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스럽고, 사랑스럽게
올해 여름을 지나며 분노, 무력함, 안타까움, 슬픔, 미안함 여러 감정이 휘몰아쳤다. 그리고 문득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사를 선택하고 나름 열심히 했다. 이런 내가 인정받기는커녕 왜 교직환경은 갈수록 더 힘들어질까? 잘못된 길로 온 것 같아 억울했다.
같은 교직에 있어도 어떤 사람들은 이런 상황을 외면하고 있겠지. 나는 매번 열심히 나가는데. 누군가는 아무것도 안 하면서 무임승차하겠네.
나의 10년 교직생활에 대해 글을 써 보겠다고 휴직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내 글이 무슨 의미가 있지?
그니까 ‘나 이렇게 열심히 살았어! 왜 세상이 몰라줘! 왜 자꾸 실패하며 불행한 것 같지?’라는 마음속 깊은 비관에서 억울함이 올라왔다.
사람들이 자리에 없는 누군가에 대해 평가하는 걸 들었다. 그의 불행과 실패에 대해 안타깝다며 입을 모아 걱정했다. 듣고만 있었는데도 불편했다. 문득 당사자는 그들의 걱정과 다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남들이 평가과 달리 자기 삶이 불쌍하다거나 초라하다고 느끼지 않을 것 같다. 누군가 걱정이라는 가면을 쓰고 내 삶을 마음대로 말하면 화가 날 것 같았다. 그러면서 나도 실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평가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아가 다른 사람들까지 평가하는 눈으로 보았다. 성공과 실패, 행운과 불행 등의 이분법으로 가르면서.
조심스러운 예시지만 써 본다. 독립운동가들 중에는 광복을 못 보고 돌아가신 분이 많다. 그들은 억울했을까? 자신이 열심히 희생했는데 보상도 받지 못했다. 그래서 억울했을까? 생각해 보니 그들은 누구보다 농도 짙은 삶을 살았을 것 같다.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주체적으로. 그러니까 자신의 선택에 전혀 억울하지 않을 것 같다.
그렇게 각자 자신의 가치관대로 선택하는 것 같다. 어차피 앞으로 벌어질 일들은 아무도 모른다. 돌이켜보면 교직에 온 것도, 집회에 참여하는 것도, 휴직을 결심한 것도, 그리고 그 외의 모든 내 발자국들도 내 선택이었다.
교직을 선택할 때 ‘안정성’이란 가치가 중요했다. 막상 내부로 오니 교직이라고 안정이 보장된 것도 아니었다. 끊임없이 흔들렸다. 안전하고 정해진 길이 때로는 가장 위험한 길일 수 있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안정이라는 것은 밖에서 내가 품었던 환상 같은 것이었다.
그렇다면 정답만 쏙쏙 골라서 사는 것처럼 보이는 개꿀삶이라는 건 있을까? 쉬면서 다양한 직종과 연령의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 모두 그 자리에서 애쓰고 있었다. 직업 안에서 좌절도 겪고 보람도 느꼈다.
결국은 내 삶을 어떻게 '해석'할까로 나아간다. 남들의 시선이 아니라 스스로 어떻게 바라보는 게 중요하니까. 자기 계발서에 등장하는 뻔한 문구같지만, 이 뻔한 문장을 이해하기 위해 얼마나 돌아와야 했냐는 글귀에 나도 맹렬히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한다.
나를 위해 내 모퉁이들도 사랑해 주려고 결심했다. 뮤지컬 넘버 연기 수업의 첫 시간에 부를 노래를 고를 때였다. 뮤지컬 <빨래>의 ‘슬플 땐 빨래를 해’ 노래에서는 사회초년생 나영과 주인집 할머니가 등장한다. 나영이가 직장에서 힘들었던 일을 고백하자 주인 할머니는 그녀의 말을 그대로 들어준다. 이후 자신의 내밀한 이야기를 말하며 그녀를 품는다. 지금의 나는 나영이보다 할머니에게 더 마음이 갔다. ‘힘들었지? 나도 그런 적 있었어. 그래도 빨래가 햇빛에 말라서 쫙쫙 펴지는 것처럼 우리 눈물도 곧 마를 거야.’ 누군가에게 손 내밀 수 있는 할머니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내가 걸어오며 마주했던 굴곡들과 모퉁이, 넘어지고 다시 일어섰던 삶의 모든 순간들을 자랑스럽고 사랑스럽게 봐주고 싶었다.
밴드 <데이브레이크>의 오랜 팬이다. 공연장에서 그들이 노래하는 걸 보고 빠진 이후로 종종 콘서트를 찾는다. 매 무대마다 관객들에게 밝은 에너지를 전달하려고 애쓰는 게 느껴졌다. 타인을 즐겁게 하고 일으켜 세워 춤추게 하는 건 멋진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에게는 이미 대표곡(들었다 놨다, 꽃길만 걷게 해 줄게, 좋다 등)이 있다. 나름 인디밴드계의 아이돌이며 밴드 스스로도 음악만으로도 먹고살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도 계속 꾸준히 음반을 내고 있다. 음악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으면서 늘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 그들도 나름 두렵지 않았을까? 대표곡이 사랑을 받는 건 감사한 일이지만, 그만큼 사람들의 기대도 더 높아졌을 것이다. 그 이후 음반에 대해 고민이 많았을 것 같다. 그런데 그런 두려움을 뚫고 계속 나아왔다.
지난 콘서트에서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끝까지 비행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들을 보면서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자부심'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일전의 글에서 동료들이 그럼에도 이 일을 붙잡고 가는 이유를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리고 나만의 가치를 찾아보았다.
수업 준비의 매력, 좌절 덕분에 나를 마주했던 수련의 과정, 고민을 함께 나누는 동료들, 아이들과 연결되었다고 느꼈던 찰나의 순간, 규칙적인 생활을 유지해 주는 루틴, 무궁무진한 글감…
애써 쥐어짰나? 올해 감사하게도 내가 그동안 해보고 싶었던 것을 하나씩 해보았다. 계획했던 것도 있었고 우연히 만났던 것들도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 만난 것들이 나를 압도하기도 했다. 그렇게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아보았다. 그러면서 좋아하는 대상을 바라보는 태도 같은 것도 생각해 보았다.
돌아가면 전보다 힘을 빼고 싶다. 쉽지 않을 것이란 거 알고 있다. 지금까지 힘을 꽉 주고 달려보았으니, 힘을 빼는 데도 연습이 필요할 것이다. 교실 안에서 교사로의 나도, 교실 밖에서 자연인으로의 나도 적당히 중심을 맞추며 가보고 싶다.
앞날을 알 수가 없기에 자꾸 불안했다. 과도한 불안 뒤에는 잘하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 나도 욕심이 많다. 이왕이면 더 잘하고 싶고 남들 앞에서도 잘 나가고 싶다. 그러나 그것은 부록 같은 걸 알고 있다. 내 노력으로 할 수 있는 것도 있지만 할 수 없는 것이 많다는 걸 점점 알아간다. 전에는 그래서 무력해졌다면 이제는 그래서 겸허해지려고 연습 중이다.
마지막으로 내게 ‘시간’을 주기로 결심하고 올해(2023년) 다이어리에 썼던 문장을 가져왔다.
파도가 기본값 같다. 좋고 나쁨이 반복된다. 이렇게 받아들이니 한결 편해졌다. 지금 밑바닥이라고 해도 끝끝내 다시 올라오고 좋아질 거라는 믿음이 생겼다. 나도 해를 거듭하면서 파도를 마주하는 힘도 조금씩 세졌다. 전에는 나를 삼키는 파도 앞에서 힘들었지만 이제는 그 너울에 고개를 빼꼼 내밀고 숨이 쉬어지고, 때론 허리까지 왔다 지나가는 파도도 있다. 지금까지 나 참 애썼다. 그리고 내 주위에 좋은 사람이 많다. 그래서 이후에 또 큰 파도가 와도 지금처럼 또 끝내 걸어 나가겠구나라는 믿어본다. 인생은 알 수가 없어서 계획대로 되지 않아서, 새롭고 즐겁다. 2023년은 또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까? 기대와 믿음으로 기다려본다.
남은 2023년, 그리고 이후의 시간도. 불안과 욕심보다 기대와 믿음으로 나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