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가 드디어 염색을 했다.
정규직 직장 다닐 때만 해도 아내가 "제발 염색 좀 하고 다녀라"라고 말을 해도 도통 염색할 생각이 없던 그 남자가 무슨 바람이 들어 염색을 했는지 궁금하다.
애인이 생겼나!
바람이 났나!
아니다 그 남자 그럴 위인이 절대 못된다.(뭐지 이 강한 부정은!)
이유인즉슨 다니던 직장을 정년퇴직하고 1년 정도 쉬다가 지역의료보험료 내기가 아까워서 4대 보험 해주는 일자리를 알아보다가 한 달 전에 인터넷으로 원서를 넣은 곳에서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직장 다닐 때도 염색할 생각은 안 하고 오죽하면 가발을 하나 구입해서 쓰고 다닐 생각만 했던 그 남자다.
그 남자는 머리 감는 것도 귀찮아서 옆머리와 뒷머리를 짧게 치는 스포츠형 머리를 굉장히 좋아한다.
얼마나 염색을 하기 싫었으면 머리를 빡빡으로 밀어버리고 집에서는 그렇게 빡빡으로 지내고 출근할 때만 가발을 사서 쓰고 다닐까도 생각했었다.
직장 다닐 때는 흰머리가 보기 싫어 주말에는 몇 시간이고 거울 앞에 앉아 흰머리를 뽑는데 시간을 할애했었다.
35년 넘게 직장생활을 하고도 염색을 한 번도 안 한 그 남자가 다니던 직장을 퇴직하고 계약직으로 다른 곳에 취직하기 위해서 염색을 하다니 정말로 희한하고 대단한 일이다.
얼마나 취직이 하고 싶었으면 염색을 했을까!
사실 그동안 다니던 직장은 머리가 하얗다고 직원은 함부로 자를 수 있는 구조는 아니었고 지금은 사회 통념상 직원의 신체(흰머리)를 가지고 차별을 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생전 처음 대면하는, 그것도 면접 보러 가는 직장에 흰머리를 덕지덕지하게 보이고 갈 수 있는 노릇은 아니지 않은가라는 생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염색을 한 것이다.
다니고 있는 직장이라면 흰머리가 있어도 강압적으로 뭐라 할 수는 없지만 면접 보러 온 사람이 흰머리가 많은데 염색도 안 하고 왔다면 내가 면접관이라도 뽑을까 말까 고민을 하겠지!
사실 그 남자 이곳에서 면접 보러 오라고 연락받기 전에 서울 시청에서 모집하는 계약직에도 면접을 보러 갔었다.
그러나 그때는 반신 반의 하면서 '내가 뭐 흰머리 있다고 안 뽑아주겠어, 자기들이 뽑을 거면 흰머리가 있어도 당연히 뽑아주겠지'라고 생각하며 염색도 안 하고 당당한 모습(삐죽삐죽한 흰머리 상태)으로 그냥 갔었다.
그러나 거기서도 어떻게 떡하니 합격은 했지만 그날 면접관 3명 중 1명이 그 남자의 흰머리를 보고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던 것을 머릿속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면접 보러 오라고 연락을 받자마자 마트에 가서 "세븐에이드"를 사가지고 머리에 바르고 스톱위치까지 해 놓고 8분이 지나서 머리를 헹구기 시작했다.
머리 감을 때 나오는 시커먼 국물,
"아 이런 것을 머리에 바르고 다녀야 하나'라는 회의가 들기도 했지만 그 남자는 그 옛날의 젊은이로 다시 태어났다.
외모로만 봐서는 십 년은 더 젊어 보였다.
머리를 까뒤집고 보기 전에는 흰머리가 보이지 않으니 기분도 좋고 상쾌하다.
그나저나 염색을 한다고 마음의 시간을 가릴 수 있을까!
나이 듦을 숨길 수 있을까?
아 징그럽다.
나의 이 인공적인 짐승의 털을 뒤집어쓴듯한 검은색 털.
다음번에는 흰머리 자연 그대로 보여줘도 취직할 수 있는 곳을 알아보자.
근데 누가 그때처럼 또 뽑아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