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은 Oct 21. 2023

좋아하는 걸 사랑스럽게 보는 태도

4. 국립국악원 - 국악(단소, 장구) 연수

국립국악원 연수는 예전부터 교사들 사이에 인기가 많아서 피켓팅이라고 들었다. 코로나 이후 많이 잊혔던지 올해는 신청자가 적었다. 오랜만에 오프라인으로 열린 강좌였다. 

 

5주 동안 매주 3시간씩 국립국악원에서 연수를 받았다. 

(첫 주는 국악지도 안내/ 단소와 장구수업이 각각 2주씩이었다.) 


그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첫 시간 강사님의 국악수업이었다. 그녀는 우리가 평소 가지고 있는 국악에 대한 오해를 풀어주면서 나아가 어떻게 수업에 활용하면 좋은지를 강의했다. 국악을 찐으로 사랑해서 이걸 막 더 알려주고 싶어 하는 진정성이 느껴졌다. 그래서 내용도 흥미로웠지만 강의자의 태도에 더 눈길이 갔다. 그녀가 나누어준 국악의 매력이다.      


1. 완벽하지 않아서 더 매력적이다. 

말하듯 노래 부르던 것이 민요다. 국악은 5 음계라 중간에 음이 틀려도 어색하지 않다. 그래서 애써서 발성하지 않아도 된다. 민요는 구전음악이다. 듣고 부르는 노래. 오며 가며 듣다 보니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는 노래다. 그만큼 중독성이 강하다. 

교과서에 제시된 민요의 노랫말을 보고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는 교사들의 질문이 많았다. 그런데 어릴 적 우리가 불렀던 노래도 별 뜻 없이 불렀다. 말을 조합하고 장난처럼 불렀다. 그러니까 가사가 완벽하지 않은 민요도 가르쳐주었으면 좋겠다. 민요는 재밌고 중독성이 있어서 전승이 된 노래다.      


2. 삶이 담겨있다.

민요는 사투리, 억양, 뉘앙스, 말맛이 있다. 민요를 통해 향토색이 보존되고 전승된다. 예를 들어 메밀노래는 가사만 보면 무슨 말인지 하나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문화전승자인 할아버지가 노래를 부르며 직접 메밀을 꺾어서 국수로 만드는 과정을 보고 나면 와닿는다. 사랃들의 삶의 모습이 노랫말에 고스란히 들어있다.      


3. 자기만의 길로 간다. 

흔히들 국악은 화음이 없다고 오해하고 평가절하한다. 그런데 국악에도 화음의 개념이 있다. 하지만 아름다움의 기준이 서양음악과 다를 뿐이다. 서양음악은 채우는 게 아름답다고 여겨서 화성을 쌓는 것이 발달했다. 반면에 국악은 선의 미학이다. 동양화처럼 선과 여백을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모든 악기가 각자의 주선율로 나아간다.      


채우는 게 다가 아니라 자신만의 길로 각자 나아간다고?! 속으로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물론 같은 상황도 해석에 따라,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겠다. 그렇다 해도 강사는 자신이 사랑하는 국악에 대한 매력을 발견하고 재정의하고 우리에게 나누어주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대상을 사랑스럽게 보는 태도가 멋있었다.     

 

국립국악원


“예술교육의 꽃은 연주회죠.”    


입문연수다 보니 단소와 장구는 각각 6시간만 배웠다. 그래도 찐 국악인들에게 소수정예로 배울 수 있다니 뜻깊은 기회였다. 그들에게는 자신의 악기가 몸의 일부처럼 느껴지지 않을까? 어릴 때부터 연습하고, 기덕 장단, 낮은 '중'음 하나를 내기 위해 엄청나게 단련했겠지?! 학생인 우리의 수준도 천차만별이어서 가르치는 그들이 오히려 고민이 많았을 것 같다. 아무리 스승의 실력이 빼어나도 6시간으로 무슨 어마어마한 성장이 이루어지겠는가? 그건 그들도 우리도 모두 알고 있었다. 나 역시 즐겁게 악기를 만져보고, 연주자들의 삶도 엿보려는 마음이 컸다. 


단소 강사님은 첫 시간부터 나를 포함한 6명의 수강생들에게 개별 연주시간을 주었다. 그러면 한 명씩 돌아가면서 ‘도라지’, ‘아리랑’ 등을 연주했다. 그렇게 한 명의 연주가 끝나면 강사님은 자세, 입술과 단소사이 거리, 입술 모양, 손에 힘 풀기 같은 것들을 집어주었다. 개인별 코칭이지만 다른 이들에게도 도움이 되는 피드백이었다.  

         

나는 매가리 없는 바람소리만 나기 일쑤였다. 내 차례가 되면 잘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삑삑거림을 들려주는 게 민망했다. 끝나면 괜한 웃음을 지으며 창피한 마음을 숨겨보려고 했다.

           

마지막 수업에서 강사님이 “예술 교육의 꽃은 마지막 연주회죠. 떨리더라도 다른 사람 앞에서 자신의 선택한 곡을 연주하는 경험이 중요해요.”라고 말했다.     

       

조금 있으면 끝날 시간이었다. 다들 나서기 망설였는지 연습실은 한동안 조용했다. 한 분이 손을 들었고 ‘아리랑’을 연주했다. 모두 기다렸다는 듯 박수를 쳤다. 강사님은 억지로 강요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순간 나랑 눈이 마주쳤다. 자연스럽게 내 차례가 되었다. 나는 노래도 아닌 ‘태’ 소리 내기만 보여주었다. 객관적으로 내 실력은 그곳에서 갈 길이 가장 멀었다. 그러나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이미 많은 개별연주를 하며 맷집이 세졌다고 해야 하나. '연주회'라는 단어의 위엄도 한풀 꺾이는 것 같았다. 개인 선택이라고 했지만 무조건 Go 하는 게 안 하는 것보다 더 남았으니까. 어쨌든 단소 강좌는 나의 '태'소리가 끝나며 막을 내렸다.



처음부터 자꾸 무대를 만들어 세워주니, 큰 무대가 와도 덤덤했다. 사람들 앞에서 나와서 해볼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 교실 안에서 아이들을 위해 내가 무대를 깔아주는 것에 대해 한 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일전의 나는 한 명씩 교탁 앞에 세우는 게 아이들에게 부담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이들을 불러 세우는 걸 폭력적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자연스럽게 무대를 노출시키고 기회를 주는 것도 필요하겠다 싶었다. 그러고 보면 나도 열심히 준비한 연극 무대에 올라섰을 때 희열을 기억한다. 떨리지만 긴장을 이기고 무언가를 완수했을 때 벅찼다. 그러니까 이 또한 무대에 올리는 것을 스스로 어떻게 보는가의 해석인 것 같다.  



이전 09화 '오감'을 찾으러 갔는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