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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이 Nov 25. 2021

5장. 불편한 캠핑, 5000만시대의 모습들.

나와 우리 이웃들의 모습.

부족함을 넘어 불편함이 많았던 유년시절은 힘들었다는 것 말고는 즐겁거나 좋았던 기억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유년시절의 바닷가를 되새김질하듯 생각하는 동안 마을 사람들이 모인 바닷가에 갖가지 색의 풍<햇빛 가리개용 천막>이 걸리고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과 왁자지껄했던 소음을 기억하는 내내 웃음이 묻어나는 것을 보니 잊고있었지만 그시절 나름대로 즐거운 기억이 많았나보다. 

유년시절의 바닷가 풍경은 현재와 비교될수 없을 만큼 많이 다르지만 그 당시 캠핑하던 사람들과 불편한 캠핑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과거, 오래된 추억속 캠핑하는 모습들.

1970년대 중반, 유년시절의 몹시 무더웠던 어느 여름날. 

빈약하기 이를 데 없는 기억들 속에서 가위질 당한듯 조각난 추억속에서 물놀이 한창인 기억 하나를 찾았다.

또래 친구들로 보이는 아이들과 정신없이 물놀이 중인 나는 가족들과 함께 집앞 바닷가로 더위를 피해 피서를 나온듯 싶다. 


<<유년시절, 어쩌다 캠핑가는 날>>

유년시절, 나의 고향은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여름날이 되면 더위를 피해 집집마다 리어카<당시 사용하던 손수레>에 온갖 물건들을 싣고 마치 약속이라도 한듯 마을앞 바닷가 모래 불땅<해볕에 뜨거워진 해변가 모래밭>으로 마을 사람들과 함께 피서 길에 나선다.


텔레비전조차 없을만큼 부족함이 많았던 당시 피서가던 모습은 매우 낯설지만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집에서 쓰던 가재도구와 뒷마당 장독대에 있던 고추장, 된장 항아리를 챙기고 부억에서 사용하던 냄비와 솥 그리고 나무장작과 텃밭에서 막 뽑아온 대파와 족파, 감자 그리고 상추가 싱싱함을 보여주듯 흙이 그대로 묻은채 씨암닭 한,두마리와 함께 바구니마다 가지런히 담아 리어커에 차곡차곡 쌓는다.


여기에 예나 지금이나 여름날 바닷가에서 빠질수 없는 마실물과 햇빛 가리개 용도의 풍<비를 피하고 햇빛가리개 용도로 사용한 천막> 그리고 이를 받치는 긴 대나무 장대 대여섯 개를 함께 싣고 나면 피서갈 준비는 끝났다. 무거워질때로 무거워진 리어커를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며 비포장 길을 따라나선 가족들과 피서를 가던 모습과 그마저도 준비하지 못한 이들은 창이 넓은 밀짚 모자에 헤어져 구멍 뚤린 긴 소매 옷을 입는 등 저마다 각기 다른 물놀이 복장을 하고 하나 둘씩 모여든 마을 사람들을 따라 줄지어 바닷가로 가던 모습은 조각나 희뿌연 기억속에서 조차 생생하게 잊을수 없는 향수로 남아 있었다.


이른 바닷가, 더위가 시작되기전 하나, 둘 모여든 마을 사람들은 햇빛을 가리기 위해 가지고 온 황통풍과 파란풍을 제각각 펼치는 사이 급하게 부려놓은 자재도구들 중에서 장작과 솥 그리고 철판화로를 세우고 장작에 불을 지핀다. 한쪽에선 밥을 짓고 또 다른 쪽에선 국수를 끓여내는 사이 삶아진 감자와 옥수수를 꺼내고 섭죽<홍합죽>에 오징어파전까지 차려진 너른 평상엔 소고기와 같은 비싼 재료는 없지만 코끝에 감기는 음식냄새는 어느 잔치집이 이렇게 즐거울수 있을까!싶다.


손자부터 할아버지까지 대가족에 이웃사촌까지 둘러앉은 너른 평상 위로 차려진 잔치상에 정신없이 움직이는 젓가락질은 모두의 눈과 입을 즐겁게 하였고 때마침 적수라도 만난듯 주거니 받거니 막걸리 잔을 옮기는 손낄이 분주해질 무렵 군데 군데 노랫소리가 터져나오는 등 바닷가는 잔치집이 부러워 할 만큼 흥으로 넘치된 모습은 오랜시간이 흐른 지금도 가슴 한 켠에 먹먹하게 남아있었다. 


<<과거, 되물림되듯 내려온 습관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을 보냈을까! 많은 사람들이 모인 곳에는 즐거운 일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흥으로 넘치던 바닷가 구석 구석에서 목소리가 커지고 고성이 오고 가는 등 사소한 시비들로 조금전 즐거웠던 바닷가와는 어울리지 않게 무거운 분위기로 가라앉는다. 

잠시후 그러거나 말거나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다. 여기저기서 시작된 노랫소리는 언제 그랫냐는듯 다시 시작되었고 어느 순간 바닷가에 모인 마을 사람들의 합창이 되었고 시간이 갈수록 목소리에 힘이 실리게되면서 합창은 때창으로 바꿔가며 반복하길 거듭하였다. 그렇게 얼나마 지났을까! 강열했던 긴 여름날의 태양도 서산 넘머로 넘어간지 오래되었으나 사람들의 노랫소리는 멈추기 보다는 더욱 커져 알수없는 삶의 무게 만큼이나 계속되었고 깊어진 여름밤은 하염없이 별을 쏟아내고 있었다.


까만밤을 하얗게 불태운 사람들이 머문 자리엔 여기저기에 쓰레기가 쌓여 있었고 그 와중에 술에 취해 군데군데 모래밭에 뒹구는 사람들이 지난밤의 풍경을 말해주고 있었다. 여전히 바닷가는 곳곳에 풀어놓은 가재도구로 수북하였고 마치 피난 나온 난민 같은 행색은 1박2일이 보통이나 한참을 머무르는 가족들도 있었다. 그랬던 바닷가 풍경은 오늘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아니었고 많은 사람들의 추억과 사연을 품은 채 해마다 전쟁 같은 여름이 끝나도록 반복되었다. 


부족함 많았던 유년시절의 캠핑가는 길에 비해 물질의 풍요로 채워진 현재의 캠핑가는 길에는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하는 대가족보다 구성원이 작아진 핵가족이 되어 원하면 집 근처가 아닌 전국 어디든 갈수있고 누구라도 만날 수 있게 되면서 과거 유년시절의 무더위를 피해 마을행사 처럼 캠핑길에 나선 옛모습은 오래된 동화책 속의 먼 이야기가 되어 누구도 믿으려하지 않고 더이상 마주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술 한잔에 노래 한소절은 어디를 가도 빠지지 않았던 것 처럼 되물림되듯 내려온 '흥'은 나와 우리 이웃들의 삶속 깊이 기억되고 사람들과 마주한 자리에선 언제나 흥이 넘쳤다. 또한 흥을 주체하질 못해 힘들어하는 사람들은 어쩌다 캠핑나온 길 곳곳에 있었다. 


현재, 어쩌다 캠핑나온 5,000만의 모습들.

2019년, 매스컴에선 캠핑인구 600만명시대를 자축이라도 하듯 홍보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에겐 불편한 캠핑을 설명하기에 캠핑인구 600만명은 턱없이 부족한 숫자였기에 캠핑을 생각하는 내내 캠핑인구 600만시대라는 숫자와 문구는 소화되지 않은채 되새김질하고 있었다. 


캠핑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부터 적지않은 시간동안 <캠핑은 특별한 사람들만의 전유물인가?> 또는 <불편한 캠핑은 특별한 사람들의 소유물인가?>를 생각하였기 때문에 되새김질하듯 캠핑을 돌아보는 내내 그들이 누구이고 어떤 모습이며 나와 우리 이웃들과 어떻게 구별되는지 구분하지 못하면 불편한 캠핑을 설명할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들이 길에서 5,000만이 마주한 풍경들>> 

봄, 따스한 햇볕이 충만한 산과 들 그리고 강과 바닷가 인근엔 종류를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많은 꽃들의 향연으로 움추렸던 겨울을 보낸 나에게 선물과 같은 계절이다. 봄은 오랫동안 움추렸던 몸을 움직이도록 생동감을 느끼게 하는 아주 특별함으로 온갖 꽃과 새싹을 통해 몸으로 이해하게 되는 첫 계절이라 할 수 있다.

  

일과를 마친 평일 오후 혹은 휴일 그리고 주말마다 봄꽃을 보러나온 상춘객 인파로 도로와 거리는 가는 곳마다 사정 없이 붐볐으나 봄볕 가득한 계절에 떠나온 나들이 길에서 마주한 여유와 꽃구경 삼매경에서 빠져있던 시간내내 힘들고 지친 일상은 잊은지 오래다. 그렇게 속절없이 빠져있던 시간이 지나고 꽃들의 축제에서 헤어나올 때쯤 찾아온 여름은 앞뒤 가리지 않고 무더위부터 시작한다. 


여름, 더위를 피하려는 건지 찾아가려는 건지 경계는 불분명 하지만 기다렸던 멋진 휴가를 계획하기 위해 하루가 바빴던 기억이 새롭다. 휴가 갈 장소를 정하고 함께 갈 가족과 친구들을 정하는 사이 수다인지 예약인지 경계없는 대화들로 바쁜 시간을 보낸후 이윽고 맞닥뜨린 휴가일 아침, 고대하던 나들이 길에 늘어선 자동차들로 또 다시 도로는 붐볐고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도착한 피서지에서 장열하는 태양 아래 푸른 바다와 짙은 녹음 사이에서 나와 우리 이웃들은 휴가 내내 정신줄을 놓는다. 그러는 사이 언제그랬냐는듯 무서위는 물러나고 들떠있던 마음이 가라앉을 때쯤 스산한 바람이 옷깃에 스며드는 가을이 성큼 다가선다. 



가을, 전국의 산하를 물들인 울긋 불긋한 단풍의 물결은 처음도 아닌데 이미 마음은 내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모든 이가 마음을 빼앗기듯 떠나온 나들이 길은 또 다시 붐볐고 가족인지 친구인지 직장 동료인지 자주 바꿔 혼란스럽지만 즐거움을 찾아 함께 나선 길에서 황혼의 저녁놀을 마주한다.

울긋 불긋 알수없는 색들의 향연이 시작되는 사이 또 다시 놓아버린 정신줄은 마치 마지막인냥 차분함으로 마음 한 켵을 비우고 짙게 물든 저녁 놀을 하나 둘 채우듯 두눈은 촛점을 잃은채 사색중이다. 


세상엔 존재할 수 없을것 같은 황금빛 붉은색으로 물들인 서쪽하늘은 잠시나마 시간을 멈추고 영원하길 기원해 본다. 서쪽하늘로 긴 여운을 남기고 찾아온 추위는 다짜고짜 세상을 꽁꽁 얼려버린다. 


겨울, 전국을 꽁꽁 얼린 동장군의 기세가 아무리 매섭다고 해도 계절마다 즐거운 여행을 찾아 떠나는 나와 우리 이웃들에게는 어림없어 보인다. 스키장으로, 눈꽃 축제장으로 온통 새하얀 얼음 세상은 바쁜 걸음을 제촉하듯 나와 우리 이웃들을 불러 내었고 또 다시 붐비는 도로위 자동차에서 내 순서를 기다리며 어묵탕에 컵라면을 먹으며 즐거워하는 모습들은 아무리 추운 겨울이라 해도 즐거운 나들이 길을 막지 못했다. 


한국의 사계절은 무심한듯 그때 마다 계절을 바꿨고 남녀노소 누구랄것 없이 1년에 한, 두번쯤 산과 들로 그리고 강과 바다로 끊임없이 불러 내었고 그때마다 어디론가 바쁘게 떠나는 나들이 길에는 전문 캠퍼 600만명 뿐 아니라 초보, 들러리, 이따금, 한번쯤 캠핑하는 5,000만명으로 전국 가는곳 마다 늘 붐볐다. 



<<1년에 한,두번 마주한 5,000만명의 모습들>>

유년시절 주민들로 가득했던 바닷가에 황토색과 파란색 풍으로 뒤덮었던 추억의 풍경은 세월 만큼이나 많은 변화가 있었다. 현재의 모습은 캠핑인구 600만시대의 전문 캠핑족뿐 아니라 1년에 한,두번 나들이 길에 잠시 들린 초보, 들러리, 이따금, 한번쯤 캠핑까지 합세하여 사뭇 다른 바닷가 풍경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2021년 현재, 유년시절에는 상상 할 수 없었던 풍요로움과 넉넉함으로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나와 우리 이웃들에게 자동차와 캠핑장비는 필수품이 되었고 어디를 가도 중,대형마트가 곳곳에 있었기에 더 멀리 많은 곳으로 갈수 있게 되면서 유년시절 피서를 가던 모습처럼 투박하고 시골스런 맛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지만 일상에 지친 삶을 되돌아보기 위해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에 구애없이 언제 어디든 떠날수 있는 편리함까지 갖추고 되었다. 가깝든 멀든 게의치 않고 휴식과 여유를 찾아나선 나들이 길에는 600만명의 전문캠핑뿐 아니라 1년에 한,두번 나들이 나선 초보, 들러리, 이따금, 한번쯤 캠핑까지 지속적으로 합세하게 되면서 모처럼 떠난 나들이 길은 어딘들 예외없이 5,000만으로 항상 붐비고 소란스러웠다.  그로인한 실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되물되어 내려온듯 몸에 뵌 습관과 행동으로 가는 곳 마다 반복하였고 쌓여왔던 것이다. 곳곳에서 벌어지는 실수는 5,000만 모두라고는 할 수 없겠으나 상당수의 의해 되풀이 되고 있었고 그들은 나와 우리 이웃들의 캠핑하는 모습과 닮아 있었다.


<전문 캠핑>, 캠핑인구 600만명을 포함하여 전문적으로 캠핑을 다니는 사람들

열풍이 만들어낸 캠핑인구 600만시대의 주인공들은 나들이 길에서 마주했었던 나와 우리 이웃들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캠핑, 등산, 자전거, 낚시, 서핑, 패러글라이딩 등등 각종 레포츠활동을 전문적으로 즐기는 매니아들로 전문적인 캠핑장비와 지식만이 아니라 오랜시간 전문 레저&캠핑의 경험과 노하우로 그들만의 수준 높은 레저&캠핑문화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밖에도 텐트, 차박, 캠핑카 등 전문적인 캠핑동호회를 포함하여 카약, 스쿠버, 서핑, 카이트서핑, 패러글라이딩, 낚시, 산악자전거, 암벽 등등 매우 다양해진 동호회들로 그들의 수는 현재까지도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기에 캠핑인구 600만명시대라는 수식어까지 붙을 만큼 그들의 회원수는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하지만 그런 그들도 사소한 실수는 있겠으나 불편한 캠핑을 이야기 할 만큼의 수준이 아니라는 것은 자연 그대로를 유지하고 캠핑한 흔적을 최소화 하려는 그들의 노력과 머물렀던 자리를 보면 잘 알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해서 캠핑인구 600만명이라는 숫자가 잘못되었는다는 것은 아니다. 나와 우리 이웃들의 모습과 가까운 초보, 들러리, 이따금, 한번쯤 캠핑까지 포함한다면 어쩌다 캠핑인구는 600만시대가 아니라 5,000만시대라고 표현하는 것이 적합할 것이다. 


<지금 시작한 초보 캠핑>, 지인의 소개로 시작하거나 아이들 때문에 시작하거나 다양한 이유로 캠핑을 시작하게 된 사람들이다. 초보캠핑는 말 그대로 처음 캠핑을 시작하는 사람들로 굳이 자세한 설명은 필요해 보이진 않으나 텐트와 차박캠핑에 따라 나눌수 있으며 이들은 장비 사용 경험이 없어서 텐트치는 법, 장작 피우는 법, 샤워텐트 및 버너사용 법 그리고 겨울철 난방장비 사용법 등 처음 접하는 장비에 대한 경험 부족으로 실수가 많을 수 밖에 없으나 캠핑의 횟수가 반복 될수록 줄어들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반복 되지 않는다고 생각된다. 매년 캠핑장에서 마주하는 나와 우리 이웃들의 대부분이라 할수 있다.


<남따라 나온 들러리 캠핑>, 캠핑에 대한 관심은 없으나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해 지인들을 따라 캠핑나온 사람들로 장거리보다는 집 근처 등 가까운 곳을 선호한다. 그들은 캠핑에 대한 지식과 정보는 잘모르지만 호기심은 남다르다고 할수도 있을 것이다. 단순히 탁트인 야외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가족, 직장, 친구 등 지인들과 어울려 즐거운 오후를 보내고자하는 사람들이다. 이렇게 한,두번 따라 다니다보면 장비를 준비하는 등 초보캠핑을 시작하게 되는 경우가 많아지게 된다.


<1년에 한,두번 캠핑나온 이따금 캠핑>, 들러리 캠핑과 확연한 차이를 보이는 전문 캠퍼들로 구력이 오래되었고 나름 캠핑문화를 가지고 있으나 1년에 한,두번 캠핑나오는 그들 대부분은 단체 혹은 동호회활동 등 인맥관리를 위한 네트워킹 때문에 캠핑을 나온다고 할수 있으나 캠핑문화에 대한 관심은 낮다.  

계획적인 캠핑보다는 필요에 의해 혹은 분위기에 휩쓸려 단순하면서 감정에 따라 캠핑을 즐긴다고 할수 있으며 캠핑의 수준을 생각하기보다는 흥미와 재미 그리고 편안한 캠핑을 즐기므로 주변을 의식하지 않는다.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직장인들이 많이 해당되지 않을까! 싶다.   


<가장 많은 한번쯤 캠핑>, 나와 우리 이웃들 주변에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그들은 학연, 지연 및 가족 공동체로 여럿이 함께 캠핑을 즐긴다. 이따금 캠핑과 많이 닮아 있지만 주로 지역단위로 집단 혹은 단체의 형태로 캠핑하며 그모습은 캠핑보다는 야유회에 가깝다고 해야 할것 같다. 

이들의 모습에서 과거 유년시절 바닷가에서 마을 사람들과 피서를 했던 모습과 가장 많이 닮아 있었다.  

 

한번쯤 캠핑 모습은 무더운 여름이 되면 곳곳에서 마주하게 되는데 지난해에 울릉도로 캠핑갔을때 일이다.

울릉도는 늘 가보고 싶은 동경의 대상은 나만 그런 것일까! 

꼭 가보고 싶은 여행지중 한 곳이었기에 우리가족은 몇해동안 벼루던 울릉도를 다녀왔다. 

바이러스 때문인지 관광객은 많지 않았다. 도로를 따라 바다를 구경하듯 달리는 중에 한적한 작은 항구가 우리의 발걸움을 멈춰 세웠다. 사람이 없는 작은 방파제는 한적한 것이 너무 맘에 들었고 짚푸른 색의 물빛이 있는 그곳에서 캠핑을 준비하였다. 

그러던중 저녁 무렵이 다되어서 지역 주민으로 보이는 한무리의 사람들은 여러대의 자동차로 우리가 캠핑중인 근처에 자리를 잡고 분주하게 텐트를 치고 저녁을 준비한다. 그들의 도착과 더불어 싸움으로 오해 될만큼 고성이 오가는 대화 소리로 고즈넉했던 바닷가는 온데간데 없고 작은 항구는 왁자지껄한 소음으로 꽉찬다. 


그렇게 분주했던 시간이 잠시 흐른뒤 저녁을 먹고 난후 풍덩, 쫘~...정리하는듯 무엇인가를 바다에 버리는 탁한 소리들로 고요했던 바닷가는 크고 무거운 소리를 쏟아낸다. 잠시후 머물렀던 자리는 바닷물을 퍼서 깨끗하게 씻어내는 소리까지 순식간에 일어난다. 


그들은 고작 3시간 남짓 머무른후 왔을때와 같은 소음을 만들며 텐트와 그릇을 챙겨 어디론가 순식간에 이동하였고 그들이 떠난 항구는 어둑어둑해진 탓일까! 다시금 무거운 침묵이 조용하게 내려앉았다. 

저녁밥을 해먹고 난후 바다에 버릴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혼란과 당혹감에 빠진 난 그들의 행동에서 정당함을 찾기위해 내 자신을 괴롭히고 있었다. 


여름철에는 아직까지 이런 비슷한 모습을 쉽게 찾을수 있다. 

우리가족이 자주 찾던 동해안의 작은 항구 모래밭에서 일이다. 

그곳 바닷가는 우리가족 말고도 여러 가족들이 캠핑중이다. 그중 유난히 큰 소리가 나는 곳에 가족으로 보이는 많은 수의 사람들이 함께 캠핑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지역 주민들로 근처 가까운 곳으로 놀러나온 것을 쉽게 알수 있다. 


이들은 고기를 굽고 떠들섞하게 대화를 나누며 고함에 가까운 소리로 반복하는 등 즐거운 오후 한때를 보내는 중이었다. 그런데 고기를 구워 먹은 철판을 바닷물로 가져가서 씻고 설거지 한 물을 그대로 바닷가 모래밭에 뿌릴뿐 아니라 모래가 잔뜩 묻은 상태로 공용화장실에서 씻는다. 그 이후 공용화장실은 막혔고 우리가족이 떠날때는 누구도 이용 할 수 없도록 폐문이 되었다.


초보,들러리,이따금,한번쯤 캠핑, 이런 모습들은 나와 우리 이웃들이 어쩌다 캠핑길에서 마주하는 아주 흔한 모습들이며 이들 모두가 불편한 캠핑을 만들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어쩌다 캠핑나온 길에서 자신의 모습을 찾을수 있다면 불편한 캠핑은 자신과는 상관없는 남의 문제만은 아니란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어쩌다 캠핑 길에 나선 5,000만명은 우리 자신들의 모습이라는 것은 해석이 필요해 보이지 않는다. 

 

불편한 캠핑, 사회적 의식 수준이 문제였을까?

70,80년대 유연시절은 좋고 나쁜 것을 구분하기엔 너무 어린 나이였으나 지금와서 생각해 보면 먹고 산다는 것이 그때도 전쟁 같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당시 우리의 부모님들 생활을 돌이키게 되면서 즐거운 추억이라고 하기엔 너무 가혹했던 삶은 환경과 문화 등 사회적 의식 보다 우선하는 것들이 있었으나 한국경제가 빠르게 성장하면서 사회적 의식은 개선되었고 무엇보다 우선하게 되었다.    


<< 과거, 먹고 사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하였다>>

유난히 추웠던 유년시절, 아직도 기억나는 것은 동트기 이른 새벽시간에 어둠이 깔린 바다로 배를 타고 나가신 아버지와 뱃일을 돕기위해 아침부터 집을 나선 어머니는 하루 해가 지고 한참이 지났어도 귀가하지 않는다. 그때는 왜 그렇게 추웠을까! 모든 것을 꽁꽁 얼려 버릴것 같은 한파로 집밖을 나서지 못하는 어린 나는 어머니가 오시기만을 밤늦도록 기다리곤 하였다.


새벽부터 시작된 어부의 일은 해가지고 깊은 밤이 되어도 쉽게 끝나지 않았고 어구 손질과 추위를 피하기 위해 피워 놓은 모닥불과 전등 불빛은 분주한 항구를 밝히고 있었다. 식은 밥 한술 뜨는 시간을 제외하곤 손에서 일을 놓을수 없었던 부모님뿐 아니라 주저앉고 싶을 만큼 무거웠던 삶의 무게를 이고 사는 그 시절의 사람들은 힘겨운 생계를 버티듯 이어가고 있었다. 


부족함이 많았던 경제 만큼이나 환경오염, 캠핑문화 등 사회적 의식은 먹고사는 문제에 밀려 우선하지 못했고 그 시절 전국 어디를 가도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람들의 생활모습은 아무곳에서나 비닐과 같은 쓰레기를 모아 태웠고 암을 유발시키는 일급 발암 물질인 석면으로 집을 지었으며 생활 하수는 강과 바다로 흘러 들었을뿐 아니라 사람들의 놀이문화도 예외는 아니었다. 강가든 계곡이든 바닷가든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라면 삼삼오오 모여서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불렀고 시간이 흐른 뒤엔 카세트레코드, 통기타를 들고 산이든 바다든 심지어 국립공원이라 해도 둘러앉은 자리에서 불을 지피고 밥을 해먹었으며 물이 흐르면 어디서든 머리를 감고 간단한 세탁과 설거지도 하였다. 그랬던 당시의 모습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어느것 하나라도 허락 될 수 없는 일이었으나 오래전부터 되물리되듯 내려온 모습들은 불편하고 심각한 문제인지 모른채 그것이 당연한 문화인냥 전국 어디서나 비슷한 모습들을 보여주었다. 그렇게 당시엔 먹고 사는 것이 우선하였다.  

 

<<현재, 나와 우리 이웃들의 사회적 의식은 최고 수준이었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 바쁘게 접어달린 한국 경제의 급한 성장과 더불어 사회적 의식 수준까지도 큰 변화를 맞게 되면서 과거로부터 되물림되듯 내려온 불편한 모습들이 빠르게 개선되면서 사회적 의식 수준은 과거와 매우 크게 달라져 있었다. 


2000년대 이후 나와 우리 이웃들의 사회적 의식은 어떻게 변화되었을까? 그것을 설명하기 좋은 사례가 있다.

2002년 월드컵, 한국 단독으로 개최하려했던 월드컵은 일본과 공동 개최로 바뀌게 되었고 월드컵을 치루는 동안 한,일 양국은 원하지 않은 비교 대상이 되었다. 그렇게 월드컵을 치르던중 두나라의 시민의식을 보여주는 사건이 일어나게 되고 세계 언론을 충격이라 할 만큼 크게 놀라게 한다. 


그것은 한국이 월드컵 4강까지 올라갔던 쾌거도 있겠지만 그보다 수십에서 수백만 명이 응원했던 자리를 보고 세계 언론은 기적이라는 말밖에 하지 못했고 그 사건으로 인해 한국은 일본과 비교될수 없을 만큼 사회적 의식 수준이 매우 높은 나라 임을 알렸으며 전세계에 한국의 위상을 올리는데 중요한 역활을 하게 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2002년 월드컵 개최 당시만해도 한국에 대한 국제적 이미지는 일본의 침략으로 국권을 빼앗겼고 광복후 6.25라는 동족간 전쟁을 치룬후 휴전과 더불어 자신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타인들에 의해 분단된 나라로 독일에 이어 유일하게 분단 국가 정도였으며 국가적 위상은 전쟁을 극복하고 낙후된 경제를 성장시키기 위해 힘겹게 살아가는 이미지로 지구촌 어디에 위치한 국가인지 존재감 또한 덩달아 낮았다고 할 수 있겠으나 그와 반대로 일본에 대한 기대와 위상은 매우 높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국제적으로 낮게 평가받던 한국의 국가적 위상이 반전을 맞게된 사건은 2002년 월드컵을 응원한 길거리에서 일어난다. 한일 양국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수십만~ 수백만명이 도심 광장과 길거리에 모여 월드컵을 응원하였다. 양국은 치열했던 경기만큼이나 응원전 또한 우열을 가리기 힘들만큼 치열하였으나 월드컵 경기가 끝난 한국의 응원석을 본 전세계의 언론은 할 말을 잃고 충격적인 보도를 하게 된다. 


사건은 이렇다. 조금전까지만해도 수백만명이 응원하고 떠난 길거리가 누군가 청소라도 한듯 휴지조차 찾아볼수 없을 만큼 깨끗한 것이다. 경기가 끝난 응원석엔 온갖 쓰레기들이 즐비한 모습은 어느 국가든 예외 없이 친숙한 모습일텐데 월드컵 경기가 끝난 한국의 응원석은 누군가 청소를 한듯 깨끗하였고 그곳이 한국의 수도인 서울만이 아니라 전국의 응원석이 모두 그랬다는 점에서 이 광경을 본 세계의 언론들은 믿을수 없다는 반응으로 월드컵 경기에 버금가는 관심과 속보를 쏟아낸 것을 나는 생생하게 기억한다. 


이 사건은 한국인들의 사회적 의식 수준은 나의 유년시절과는 비교 될수 없을 만큼 빠르게 성장한 결과로 세계적인 수준으로 인정받아도 될 만큼 충분함에 부족함을 찾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불편한 캠핑으로 갈등하는 이유와 원인이 낮은 사회적의식 때문이 아니라면 왜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것인지 그 원인을 다시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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