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
중요한 것은 오로지 번호뿐이다. 오로지 죄수번호를 가지고 있을 때에만 그 사람이 의미가 있는 것이다. 사람은 글자 그대로 번호가 되었다. 그 사람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 ‘번호‘의 생명은 철저하게 무시된다. 그 번호의 이면에 있는 것, 즉 그의 삶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못된다.(100쪽, 번호로만 취급된 사람들)
수용소에서 이름을 갖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용할 대로 이용해 먹다가 육체의 마지막 한 점까지 이용하도록 계획된 대상”이다(96쪽, 생존을 위해 군중 속으로)
나를 이용한다고 느낄 때 분노가 생긴다. 성심성의껏 도움을 주었는 데, 이를 이용한 사람을 보면 도와준 거까지 합쳐서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참을 수 없는 이유는 나를 수단으로 이용해서다. 그리고 나를 존재로 인정해 줄거라 믿었던 내가 바보 같아서 더 화가 난다.
실존주의에 가장 유명한 말,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 실존이라는 말에 나라는 존재를 넣고, 본질에 역할이라는 말을 넣어보면 이해가 쉬워진다. 나라는 존재는 나의 역할보다 먼저다. 누구의 자녀, 누구의 부모, 아무개 과장, 누구의 남편이라는 역할보다 나의 존재가 앞서있다는 말이다. 내가 받고 싶은 사람 대우. 그 기본적인 대우를 해주는 것이 가장 앞선다는 말이다.
나라는 존재가 지워지고, 어떤 역할 하나로, 숫자 하나로 의미를 가지는 곳이 지옥이다. 바로 죽음의 수용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