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소설 강좌
시작은 호기심이었다. 플롯을 배우면, 소설 안의 법칙을 알면, 잘 써지지 않을까?
몇 년 전 동화수업을 듣고 직접 몇 편 써본 적이 있었다. 당시 수업에서 주인공을 끝까지 물고 늘어져보라는(궁지에 몰든, 파국으로 가든) 말을 들었다. 그런데 나는 끝장을 보는 게 참 어려웠다. 플롯 강좌를 들으면 내가 마주했던 벽을 넘을 수 있지 않을까? 내 경험 너머의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워낙 인기강좌였는데 운 좋게 빈자리가 나왔다. 5월부터 7월까지 소설수업을 들으며, 소설이라는 장르에 매혹되었다.
“장점이 단점을 압도한다.”
수업을 진행하는 작가님이 늘 강조했던 말이다. 처음 4주간은 작가들의 단편소설을 과제로 읽었다. 수업시간에는 독서토론처럼 작품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단순히 좋다를 넘어서 왜 좋았는지, 인물을 어떻게 세웠는지, 문장은 어떤지, 인물 간의 관계와 갈등 등에 말을 주고받았다. 한 명씩 말하면 작가님이 중심을 잡으며 갈무리를 했다.
소설이든 사람이든 완벽한 건 없다. 하지만 때때로 단점에 사로잡힐 때가 많다. '좋은 소설은 단점도 있겠지만 그걸 압도할만한 장점이 큰 소설.'이라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쉽지 않지만 내가 나를 볼 때도 장점을 더 바라보고 싹 틔우고 싶었다. 나아가 교실 속 아이들도, 내 주변 사람들에게도.
제시해 주신 단편 소설을 읽으며 항상 놀랐다. 흥미로우면서도 세련되게 잘 쓰는 작가들에게 감탄했다. 문제는 문우들의 합평이 시작되고부터였다. 작가들 작품 분석이 끝나면 순서를 정해 매주 2명씩 단편소설을 제출해야 했다. 나와 멀리 떨어져 있는 작가들이야 프로니까 당연히 잘 쓰지 했다. 그런데 여기 입문반 아닌가? 문우들이 제출한 소설들 모두 너무 잘 써서 내 차례가 다가올수록 부담이 되었다. 다음 주가 내 차례인데도 아직 뭘 쓰지도 못했다. 왜 내 경험밖으로 더 상상해서 뻗어나가지 못하나? 하며 생각만 쥐어짜고 있었다.
내 얼굴을 보고 마음을 읽었는지 작가님이 웃으며 말했다. '처음부터 망하려고 쓰는 사람은 없다. 잘 망가지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냥 망해도 괜찮다.' 이 말에 힘을 얻었다. 그래서 그냥 내가 쓰고 싶은 것 다 써보자. 일단 제출에 의의를 두되 내가 소설 쓰는데 영 소질이 없으면 그만두자. 이런 마음으로 도서관에 갔다. 실력이 없으면 앉아있기라도 해야 지란 생각으로 엉덩이를 붙였다.
그런데 쓰는 과정이 의외로 재밌었다. 이건 뭐지 싶었다. 내 첫 소설은 마치 나 혼자 하는 인형놀이 같다. 그것도 납작한 종이인형극. 아직 입체적인 인물을 세우는 데도 서툴고 배경도 풍부하지 않다. 엄청난 상상도 아닌 실은 내 안의 경험 속에서 피어낸 이야기였다. 그래도 인물의 이름을 새로 붙이고, 두 인물이 뚝딱뚝딱거리며 관계를 만드는 과정을 쓰는데 재밌었다. 도서관에 앉아 한참 혜진과 제원(첫 소설 속 주인공)의 이야기를 쓰다가, 중간에 화장실 거울에 비친 내 얼굴에 미소가 번지는 걸 보고 이게 뭔가 싶었다.
늘 그랬듯 완성하고는 뿌듯했다. 첫 작품을 밴드에 툭 올리고 나서도 흥분이 쉬이 가라앉지 않아 방안을 서성였다. 합평 전 날에도 잠이 오지 않았다. 내 글을 누군가 읽어준다는 것이 부끄럽기도 했지만 고마웠다. 합평 당일에 문우들이 내 글에 뭐라고 해도 기분 나쁘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서야 현타가 찾아왔다. 대체 내가 뭐라고 글에 씨부려 된 거야?! 그 첫 소설은 아직도 다시 꺼내보지 못하고 묻어두었다. 시간이 더 지나고 숙성을 거쳐야 꺼내볼 수 있을 것 같다.
한 편의 글을 끝낸 후의 후련함은 이미 익숙했다. 그런데 쓰는 과정에서 느낀 즐거움이 생소해서 더 이어가고 싶었다. 내가 느꼈던 이 재미와 매력은 무엇일까?라는 마음의 가닥을 찾아보려 나아갔다. 작가님과 문우들이 추천해 준 소설을 읽고, 강좌에서 만났던 사람들과도 후속모임을 진행 중이다. 그리고 또 다른 소설강좌를 신청했다.
후속모임밴드에 두 번째 소설을 올렸다. 이번에는 쓰는 과정이 즐겁지 않았다. 그동안 읽고 배우면서 아는 것들이 생겼다. 모르니까 내 마음대로 쓰자 단계는 즐거웠다. 어설프게 알고 나니 글에 힘이 들어갔다. 자꾸 단어 하나, 문장 하나를 곱씹으며 검열했다. 넘어지기 두려워 온몸에 힘을 꽉주고 덜덜 떨며 내려갔던 스키장의 기억처럼 쫙 나아가지 못하고 힘만 바싹 들어갔다. 그 와중에 신기한 건 이렇게 골치 아프고 어려운데 잘 쓰고 싶다는 욕망이 자꾸 생기는 것이었다. 이건 마치 벗어나기 힘든 늪에 빠진 것 같았다.
힘을 좀 빼고 즐겁게 하고 싶다는 마음을 따라 다른 소설강좌를 신청했다. 여기에서는 두 주에 한 번씩 짧은 분량의 과제가 있다. 작가님 표현을 빌려 '랜덤 밀키트'다. 바로 요리를 시작하기 어려우니, 상황이나 주제가 주어진 쪽지를 뽑는다. 쪽지의 설정을 더 이어가고 확장하면 된다.
이 전의 소설이 '자유화'같다면, 이건 주어진 주제와 재료가 있다. 그동안 자유화에서는 결국 내가 쓰고 싶던 주제를 썼다. 내가 많이 생각했던 것, 내게 영향을 주었던 사건 같은 것을 모티브로 피어올렸다. 그러다 보니 내 안에 갇혀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이렇게 무작위로 뽑은 외부의 주제를 끌고 오는 것도 반가웠다. 좀 더 멀리 바깥의 이야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여전히 외부로부터 시작한 글 속에도 내가 많이 들어있다. 나와 닮은 이야기를 쓰는 걸 보면 신기하다.
이렇게 '소설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여러 텍스트도 접하고, 사람들의 다양한 의견을 듣는 것도 좋았다. 오래전 집 나갔던 교양이 조금은 돌아와 내 방에 쌓인 느낌이랄까. 다른 문우들의 작품을 읽으면서도 감탄했고 자극도 받았다. 나도 더 잘 쓰고 싶은 욕망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잠시 궁금해서 들렸던 정류장이었다. 한 번 해보고 나에게 안 맞는 옷이면 소설 창작에 대한 미련은 깔끔하게 털려고 했다. 그러나 소설의 세계는 나를 압도했다. 기존의 글쓰기를 제쳐두고 이 안으로 더더 들어갔다. 그렇게 나의 시간의 큰 부분으로 자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