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이지 나와는 관계없는 일로 매주 나의 주말을 버리고 있다.
주말만 되면 밭에 농사일 도와주러 가는 일 아니면 장인어른 다가구주택 수리 하는 것 도와주는 것이 최근 내 주말의 일과가 되어버렸다.
오늘 아침에도 장인이 건물 외벽에 페인트 칠을 하기 위해 오신다고 해서 신도림역으로 모시러 나갔었다.
사실 아침부터 비가 와서 공사를 하러 오시지 않을 줄 알았다.
그렇지만 오전이 지나면 비가 그친다는 일기예보를 철석같은 믿음으로 나 있을 때 일을 하려고 오셨단다.
정말이지 9시가 조금 넘어가자 빗줄기가 약해지긴 했다.
오전에는 비가 와도 실내에서 할 수 있는 우리 집 베란다 내벽에 칠해 놓은 페인트가 들떠서 일어난 것을 긁어내고 스티커로 되어 있는 얇은 스티로폼을 붙였다.(사실 수리 계획에는 없었던 것인데 지난달에 월세 나간 방 화장실 외벽에 방한용으로 붙인 스티로폼이 남았길래 우리 집 거실에 붙였으면 좋겠다고 내가 장인께 제안한 것이다.)
글로만 보면 쉬운 작업인 것처럼 보이지만 오전에 4시간 정도 걸려서 한 작업이다.
겨울에 방한도 될 겸 들뜬 페인트 가루 때문에 청소할 때마다 짜증이 났었는데 외관상으로 보기에도 너무 좋았다.
그렇게 오전 일을 하다 보니 이미 12시가 후딱 지나가 버렸다.
슬슬 배가 고파져서 밥을 먹으러 가자고 했더니 한 가지 더 할 일이 있다고 하신다.
시멘트와 모래를 가져다 나른 후 얼마 전에 이사 온 월세방 출입문 바닥에 시멘트가 깨진 곳을 메우는 작업을 했다.
드디어 한시쯤에 지난번에 먹던 순댓국집으로 갔는데 순댓국이 맛이 없었는지 배가 부르셨는지 나한테 고기를 거의 다 덜어주셨다.
나는 힘이 들었는지 장인이 주신 걸 우구적 우구적 다 먹고 그래도 부족한 듯이 허겁지겁 먹어댔다.
집에 도착해서는 커피 한 잔을 더 마시고 이내 오후 작업을 시작했다.
오후 작업은 페인트칠이 주 업무이다.
가는 비가 오락거락 했지만 드디어 비가 그쳤다.
페인트칠을 하는 와중에도 바람이 엄청 불고 비가 올 듯 말 듯했는데 더 이상 비는 내리지 않았다.
'비가 오면 하던 일을 그만두겠지'라는 발칙한 생각도 했었지만 끝내 비는 오지 않았다.
아뿔싸! 페인트 칠을 하려고 장인이 저번에 쓰고 놔둔 롤러와 붓을 찾는데 보이지 않는다고 소리치고 난리다.
"네가 버린 게 아니냐"라고 물어보지만 내가 뒷정리를 하면서 버린 것을 모른 척하며 시치미를 뚝 뗐다.
사실 장인어른은 벌려 놓고 일을 하기만 하지 정리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다.
결국 모든 뒷정리는 내가 다 하게끔 되어있다.
그날은 평일이라 나는 회사 나가고 장인이 친구분과 대문에 페인트 칠을 하고 가셨는데 뒷정리 아무것도 안 하고 가서 내가 정리하면서 이것저것 쓰레기를 버리면서 그 롤러와 붓까지 다 가져다 버린 것이다.
아무튼 계속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
그렇지만 장인은 내가 시침미를 떼는 것을 다 알고 있는 듯 "뭐든지 버리기 좋아하는 네 놈 대갈통을 빠셔버리고 싶다"라고 구성진 욕을 하는 것이었다.
지하 2호에 세 들어 사는 아줌마가 그 소리를 들었나 보다. "장인어른이 단단히 화가 나셨나 봐요"
나는 어디다 하소연할 때도 없고 해서 그 아주머니한테 얘기했다.
"일은 열심히 도와주는데 욕을 오라지게 먹어요. 이렇게 열심히 일을 도와줘도 욕만 먹고 있습니다."
아주머니는 픽하고 웃었다.
그렇게 하루 종일 일을 다 마치고 정리하고 있는데 아내한테 카톡이 왔다.
"하루 종일 일해서 힘든데 할아버지 맛있는 것 좀 사드리지, 집에서 꽁치통조림에다가 김칫국 끓여서 소주 한 잔 하고 계신다"라고 나한테 밥도 안 사줬다고 지랄지랄 카톡을 날리는 것이다.
아! 낸들 어떡하란 말인가 나는 일한 거 마무리하느라 버릴 것 재활용장에 버리고 오고 나머지 물건들 창고에 정리하고 있는데 혼자 올라가서 통조림 넣고 김치찌개 끓여서 소주랑 드시는 줄도 몰랐는데 나의 잘못이 무엇이란 말인가!
그렇게 주말에 하루 종일 일을 도와줬으면 나는 내 할 일 다 한 거 아닌가!
저녁 7시가 넘었다.
아니, 요즘 해가 길어도 너무 길어진 거 아니야, 7시가 지나는 줄도 모르고 일을 한 것이다.
밥을 안 먹겠다던 장인이 갑자기 마음이 바뀌었는지 저녁을 먹고 가자고 하신다.
지금 집에 가시면 저녁 드시기도 애매한 시간이니 저녁을 먹는 게 나을 것 같다고 나도 맞장구를 쳤다.
음식을 주문해 놓고 기다리는데 갑자기 당신 얼굴에 페인트가 묻은 것 같으니 닦아달라고 하는 것이다.
내 아버지도 돌아가시기 전까지 치매로 똥오줌 못 가릴 때쯤 닦아준 게 전부인데 내가 내 손으로 장인 얼굴에 묻은 페인트를 닦아주다니,
페인트를 닦아주는데 무슨 소가죽처럼 피부가 많이 쭈글쭈글하다.
당신도 나이가 많이 들었나 보다.
내가 정을 주지 못하는 장인의 얼굴에서 아버지의 모습을 잠깐 보았다.
돌아가신 아버지, 아버지도 저런 모습이었었지,
나의 아버지도 제대로 사랑해 주지 못한 내가 당신을 사랑해 줄 수 있을지는 앞으로도 장담할 수 없다.
아니 자신이 없다.
아니 사랑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큰지도 모르겠다.
사실 나는 밥을 먹으러 가기 전부터 오늘은 바람도 많이 불고 늦게까지 일하셨으니 평상시처럼 지하철역까지만 데려다주지 말고 집으로 모셔다 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극구 지하철역까지만 데려다주라는데도 차가 안 막혀 50분이면 간다고 해서 결국은 모셔다 드렸다.
모처럼만에 단둘이 차를 타고 가면서, 아니 거의 없었던 일이지,
어쨌든 단둘이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 했다.
어느 순간 당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이다.
피곤했는지 차에서 선잠을 주무신다.
최대한 네비 볼륨을 줄이고 속도를 늦추면서 운전을 시작했다.
거의 집에 도착할 때쯤에 당신은 잠에서 깼다.
"얼마 안 밀렸네"
그렇다 평상시 같았으면 막히면 1시간 30분 이상, 안 막히면 50분 거리인데 주말 시간에 55분 만에 온 것이니 안 막히고 잘 온 것이다.
일부러 깜짝 쑈를 보여주려고 아내에게는 모시고 간단 얘기를 안 했었다.
도착해서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아내는 내가 온 걸 보고 깜짝 놀라는 척 당신 아버지를 보고 잠깐 고마워하는 표정이다.
잠옷을 입고 안에서 쉬고 있다가 나온 아내의 모습,
그 옛날 내가 처음으로 좋아하는 감정을 느꼈던 아내의 다소곳하고 편안한 얼굴이다.
나는 어쩌면 아직도 아내의 그런 모습,
소녀였을 때의 아내만을 사랑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처럼 우악스러운 사람은 누구인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