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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를로스 안 Sep 03. 2022

9. 연애는 멋진 영화를 찍는 일

A는 남자 친구를 사귀면 오래가지 못했다. 가장 길었던 연애가 3개월이었다. A에 의하면 만났던 남자들은 이기적인 편이었고, 친절하지 않았다고 한다. 사귀면서 으레 겪는 말다툼이 바로 이별의 이유가 되었다고 한다.


A는 의도한 건 아니나 상황이 주는 불편한 감정에 휘둘렸고, 회피라는 쉬운 길을 택했다.


하루는 많이 아팠다. 돈을 많이 벌고 싶은 욕심에 밤새 대형마트에서 청소를 하고, 아침에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오후에서야 자는 생활을 2주 정도 하다가 심한 몸살이 났다. 외국인 노동자로서 병원에 갈 보험은 없었고, 집에서 누워 아픈 몸을 한숨으로 버티고 있는데, A가 병문안을 왔다. 사무치게 고마웠다. 외국에서 아플 때가 가장 서러운데, 사랑하는 A가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 벌써 몸이 좋아지는 거 같았다.


그런데 의사 출신인 집주인이 내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듣고, 몸살약과 회복에 좋은 건강한 국수를 끓여왔다. 집주인은 손수 끓인 따뜻한 국수를 먹여 주면서, A에게 남자 친구가 이렇게 아플 때까지 일하게 하면 어떻게 하냐고 혼을 내었다. 귀가 어두운 집주인 할머니는 중국에서 젊을 때 이민을 왔는데 목소리가 크고 특유의 중국식 영어 화법을 구사해서 집주인을 잘 모르는 사람은 무서워할 수 있었다. 실은 그건 관심과 애정의 남다른 표현이다.


집주인이 나에게 국수를 먹여주기 위해 가까이 오자, A는 내 곁에서 한발 비켜 주었고, 집주인의 호통 아닌 호통에 잔뜩 긴장하고 불편해하는 얼굴을 하더니 이내 짐을 챙겨서 자리를 피하려 했다. 나는 갑자기 더 아파졌다. 마음은 벌떡 일어나 가지 말라 손을 잡고 싶었으나, 최대한 몸을 일으켜 쉰 목소리로 가지 말고 옆에 있어달라 슬픈 표정을 지었다.


집주인은 여자 친구 A의 일어나려는 제스처와 나의 슬픈 표정에 당황하더니, A에게 따뜻한 국수를 건네주었다. 집주인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잘못 꿰찬 여주인공의 자리를 A에게 되돌려 주며, 나를 잘 CARE 해달라는 말과 함께 원래 자리였던 빛나는 조연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깊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자신이 여주인공인 줄 깜빡했던 A는 NG 하고 재연기를 하고 싶었겠으나, 인생이라는 영화에 NG후 재연기는 없다. A는 NG는 잊으려는 여배우처럼 잠시 머뭇거리다 옆에 다가와 남은 따뜻한 국수를 먹여주며 이내 자상하고 사랑스러운 주인공으로 돌아왔다.


A를 보면서, 연애만 하면 질퍽거리는 나를 생각했다. 그리고 연애만 하면 질퍽거리는 나를 A에게서 발견했다.


A는 아직 연애라는 건 우리만의 멋진 영화를 찍는 것임을 알지 못한다. 


사귄다는 건 너와 내가 주인공이 된다는 약속이다. 너는 나에게 유일무이한 상대 주인공이 되고, 세상 그 누구도 조연이 되는 것임을 약속하는 일이다.


나는 A가 우리의 사랑을 빛내줄 집주인 조연에게 여주인공 자리를 양보하지 않도록 온몸을 다해 응원했다.


사소한 말다툼은 주인공의 연애에 빠질 수 없는 재미요소이지, 이별로의 전개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뻔뻔한 연기로 느끼게 해 주었다.


연애만 하면 편두통이 심해지는 A를 사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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