔다 했다. ‘어차피 처음 보는 사람이잖아. 어떻게든 뭐 되겠지.’라는 미래의 나에게 맡기는 무책임한 마음 1. ‘사람들 앞에서 노래하고 춤을 춘다고, 어떡하지? 뭘 불러야 하지’라고 걱정하는 마음 2.
평소에 뮤지컬을 자주 보지 않았고 잘 몰랐다. 친구들에게 도움을 청해 추천곡을 받았다. 그중 <빨래>를 선택했다. 마침 몇 년 전 ‘놀면 뭐 하니’에서 뮤지컬 넘버 몇 곡이 나온 적이 있다. 영상을 찾아보고 그중 ‘슬플 때 나는 빨래를 해’ 넘버를 준비했다. 노래가 짧고 연기가 많아 이거다 싶었다. 차라리 연기를 보여주자 싶어 뮤지컬 속의 할머니가 되기로 했다.
첫날 큰 강당으로 모였다. 강사님은 일찍 와서 미리 조명과 음향을 확인하고 있었다. 몇몇 수강생들도 일찍 와서 앉아있었다. 물을 마시며 목을 푸는 사람, 준비해 온 뮤지컬 영상을 확인하는 사람. 흡사 공개 오디션 장소 같았다. 왠지 양끝부터 순서가 돌아갈 것 같아 눈치껏 가운데 자리에 앉았다. 한 명씩 돌아가며 자기소개를 했다. 자기소개가 끝나자 강사님은 이제 한 명씩 나와 준비한 노래를 부를 시간이네요라고 말했다. 강사님의 말투는 젠틀했지만 우리는 서로 떨고 있었다.
예상대로 오른쪽 끝에 앉은 사람부터 나왔다. 첫 주자는 노래가 끝나자마자 빨리 자리에 앉으려고 했다. 그런데 들어가는 그녀를 강사가 붙잡았다. 그리고는 지금 부르신 노래의 감정, 호흡, 톤을 어떻게 잡았는지 물었다. 본인이 먼저 시범을 보이더니, 첫 주자에게 ‘그럼 다시 한번 불러볼까요?’라고 아주 친절하게 말했다.
지켜보던 나의 예상이 깨지다 못해 문화충격이었다. 심지어 그 자리에서 같은 노래를 3번 부르고 들어간 분도 있었다. ‘와, 예술 수업은 이런 건가?’ 나라면 노래 부른 사람도 떨렸을 거고 기다리는 사람도 있으니까, 얼른 잘했다고 말하고 들어가게 했을 것 같은데... 저렇게 주위를 신경 쓰기보다는 그 순간에 집중해서 끝까지 물고 들어가는 건가 싶었다.
나중에 강사님과 친해지며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그는 앞으로는 첫 시간 노래 부르기를 없애야 할 것 같다며 말했다. 참여자들이 그토록 부담감을 느꼈는지 몰랐다고 했다. 그 말을 들으며 속으로 오히려 첫 시간이라 다들 철판 깔고 부르지 않았나도 싶었다. 실은 그날 누구의 노래가 어땠는지 기억이 안 난다. 그저 그날의 분위기, 그리고 내가 차례에 불렀던 노래만 남아있다.
이후 수업을 통해 캐릭터, 장면, 메서드 연기 등을 맛보기로 배웠다. 강사님도 초보자를 위한 것이라며 강조했다. 이론적인 것을 내가 맡은 캐릭터에 적용해 볼 수 있었다. 소설을 구상할 때도 도움이 되지 않나 싶다.
[1] 캐릭터 분석을 위한 질문
1. 나는 누구인가?
(예-나는 25살 대학생 남자, 소심한 성격이다)
2. 나는 어디에 있나?
(예- 2022년 12월 24일 17시 서울 명동거리, 눈이 아주 조금 내리고 있다.
3.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욕구>
(예-내가 사랑하고 있는 사람에게 오늘은 꼭 사귀자고 말하고 싶다.)
4. 나는 왜 그것을 원하는가?
(예-평소에 소심한 성격으로 사랑을 놓친 나이지만, 이번만큼은 이 사람만큼은 놓칠 수 없다. 기회가 날아가기 전에 나의 진심을 전달해서 알콩달콩한 연애를 하고 싶다. 그녀는 내가 힘든 일이 있을 때 누구보다 먼저 달려오고 걱정해 줬던 사람이다.)
[2] 장면이해
1. 저 사람과 나의 관계는 무엇인가?
(예-처음 본 사이라 방금 만났다, 일 때문에 사이가 좋지 않은 직장 상사다 등)
2. 나는 무엇을 위해 분투하는가? <목적>
(부정동기 : 나를 괴롭힌 사람들을 증오한다.
긍정동기 : 나는 학폭에서 벗어나기 위해 내적/외적으로 싸운다. 나를 무너뜨리려 하는 그들에게 나는 죽지 않는다고 끝까지 살아낼 것임을 보여줄 것이다.)
-> 부정동기도 찾아야겠지만, 긍정동기를 더 찾는 게 캐릭터에 힘을 부여한다.
3. 나는 왜 이 말 또는 행동을 하는가? <동기> <서브텍스트>
(예- "그 누구도 끌어내릴 순 없어 이젠!" , 나를 차별했던 이들 그리고 나 스스로에게 강해진 나를 알리고 다짐하며 경고한다.)
[서브텍스트] : 텍스트 밑의 의도다. 같은 캐릭터도 배우들마다 연기가 달라지는 이유다. 그래서 대사와 행동 아래 깔린 서브텍스트가 중요하다. 이 동작의 진짜 의도 <서브텍스트>는 무엇일까?라는 고민들.
[메서드 연기] : 실제로 그 역할인 것처럼 하는 디테일을 더하는 단계, 캐릭터의 정서와 감정을 먼저 느낀 다음 대사(행동/가사)를 하자. 그렇다고 혼자만 느꼈다고 주장하는 것은 소용없다. 관객에게 그 정서가 잘 보이게 하는 것이 바로 메서드 연기다. (예- 뛰어 온 상황이라면, 무대 뒤에서 뛰면서 정말로 숨이 찬 상태로 연기하기)
[목소리, 호흡] : 뮤지컬은 노래 가사로 캐릭터를 드러낸다. 힘 있게 노래하고 잘 전달하려면 복식호흡이 중요하다. 노래 한 곡에서도 감정이 바뀌는 대목이 있다. 그 변화가 느껴지도록 호흡을 활용하고, 톤을 바꾸고, 목소리 크기를 조절할 수 있다. 한 곡의 노래 안에도 기승전결이 있다. 목소리 톤에서 캐릭터의 성격, 나이, 상황 등이 묻어난다.
첫 수업 이후부터는 3-4명씩 팀을 이뤄서 뮤지컬 넘버 한 곡을 연습했다. 강사님이 각자의 실력과 스타일을 고려해 후보곡을 단체 카톡방에 올렸다. 이왕이면 신나는 노래를 부르고 싶었다. 그래서 뮤지컬 <금발이 너무해 (Legally blonde)> 넘버를 골랐다.
그중 우리 팀이 했던 ‘어쩌면 좋아’는 뮤지컬 첫 장면에 등장한다. 주인공 엘이 프러포즈를 받았다며 호들갑 떠는 친구 세 명이 부르는 노래다. 나는 그중 친구 2(세레나) 역할이었다. 좋게 말하면 발랄하고 어떻게 보면 경박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친구들이다. 캐릭터 자체가 밝으니 팀원들과 아이디어를 내고 합을 맞추는 과정이 더 즐거웠다. 이것저것을 아이디어를 던져보며 서로 신나서 깔깔대고 여러 동작을 시뮬레이션했다. 마지막 발표날에는 의상도 맞추기로 했다. 발표날에는 미리 한 시간 일찍 만나 연습했다.
5번의 짧은 수업이었지만 두 번의 무대를 경험했다. 첫날 낯선 사람들 앞에 섰던 독무대. 그리고 마지막 날 팀원들과 함께 준비하고 연습했던 무대. 이미 여러 번 무대에서 연습하고 발표했지만 오를 때마다 새로웠다. 다른 팀들의 무대를 보는 것도 좋았다. 다들 평일 오후에 잠시 시간을 내어 무언가에 몰입해 본 경험이 아니었을까?
시작은 몸도 움직일 겸, 글 쓰는 데 도움이 될까 해서 기웃거렸던 것뿐이었다. 내 기대 이상으로 많이 웃었다. 나 이런 것도 해봤어라는 어깨뽕도 솟았다. 올여름날 나에게 활력을 준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