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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진심만이 사랑일까!

무작정 전화를 했다.

"영은아 잘 지내니?"

"응 너도 잘 지내지?"

"혹시 시간 괜찮으면 내가 그쪽으로 가면 만나줄 수 있니?"

"지금 이 시간에"

"그래 보고 싶어서 그래"

"풋 보고 싶다고, 지금은 안 돼, 혹시 무슨 일 있니, 너 싸웠구나"

"그래, 어떻게 알았지"

"목소리 들으면 대충 알지"
그렇다 처갓집에서 하루 종일 농사일 도와주고도 욕만 실컷 먹고 너무 화가 나서 장인에게 말대꾸하며 아내에게 소리 지르다가 홧김에 혼자 집으로 돌아와서 씻고 억울하고 분해서 그냥은 잠을 잘 수 없어 무작정 보고 싶다고 전화를 것이었다.

늦은 시간에 이래도 되는 건가 생각도 하긴 했지만 이것저것 따질 마음이 아니었다.

지금은 꼭 누군가를 만나야만 하고 싶었다.

만나서 밥을 먹든 영화를 보든 대화를 하든 무엇인가의 설정이 꼭 필요했다.

나는 왜 하필 영은이에게 전화를 했을까.

답은 간단했다.

이렇다 할 여자친구 하나 없고 애인도 없는 나로서는 그나마 초등학교 밴드 모임에서 어느 정도 낯이 익은 영은이 밖에 여자가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유일하게 만나고 있던 부랄친구와 친한 여자아이라 모임 때마다 자연스럽게 같은 테이블에 자주 않아 개인적인 사생활 등의 대화도 많이 했고 부랄친구의 사무실에도 자주 놀러 와서 내가 부랄친구의 사무실에 가면 자주 보게 되어 그나마 안면을 트고 지내는 사이가 되었던 관계였다.

내가 영은이에게 전화를 한 것은 그 아이에 대해 들은 소문도 한몫했다.

나의 초등학교 밴드에서 언젠가 남자애들이 수군거렸던 대화가 생각났다.

영은이가 이혼녀래, 남자들하고 잘 어울린데, 영은이가 누구하고 썸씽이 있데,

나는 누군가 필요했을 때 조금 더 쉽게 다가가 손내밀 수 있는 사람으로 영은이를 생각했던 것이었다.

'영은이 정도면 전화하면 쉽게 만나줄 수 있겠지'라는 그런 나쁜 생각을 했던 것이다.

"너 왜 그래? 이 늦은 시간에 무슨 일 있어, 너 지금 혼자구나"

"어 그래? 와이프는 처갓집에 있고, 나 혼자라 외로워서 그래"

"풋 외롭다고, 그러면 오늘은 말고 나중에 밥이나 한번 먹자"

"그래 알았어, 그럼 내가 나중에 퇴근할 때 늦더라도 전화하면 만날 수 있는 거지?"

"근데 나는 9시 좀 넘어서 늦게 끝나는데 괜찮겠어"

"그 정도는 괜찮아, 내가 먼저 너네 회사 근처 가서 기다리면 되지 뭐"

그리고 전화를 끊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영은이를 대신해서 만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내가 먼저 다음에 만나자고 해놓고 그 뒤로는 영은이에게 전화 한 통도 안 하고 아무런 연락을 하지도 않았다.

나란 놈은 참 이상한 놈이다.

못 먹는 감 찔러라도 본 건가?

내가 힘들 때만 떠올리고 시간이 지나면 모르는 사람처럼 잊는 걸까!

나는 왜 그랬을까?

그 아이는 나한테 전화를 받고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을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뭐 이런 새끼가 다 있어"라며 얼마나 황당해했을까.

느닷없이 전화해서 보자고 하질 않나, 나중에 보자 해 놓고 연락도 없이 숨어 버리는 나란 놈은 참 나쁜 놈이다.

나는 속성이 못 되어 먹은 그런 놈이다.

대체 영은이에게 사랑이란 감정은 있었던 것일까?

순간적인 나의 외로움과 슬픔을 모면하려고, 혹시나 하면서 전화를 했던 건 아닐까?

내가 아내와 정리하고 이혼을 했다면 영은이가 나를 더 이해하고 내 요청에 쉽게 응해 줬을까!


이유야 어쨌든 간에 앞으론 진심이 아닌 마음으로 절대로 남을 떠보지 말자.


정말 미안하다 영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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