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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이 Nov 01. 2020

청보리가 익어가는 청산도에 가다

캠핑카 여행기: 서편제 촬영지 슬로시티 청산도

캠핑카를 갖고 여행을 간다는 것은 고급 호텔에서 머무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기분을 느끼게 한다. 잘 정비된 곳에서 받는 고급 서비스가 아니라 울퉁불퉁 비포장 도로를 달리는 기분과 같다. 특히 섬에 들어가는 것은 더욱 그러하다. 


봄이면 가장 먼저 매화를 보러 남도에 간다. 그리고 봄꽃이 다 질 무렵이 되면 우리는 바다로 간다. 그때부터 늦은 가을까지 바다에서 보내는데... 2017년 5월 우리는 청산도에 가기로 했다. 

청보리가 익어 넘실거리고 유채꽃이 핀 공간에서 바람을 맞고 싶어서다. 푸른 남해 바다는 덤일 테다. 


청산도로 가는 여객 터미널. 이른 새벽이라 바깥은 아직 검다.

직장인들이 선택할 수 있는 여행의 시간이란 금요일 밤부터 일요일 밤까지다. 그 짧은 시간에 저 멀리 국토의 남단으로 달려간다는 것은 도로에서 엄청난 시간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강원도에서 남도까지 가는 시간은 대략 5시간이 걸린다. 육중한 캠핑카를 몰면서 가는 것은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가다 쉬다를 반복한다 보면 아무리 빨리 달려도 대략 밤 12시가 넘어 도착하게 된다. 몇 번의 경험 끝에 아무리 빨라도 12시가 넘는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부터는 그냥 마음을 비우고 천천히 간다. 그리고 선착장에 12시가 넘은 시간 도착하면 여객터미널 주변에서 잠을 청하게 되는 것이다. 

캠핑카 여행이 낭만이라 이야기한다면 바로 이런 지점일 테지만 누군가는 이런 여행을 절대로 꿈꾸지 않을 것이다. 

청산도행 여객선, 퀸 청산

그렇게 청산도로 떠났다. 서편제가 촬영된 공간.

 느림의 미학이 있는 섬으로 출발했다. 


왜 이런 여행을 다니냐는 대답에는 명쾌한 답을 할 수는 없다. 특히나 캠핑카로 떠나는 여행은 더더욱 계획된 여행은 아니다. 카페리가 가능한지만 확인하고 떠나는 여행이다 보니 무계획이 계획이라면 계획이다. 따라서 여행 블로그나 안내서는 더더욱 찾지 않는다. 그냥 떠나다 보면 길이 보인다. 

해가 뜨면서 청산도가 남해 바다 위에 나타났다.
서편제 길을 따라가면서..
우리 가족의 캠핑카. 2017년 5월

느림의 섬이라 이름 붙여진 청산도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아침을 먹는 일이었다. 캠핑카에서 아이들이랑 간단히 아침을 해결하고 섬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내가 원한 풍경은 노란 유채꽃이 출렁이는 풍경이었는데 5월의 청산도는 유채꽃이 지고 있었다. 대신 그곳에는 청보리가 익어가고 있었다. 


푸른 물결이 넘실대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다랑이 논, 초가집, 돌담, 유채와 청보리밭... 천천히 걸으면서 마주한 느림이 포근하게 감쌌다.


푸른 남해바다가 감싸고 있는 초록 물결을 보면서 이 맛에 여행을 다닌다고 생각했다. 이런 풍경 하나로 그 먼길을 달려온 보상을 받는 기분이었다. 영화 서편제에서 듣던 구성진 판소리가 들리는 듯한 길을 천천히 걷다 만나는 청보리 밭은 내가 본 청산도의 최고의 장면이다. 


여행은 이렇게 한 장의 사진으로 이미지로 마음에 새겨진다. 누구에게는 익숙한 공간이지만 여행자에게 여행지는 낯선 공간이다. 내게 이렇게 넓은 청보리 밭도 그랬다. 고양이수염처럼 가느다란 보리의 수염이 바람에 출렁이는 모습은 또 다른 푸른 바다가 되어 일렁거렸다.  

그 초록빛 바다는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마음의 바다에 내려앉았다.


 이 푸르름을 만나러 청산도에 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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