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렛트 계의 혁신, 파란색 팔렛트(Pallet)의 기원
나는 100% 장담할 수 있다.
이 글을 읽고 나면 어딜 가든 당신의 눈에는 두 가지 색깔의 팔렛트(Pallet)가 보일 것이다. 하나는 색칠을 하지 않은 나무 색깔의 팔렛트. 그리고 다른 하나는 파란색 페인트가 칠해져 있는 파란 팔렛트(*).
(*) 미국과 캐나다의 경우. 한국도 마찬가지인지는 모르겠다.
내가 처음 '팔렛트'라는 말을 들어 본 것은 아마 군대에서였을 것이다. 당시에는 '빠레뜨'라고 불렀는데, 보급 부대에서 군생활을 했던 탓에 상위 부대에서 물건을 받아 오거나 창고에 보관할 때 이 팔렛트를 많이 사용했다. 나는 창고 관리병은 아니고 행정병이었던 탓에 실제로 이 팔렛트를 이용할 일은 별로 없었다. 다만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 창고병들이 했던 이야기가 생각이 난다. 상위 부대에서 트럭에 물건을 실어 줄 때는 지게차로 실어서 몇 분이면 끝나지만 이것을 내리려면 몇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다.
우리의 상위 부대는 제51군수지원단이었기 때문에 부대 규모가 큰만큼 팔렛트에 실린 물건을 지게차로 실어주었나 보다. 하지만 우리는 사단급의 보급 부대였지만 규모가 작은 향토 사단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중장비는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래서 일주일에 한 번 물건을 받아 오면 그날 오후에는 모든 부대원이 달려 들어서 몇 시간에 걸쳐 짐을 내려놓아야 했다.
그 이후 내 인생에서 팔렛트를 만날 기회는 한동안 나타나지 않았다. 물류 업계에서 일하고 있지 않고서야 한국의 일반적인 회사원이 팔렛트를 만날 일이 있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그러다 2016년 내 인생에 다시 팔렛트가 등장하는 일이 생겼다. 온타리오로 이사를 와서 다니기 시작한 회사는 기본적으로 재택근무를 하는 것이기 때문에 500불 한도로 사무 용품을 살 수 있었다. 그래서 이 500불을 최대한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무수한 조합을 시도 해 본 끝에 철제 서류함, 책장 그리고 스탠드를 499불에 주문할 수 있었다. 캐나다에서 가구와 같이 무거운 물건들은 집 안까지 배달을 안 해주고 집 앞 드라이브 웨이(Driveway, 집 앞에 주차를 할 수 있는 정도의 공간)에 놓고 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내 물건들도 마찬가지여서 드라이브 웨이 끝에 물건을 놓고 갔는데 어처구니없게도 물건들이 팔렛트 위에 올려져 있었다.
어처구니가 없었던 이유는 크기도 큰 이 팔렛트를 어떻게 버릴지 몰랐기 때문이다. 이거 하나 버리자고 쓰레기 매립장(Landfill)까지 가기도 그렇고 해서 집 마당에다 세워 놓고 말았다. 이 팔렛트는 그렇게 2년 정도 서있었는데 결국 이사를 가야 해서 조각을 내서 버렸다.
그러던 2018년, 즐겨 듣는 Planet Money 팟캐스트에서 놀라운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바로 주변에서 흔히 보이는 파란색의 팔렛트에 대한 것이다. 알고 보니 이 파란색의 팔렛트는 단순한 팔렛트가 아니라 매우 혁신적인 물건이었다. 오늘은 이 파란색 팔렛트에 대한 이야기이다.
2014년 기준으로 미국에는 약 20억 개의 운송용 팔렛트가 돌아다니고 있다고 한다.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이 팔렛트는 우리의 삶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고 있다. 우리가 먹는 것, 입는 것, 쓰는 것 등 대부분의 것들이 이 팔렛트 위에 옮겨져서 운송되기 때문이다. 앞서 이야기한 실제 나의 사례처럼 이 팔렛트를 이용하면 사람이 몇 시간에 걸쳐서 옮겨야 하는 것을 지게차를 이용하여 간단히 끝낼 수 있다. 현재 사용되는 팔렛트 중의 대부분은 나무로 된 팔렛트인데 연구에 따르면 미국 목재 사용량의 약 12~15%가 이 팔렛트를 만드는 데 사용될 정도로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이 팔렛트의 정확한 기원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미국에서 20세기 초반 지게차의 등장과 함께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초기에는 다양한 종류와 재질의 팔렛트가 사용되었으나 1925년 경 현재와 유사한 모양의 나무 팔렛트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것이 널리 퍼지게 된 계기는 2차 세계 대전 때 미국이 본격적으로 이 팔렛트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전쟁 당시 이것의 효율성을 알게된 미군은 대부분의 물건을 팔렛트 위에 실어서 보관 및 운송하게 되었다(인디애나 주 Jeffersonville에 있는 보급 부대의 경우 전쟁이 끝날 무렵 재고의 약 98% 정도를 팔렛트 위에 실어서 보관 및 운송했다고 한다). 전쟁 이후 팔렛트는 미국과 세계 곳곳으로 전파되어 점점 더 널리 사용되게 되었다. 그리고 1970년대 이후에는 팔렛트를 수거하고 재활용하는 산업까지 번성하게 된다.
그런데 현재 형태의 팔렛트가 만들어진 이후 수 십 년 동안 팔렛트의 형태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비용 때문이다. 일반적인 형태의 팔렛트는 약 $2.5~$5 사이에서 거래가 되는데 팔렛트가 필요한 회사 입장에서는 돈을 더 주고 다른 팔렛트를 사야 할 이유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파란색의 팔렛트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한편,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오스트레일리아에 주둔했던 미군은 수백만 개의 팔렛트들을 뒤로하고 본토로 돌아갔다. 그래서 오스트레일리아 정부에서는 이러한 자원들을 관리하기 위해서 'Commonwealth Handling Equipment Pool', 즉 CHEP('체프'로 발음)라는 기관을 조직하게 된다. 이후 시간이 흐르며 이 CHEP는 민영화가 되었고 현재 팔렛트 비즈니스를 하는 기업 중 세계에서 가장 큰 회사라고 한다. 이 회사는 벌써 십 년 정도 전인 2013년을 기준으로 팔렛트 사업으로만 약 3.5조 원의 수익을 냈다고 한다.
CHEP가 만든 팔렛트는 파란색으로 칠해져 있는데 이 파란 팔렛트는 기존의 팔렛트와 아주 큰 차이점이 하나 있다. 보통의 팔렛트의 경우 아래 그림과 같이 한쪽 방향으로 'Stringer'라 불리는 나무가 대어져 있기 때문에 사각형의 네 변 중 두 변으로만 지게차가 들 수 있었다. 하지만 CHEP의 팔렛트는 이 Stringer가 없기 때문에 네 방향으로 모두 지게차가 들 수 있다.
물론 CHEP의 팔렛트와 같이 팔렛트를 생산할 경우 가격이 비싸지는 문제가 발생한다. 파란 팔렛트의 생산 비용은 대략 $20 정도인데 일반적인 팔렛트는 그것의 절반 이하의 가격으로 만들 수 있다(재생품의 경우 $3 이하의 가격으로 사들인 후 수리하여 $5 정도에 판매한다고 함). 하지만 CHEP는 파란 팔렛트를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5에 '렌트'를 하는 것으로 이러한 문제를 해결했다.
CHEP는 자신들의 팔렛트를 $5에 렌트를 하고 이것을 돌려줄 경우 개당 $1.25를 지불하고, 만약 자신들의 창고로 직접 반납하는 경우 개당 $1.75를 추가로 지불한다고 한다(2014년 기준). 이런 방식의 사업 모델로 CHEP는 1995년 미국 시장에 진출하였고 현재 약 1.1억 개의 파란 팔렛트가 미국과 캐나다를 돌아다니고 있다고 한다.
물론 이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수의 팔렛트가 망가지거나 회수되지 않는 문제가 있으며(CHEP에서는 연간 1백만 개 정도가 사라진다고 추산), 그중의 일부는 팔렛트 재활용 업체들로 유입되어 CHEP와 소송에 휘말리기도 하였다(*).
(*) CHEP는 사용자들에게 파란색 팔렛트를 '대여'한 것이기 때문에 전세계 어디에 있던 이런 팔렛트들은 자신들의 자산이라고 간주하여 팔렛트 재활용 업체들이 자신들의 자산을 함부로 사용하여 이득을 취하고 있다고 소송을 함. 반대로 팔렛트 재활용 업체들 입장에서는 이미 버려지거나 망가진 팔렛트를 수거하여 재활용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고 생각. 많은 소송 이후 현재는 재활용 업체들이 수거한 파란 팔렛트는 CHEP가 돈을 주고 수거해가는 식으로 합의가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많은 수의 팔렛트가 망가지거나 사라지는 와중에도 모든 방향에서 지게차로 들 수 있다는 편리성으로 인해서 미국과 캐나다에서 CHEP는 계속 성장을 하게 된다. 특히 2010년 코스트코가 납품 시 'CHEP 스타일'의 팔렛트만 사용하라고 요구한 이후 더욱더 성장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코스트코에서는 직접 일반 팔렛트와 파란 팔렛트를 비교하는 실험을 통해서 지게차가 네 방향에서 모두 접근할 수 있는 파란 팔렛트를 이용할 경우 트럭에 싣고 내리는 속도를 조금 줄일 수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조그마한 차이였지만 무수히 많은 팔렛트를 싣고 내리는 경우 이러한 조그마한 차이가 쌓이고 쌓일 테니 코스트코에서는 납품 시 'CHEP 스타일'의 팔렛트만 사용하라고 한 것이다(이 외에도 CHEP 팔렛트의 품질이 더 우수하고 균일한 것도 고려되었다고 한다).
이제부터 당신은 내가 그랬던 것처럼, 코스트코에 가시면, 아니 어디에 가시던 파란색 팔렛트가 눈에 확 들어올 것이다(참고로 파란 팔렛트와 유사한 형태의 빨간색 팔렛트도 종종 눈에 띈다. 이는 PECO라는 회사의 제품으로 CHEP와 동일한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
끝으로 이 글을 쓰기 위해서 참고한 자료는 다음과 같다.
Planet Money, Episode 545: The Blue Pallet
Cabinet Magazine, Issue Winter 2013-2014, Whitewood under Sie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