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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를로스 안 Sep 12. 2022

11. 오스트

지금 내 곁에 있는 그녀 S를 처음 만났을 때의 내 모습은 마음속 들끓는 열정과 순박함을 가졌으나, 자신과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는 방법을 몰라 감정에 쉽게 휘둘리는 스무 살 대학 신입생이었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OT)에 S는 참석하지 않았고, 나는 오티 장기자랑에서 노출 욕구를 가진 만취남의 연기를 완벽히 소화해 섹시남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만취남의 연기를 해본 적 없었던 나는 리얼리티를 위해 실제 소주를 마시고 연기에 임했고, 신입생과 선배들 몇백 명 앞에서 옷을 훌훌 벗어버리는 스트립 연기로 호평을 받았다. 1년 선배는 작년 오티 장기자랑에서 팬티까지 벗었다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해서, 나는 오늘 입은 섹시한 팬티를 확인하고 바지까지만 멋지게 스트립 하겠다는 각오로 연기에 임했다. 무대 위에서 물 만난 고기처럼 상의를 요염하게 벗고, 허리 벨트를 푸는 나를 팬티까지 벗었다고 말한 선배가 얼굴이 하얗게 변해 말렸다. 선배들과 동기들은 나의 신들린 연기에 감탄을 하면서도, 학교로 돌아가면 다 기억하지 못할 거라는 말을 하면서 칭찬인지, 욕인지 헷갈리는 말을 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나는 나름 타과에서 유명인이 되어 있었다. 타과 친구들은 내 이름은 기억하지 못했는데 나를 오스트로 불렀다.


오티에서 상의 탈의를 하는 모습과 아침잠이 많았던 나는 등교할 때마다 역에서 학교 교실까지 전력질주를 했는데, 탈의한 모습과 미친 뜻이 뛰는 모습이 합쳐지면서 나는 오스트가 되었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그때는 그 별명이 부끄러워 감추고 싶었으나, 세월이 지난 지금은 집단지성이 얼마나 위대한지 깨달았다. 스무 살의 나를 그만큼 정확하게 표현하는 단어는 없다.


열정이 넘치고 순박한 눈을 가진 원시인.


그때 나는 알지 못했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가 되어 진실되고 성숙한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오랜 시간과 시행착오가 필요했는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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