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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가 정장을 입습니다

그 남자가 정장을 입습니다. 정말 오랜만입니다. 공식적으론 대략 2년 만인 것 같습니다^^
구두도 깨끗한지 살펴보고 머리도 빗어 보고 "이러고 가도 괜찮겠지?"라며 아내에게 괜찮냐고 물어보기까지 합니다.
자 준비되셨죠! 이제 따라가 봅시다.
그 남자 모처럼만에 결혼식장에 간다고 합니다. 회사 퇴직하고는 되도록이면 공식적인 자리는 가지 않고 부조금만 송금했었는데 그 남자의 아버지 상중에 찾아와 준 후배라 몸소 길을 나섭니다. 물론 축의금은 지하철역까지 걸어가면서 미리 송금해 줍니다.(나름 못 가서 송금해 주는 것처럼 하고 결혼식장에 깜짝 나타난다는 계산으로^^)
사실 집에서 1시간 넘게 걸리는 부천에서 일요일 오후 2시 예식이라 부담은 갔지만 카톡으로 청첩장을 받고 나서 직접 가봐야겠다고 이미 결정을 했었습니다.
그 남자 지하철을 타면 45분에 가는 거리지만 날씨도 좋고 해서 가을 경치를 구경하며 사진도 찍으려고 일부러 버스투어를 합니다.

(신도림역에서 버스 기다리며~)


신도림역에서 83번 버스를 타고 정거장 개수로만 37개의 정거장인 거리라 가도 가도 목적지가 나오지 않습니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도 사진을 찍을 만한 광경들은 보이지 않고 사람들이 내리고 타고 동일한 패턴만 지켜보고 있자니 그 남자 지쳐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타고 내리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져보시작했습니다. 서울 버스와는 다르게 많은 사람들이 버스 기사님에게 간단한 목례정도라도 인사를 합니다.

한 번은 버스가 신호대기로 정류장을 조금 지나 신호등 앞에 서 있는데 횡단보도를 건너온 청년이 문을 열어달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기사님이 버스에 탈지 어떻게 알고 문을 열어줍니다.(기사님들은 사람들의 움직임만으로도 감각적으로 아나 봐요. 어쩜 그 사람이 횡단보도 건너편에서부터 기사님과 눈이 마주쳤을 수도 있죠!) 그 젊은 청년도 본인이 문을 열어 달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버스에 타면서 고맙다고(다음 버스를 기다리지 않게 해 주셔서) 인사를 합니다.

이번엔 어떤 여성이 머리카락 흩날리며 허겁지겁 버스에 올라탑니다. 버스에 타자마자 터프하게 창문을 3분의 1 정도 열고 바람을 들이마십니다.(나 춥게~)

잠시 후 본인도 추운지 손가락 한 개 들어갈 정도로만 열고 이내 진정을 합니다.

그런데 참 특이한 광경을 여러 (3번) 봅니다. 대학생쯤으로 보이는 젊은 남녀가 둘이 타면 꼭 남자가 버스 카드를 두 번 읽힙니다. 왜 그럴까요? 더치페이를 안 하고? 경기도 젊은이들의 관례일까요!

개인적인 편견을 가지지 않으려고 해도 버스를 타고 시(서울시)와 도(경기도) 물리적인 경계를 넘나들다 보면 두 개의 도시 사이에 풍기는 느낌과 사람의 모습으로 보이지 않는 경계가 그어지는 것 같습니다.

드디어 예식장에 도착, 식을 시작하려면 아직도 30분 정도 남아 있습니다. 혼자 밥 먹는 게 익숙한 남자이긴 하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모임 단톡방에 "혹시 결혼식장에 있는 사람" 하고 소심하게 올려봅니다.

아무도 대답이 없습니다.


제목 : 보이지 않는 손


카톡에 '축하한다'던 사람들

결혼식장에 다 오는 줄 알았어


카톡에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는 사람들

장례식장에 다 가는 줄 알았어


아니더라

심지어 축의금, 부의금도 안 내더라


뭘 보여주려는 걸까


아님 뭘 숨기려는 걸까


처음엔 식은 안 보고 밥을 먹으러 가려고 했는데 갑자기 후배인 신부 아빠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어 후배가 손잡아 주는 신부 입장까지는 보고 가려고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아뿔싸 피로연장에 도착했는데 방명록에 이름 석자 남기며 받은 식권이 보이질 않습니다. 양복 윗도리 주머니 바깥주머니 다 찾아와도 보이지 않습니다. 바지 왼쪽주머니 오른쪽 주머니 다 찾아봐도 없습니다.
어쩝니까 예까지 와서 그냥 갈 수는 없고 모른척하고 다시 가서 식권 한 장을 더 받아 옵니다. 다행히 아까 받아가고 또 받아가는지는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피로연장에 뷔페 음식의 종류는 많았지만 사람들이 많고 동선이 길어 한 번 가져다 먹고 다시 갔다 오려면 힘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혼자이고 일행이 없다 보니 음식을 먹고 자리를 비우고 다시 음식을 담으러 갔다 오면 빈그릇과 포크 등이 치워져서 결국은 자리를 옮겨가며 식사를 해야 했습니다. 식사를 다 마치고 핸드폰을  순간 카톡을 보니 후배 1명이 식당에 있던 것을 알았습니다.
시끄러울까 봐 진동으로 되어 있어 몰랐던 거예요.
조금 일찍 알았더라면 혼자서 자리를 옮기면서  먹지 않았어도  것을,

다시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 남자 무슨 배짱으로 이번에도 버스를 탑니다. 그러나 몇 정거장 가지 못해 제동이 걸립니다. 음식이 소화가 안 돼서 그런 것인지 예식장에 올 때도 1시간 넘게 버스를 타고 집에 갈 때도 버스를 타서 그런 건지 차멀미 기운을 조금씩 느끼기 시작합니다.(21세기에도 이런 바보가 있습니다~) 아직도 한 시간가량을 버스를 타고 가야 는데 도저히 완주할 자신이 없습니다. 슬슬 불안해져서 고민이 시작될 때쯤 때마침 지하철역이 보입니다. 마치 목적지인양 너무나 반가워서 사람들을 따라 덩달아 내립니다.
송내역

지하철을 타니 20분 만에 신도림역에 도착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그 남자가 멀리서 찾으려 했던 가을 풍경은 아주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집에 도착해서 양복바지를 벗다가 뒷주머니에서 그토록 찾던 식권을 발견됐습니다. 혼자 가서 10만 원 부조하고 2인분의 식사를 하고 온 것입니다. 혼주에게는 죄송합니다만 미리 식권을 발견했다면 돌려주고 오는 건데 어찌합니까?
그나저나 카톡에 축하한다고 한 사람들은 결혼식장에 오지는 않았지만 축의금이라도 보냈을까요!

궁금해하지 않아도 될 걸 그 자도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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