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k Derby - 누가누가 많이 낳나
지금으로부터 95년 전인 1926년 10월 31일 토론토. 72세의 변호사였던 찰스 밴스 밀러(Charles Vance Miller)는 다른 변호사 두 명과 법률에 관한 논쟁을 벌이던 중, 둘 다 틀렸다며 자신의 사무실에서 그 이유를 보여주겠다고 하였다. 삼 층에 위치한 그의 사무실까지 단숨에 뛰어 올라간 그는 법률 책을 집어 들고는,
사망하였다.
변호사와 사업가로서 성공한 삶을 산 그는 많은 부를 축적하였는데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고, 가까운 가족이나 친척도 없었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은 그가 죽으면 자신의 모교였던 토론토 대학에 재산을 기부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급작스런 사망 이후 공개된 그의 유서에는 사람들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내용들이 들어 있었다.
예를 들면 이런 내용들이었다.
토론토에 거주하는 개신교 목사(금주를 요구하는 종파)들에게 오키프 맥주 회사(O'Keefe Beer Company, 가톨릭계 회사임) 주식 한 주씩 나눠 줄 것.
캐나다 윈저 지역 목사들에게 경마장(Kenilworth Park Racetrack) 주식을 한 주씩 나눠 줄 것.
세 명이 모두 동의하는 경우 경마장(Ontario Jockey Club) 주식을 줄 것. 단, 그중 두 명은 경마 자체를 반대하는 사람들이었고 다른 한 명은 경마계의 거물이었다.
세 명의 변호사에게 자메이카 킹스턴에 있는 별장을 줄 것. 단, 한 명이라도 소유권을 포기하면 별장은 지역 사회에 기부됨. 이때 세 명은 서로를 매우 싫어하는 사이였다.
유서라고 하기에는 장난기가 가득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밀러의 정확한 의도를 알 수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캐나다의 사법체계가 말도 안 되는 유서를 어디까지 인정해 주는지 시험을 해보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어떤 사람들은 이것은 단순히 장난일 뿐이라며 분명 진짜 유서가 따로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물론 다른 유서는 존재하지 않았고 이 유서의 효력이 인정되어 유서에 적힌 조항들이 하나씩 집행되었다.
그래서 1928년 금주를 하는 개신교 목사들 99명은 오키프 맥주 회사 주식 가격에 해당되는 금액($38~$56, 현재 가치로 약 100만 원 정도)을 받을 수 있었다. 경마장 주식을 받게 된 윈저 지역 목사들도 주식을 한 주씩 받을 수 있었는데 문제는 주식 한 주에 겨우 0.5센트였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밀러는 개신교 목사들을 무척 싫어했던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이다.
온타리오 경마 클럽 주식을 받게 된 사람들의 경우 경마에 반대하는 두 명도 함께 경마 클럽에 가입하여 $1,500 (현재 가치로 약 2천만 원 정도)에 상당하는 주식을 받았다. 그리고 5분 후 다른 사람에게 팔아버렸다(자료에 따라서는 기부를 했다고 함). 경마계의 거물이었던 다른 한 명은 흔쾌히 본인이 주식을 가져갔다고 한다.
서로를 경멸하는 세 사람에게 준 자메이카의 별장은 앞의 사례들보다 싱겁게 끝이 나고 말았는데 알고 보니 밀러가 죽기 몇 년 전에 이미 별장을 팔아버렸기 때문에 처음부터 의미가 없는 조항이었다.
위에 소개된 조항들도 이상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괴상했던 것은 유서의 마지막 항이었던 9번 조항이었다.
내가 죽고 난 이후 10년 동안 토론토에서 출생 등록을 가장 많이 한 엄마에게 남은 재산을 모두 줄 것
At the expiration of 10 years from my death, give it and its accumulations to the mother who has, since my death, given birth in Toronto to the greatest number of children, as shown by the registrations under the Vital Statistics Act.
밀러는 이 조항을 통해 남은 재산을 모두 현금화해서 10년 동안 투자를 한 후 이 돈을 모두 토론토에서 가장 많은 아이를 출생한 사람에게 지급하라고 하였다. 만약 동률인 경우에는 엄마들끼리 돈을 나누어 가지라고 했다. 실제로 10년 후 이 돈은 현재 가치로 약 800만 달러(약 80억 원)로 불어나는데 엄청난 금액이 아닐 수 없다. 10년 동안 토론토에서 아이를 가장 많이 낳은 사람은 말 그대로 로또가 터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가 죽고 나서 처음 6년 동안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 유서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사람들은 자기와 크게 상관없는 일이었을 테니 이 조항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고 일반 사람들은 대부분은 이러한 내용의 유서가 있었는지조차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6년이 지난 1932년, 온타리오의 법무부 장관이 직접 나서서 이 유서를 무효화하고 남은 돈은 모두 토론토 대학에 기부할 법안을 상정(*)하면서 모든 것이 뒤바뀌게 된다.
(*) 캐나다는 내각제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 국회의원이 장관직을 맡는다. 그래서 법무장관도 어쨌든 국회의원이기 때문에 그가 직접 법안을 상정한 것으로 보인다.
그때까지 이런 유서가 존재하는지 몰랐던 대중들은 정부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고 정당하게 모은 재산을 빼앗아가려 한다며 크게 반발했다. 게다가 1929년 시작된 경제대공황으로 모든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매우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상황에서 로또와 다름없는 기회를 정부가 빼앗아 간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주 큰 반발이 있었던 것이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온타리오 정부는 꼬리를 내리고 법안 상정을 철회하였다.
그런데 지금이나 90년 전이나 기자들이 문제인가 보다. 기자들은 밀러의 유서가 효력이 있음을 확인하자마자 토론토에 등록된 출생 기록을 뒤져 밀러의 사망 후 가장 많은 아이를 출산한 사람들을 찾아냈다. 그리고 그들의 집에 찾아가서 독점적으로 기사를 쓸 수 있는 전속 계약을 맺었다. 이 전속 계약은 기자들이 원하면 언제든지 가족들의 사진을 찍고 인터뷰를 할 수 있는 조건이었기 때문에 본인과 가족의 사생활이 낱낱이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정작 대상자들은 크게 개의치 않았는데 다들 하루 벌어먹고사는 처지였을 테니 신문사가 제공하는 돈을 거절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렇게 찰스 밴스 밀러는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출산 경쟁의 판을 깔았고 온타리오 정부는 이를 직접 전국 방방 곳곳으로 홍보를 해주었다. 그리고 기자들이 경쟁에 참가할 선수들을 모아서 결국 1932년 토론토에서 전 세계가 주목하는 출산 경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기자들은 이 이상한 경쟁에 Stork Derby(**)라는 기가 막힌 이름도 붙여주었다.
(**) 우리나라에 삼신할머니가 있다면 서양에는 황새(Stork)가 있다. 그리고 경마에 사용되는 Derby라는 단어를 붙였다. 그런데 여성의 출산 경쟁을 경마에 비유하는 것 자체가 당시 사회의 비틀린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다.
본격적인 출산 경쟁이 벌어졌던 4년의 기간 동안 여러 사람들이 엎치락뒤치락하면서 경쟁을 이어갔다. 중간에 경쟁에서 뒤처지는 사람들도 있었던 반면 나중에 혜성처럼 등장하는 후보들도 있었다. 우선 밀러가 사망한 후 7년이 지난 1933년 기준으로 선두권을 형성하고 있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았다.
그레이스 배그나토(Grace Bagnato) - 7명 출산 및 임신 중
플로렌스 브라운(Florence Brown) - 7명 출산
힐다 그라치아노(Hilda Graziano) - 6명 출산
에마뉴엘 라 대리가(Emanuela Darriga) - 6명 출산
클라렌스 키츠(Clarence Kitts) - 6명 출산
1933년까지만 하더라도 그레이스 배그나토가 가장 앞서 나가는 듯했지만 다음 해 릴리안 케니(Lillian Kenny)가 선두로 올라섰다. 그리고 1935년에는 루시 팀렉(Lucy Timleck)과 케이틀린 네이글(Kathleen Nagle)이 9명의 자녀로 선두권에 합류했다. 경쟁의 마지막 해였던 1936년에는 신원 공개를 꺼려 한동안 Mrs. X라고 불린 폴린 메이 클락(Pauline Mae Clarke)도 11명의 자녀를 출산하여 상위권에 등장하였다. 정말 말 그대로 대혼전이 아닐 수 없다.
결국 밀러가 사망한 지 10년이 지난 1936년 10월 31일에 출산 경쟁은 종료되었다. 그때까지 릴리안 케니와 폴린 클락은 11명을 출산하였고, 그레이스 베그나토를 포함한 5명은 9명의 자녀를 출산하였다. 매우 기묘한 경쟁이었지만 이렇게 종료되었으니 밀러의 유서대로 일 등을 한 케니와 클락이 상금을 나누어 가져 가면 모든 것이 깔끔하게 마무리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상금을 받을 수 있었던 사람은 11명의 자녀를 출산한 릴리안 케니도, 폴린 클락도 아니었고 처음 선두를 달렸던 그레이스 베그나토도 아니었다.
1936년 10월 31일, 출산 경쟁이 종료되었을 때 언론에 알려진 출산 현황은 다음과 같았다.
릴리안 케니(Lillian Kenny) - 11명 출산?
폴린 메이 클락(Pauline Mae Clarke) - 11명 출산? 혹은 자료에 따라 9명, 10명?
최소 10명을 출산했다고 주장했으나 이런저런 문제로 9명만 대상으로 신청
루시 팀렉(Lucy Timleck) / 케이틀린 네이글(Kathleen Nagle)
9명 출산
앤 스미스(Anne Smith) / 이사벨 맥클린(Isabel Maclean) / 그레이스 배그나토(Grace Bagnato)
기록 관리가 잘 이루어졌을 리가 없는 1930년 대에는 출생 등록이 누락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을 것이다. 옛날에는 우리나라에서도 영아 사망률이 높아서 출산 이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나서 출생 등록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니 그 옛날 캐나다에서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그리고 당시에는 대부분 집에서 출산을 하였고, 먹고사는데 바빠서 출생 등록을 놓치는 경우도 잦았다. 그렇기 때문에 위의 표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사람이 정해진 기간 동안 정확히 몇 명이나 출산을 했는지를 알기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물며 이렇게 큰돈이 걸려 있는 경우에는 참가자들이 거짓으로 출산 횟수를 늘려 말하지 않았다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이 모든 것의 시발점이 된 밀러의 유서는 단 두 문장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사람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이 될 여지가 존재하였다. 예를 들어, '토론토에서'의 의미는? 아이를 출생한 곳이 토론토여야 하는지 아니면 단순히 부모의 거주지가 토론토이면 되는지? 출생 등록이 되지 않은 아이는? 사산아는? 혼외 관계에서 태어난 아이는? 그나저나 이러한 출산 경쟁이 정말 법적으로 문제가 없긴 한 건가?? 등등의 질문이 이어졌다. 그 결과 이 경쟁에 참가를 했던 모든 사람들이 소송을 제기해서 자신이 가장 많은 아이를 출생했다고 주장하는, 그야말로 난장판이 되어 버렸다.
이 소송들이 마무리되는 데에만 거의 2년의 시간이 소요되었는데 최종적으로 루시 팀렉, 케이틀린 네이글, 앤 스미스, 그리고 이사벨 맥클린이 총 9명 출산을 한 것으로 인정되어 각각 12.5만 불 씩 받을 수 있었다. 이 금액은 현재 가치로 따지면 약 20억 원에 해당되는 돈으로 그야말로 20억 원짜리 로또에 당첨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에 반해 처음 11명을 출산했다고 주장한 릴리안 케니와 폴린 메이 클락은 여러 가지 이유로 5~6명의 출산만 인정되어 상금을 받을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처음 9명을 출산했다고 주장한 그레이스 배그나토도 결국 7명만 인정받아 상금을 받을 수 없었다.
출산 경쟁은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그 이후에도 상금을 탄 부부가 뉴욕으로 여행을 갔다더라, 어느 가족이 상금으로 어디의 집을 샀다더라와 같은 뉴스도 검색이 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언론의 관심도 줄어들었고 일반 사람들의 관심 속에서도 사라져 갔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여기서 마무리하기에는 무척 찜찜하다. 왜냐하면 이 출산 경쟁을 조금 더 자세히 드려다 보면 사실 두 가지 점에서 엄청나게 잔인한 경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 첫 번째는 출산 경쟁 과정에서 여성과 아이들이 큰 위험에 노출되었다는 것이다. 나도 어쩌다 보니 자식이 세 명이지만 여성이 임신을 하고 출산을 한다는 것은 정말 엄청난 일이 아닐 수 없다. 십 개월의 임신 기간 동안 입덧으로 먹을 것을 제대로 못 먹기도 하고, 뱃속의 아기가 잘못되지는 않을까 노심초사 걱정이 되기도 하고, 출산 과정에서는 고통과 위험이 동반된다. 그렇다고 출산을 한다고 다 끝난 것이 아니다. 본인 몸조리도 해야 하고 갓 태어난 아기도 끊임없이 돌봐야 한다. 의료 기술이 발달한 지금도 그런데 하물며 90년 전에는 이 과정이 얼마나 위험하고 힘들었을까!
그런데 자의든 타의든 출산 경쟁에 뛰어들었던 사람들은 10년 동안 거의 매일같이 임신을 하고 있었다는 소리이니 얼마나 힘들었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게다가 그들 대부분이 가난했기 때문에 유산과 사산 그리고 영아 사망이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실제로 이 출산 경쟁에서 태어난 아이들의 영아 사망률은 당시 전국 평균보다 여섯 배나 높았다. 결국 이 아이들의 34%가 살아남지 못했다고 하니 정말 끔찍한 경쟁이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다음 사례는 정말 슬프다. 주요 경쟁자 중 한 명이었던 릴리안 케니는 매우 가난해서 슬럼가와 같은 곳에서 살아야 했다. 그런 곳이라면 깨끗할 리가 없기 때문에 쥐들도 많았는데 어느 날 밤 집에 쥐들이 들어와 아이들을 공격하는 일이 발생했다. 밤 중에 쥐들이 자고 있던 어린아이 세 명을 물어뜯었는데 그중 생후 삼 개월 된 아이는 병원에는 가보지도 못하고 며칠 후 죽고 말았다. 사실 내가 캐나다에 살고 있지 않았으면 이런 일이 피상적으로만 느껴졌을 텐데 어쩌다 보니 예전에 살던 집에 쥐들이 자주 들어와서 벽을 긁어댔기 때문에 이 이야기가 더욱 끔찍하게 느껴졌다.
쥐가 자고 있는 아이들을 물어뜯다니!!
이런 일이 발생할 때마다 다음날 신문 1면에는 이러한 이야기로 도배되었다. 그렇다고 아이들이나 부모가 겪을 고통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이러한 일들이 출산 경쟁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할 뿐이었다. 예를 들어 1936년 몬트리올의 한 신문사에서는 '사산아가 일 등을 결정할 수도'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릴리안 케니가 출생한 사산아가 고 찰스 밴스 밀러의 유서에 따라 진행 중인 스토크 더비에서 그녀에게 승리를 보장해 줄지도 모른다'라고 보도를 하였다. 출산 경쟁 내내 여성뿐만 아니라 아이들마저 물건으로 취급되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 경쟁이 잔인했던 두 번째 이유는 처음부터 제대로 된 규칙이 없었기 때문에 사회적인 약자에게 특히 더 불공평했다는 것이다. 사실 최종적으로 상금을 받을 수 있었던 네 명의 여성과 상금을 받을 수 없었던 세 명의 여성의 차이는 단순히 '법원에서 인정한 아이'들을 얼마나 많이 출생했는지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상금을 받은 네 명은 모두 영국계 백인, 기독교, 중산층이었던 반면 나머지 세 명은 가난했고, 노동 계층이거나 아예 직업이 없었고, 같은 백인이라도 유럽의 다른 인종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당시 캐나다 사회에서 비주류라고 여겨졌던 사람들은 이 출산 경쟁에서도 환영을 받지 못한 것이다. 따라서 이 출산 경쟁을 조금 더 정확히 이해하려면 환영받지 못한 그 세 명의 여성들을 자세히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릴리안 케니는 프랑스계 캐나다인이었고 남편은 아일랜드에서 온 이민자였다(한국에서 본다면 이것이 무슨 의미 큰 의미가 있는지 알기 어렵지만, 가난한 외국인 노동자 취급을 받았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그녀는 출산 경쟁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부터 이 경쟁에서 우승을 할 사람은 본인이라고 굳게 믿었다. 뭐 그녀는 평생 총 19번의 임신을 했다고 하니 헛된 자신감은 아니었을 것이다.
케니는 다른 경쟁자들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편이었다(앞서 이야기했던 쥐에게 희생된 아이가 바로 케니의 아이들이었다). 이렇게 가난했음에도 우승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너무 커서였을까? 한 번은 경쟁에 참가한 엄마들이 모여 더 이상의 경쟁은 때려치우고 상금을 나눠갔자고 이야기를 했다. 모든 사람들이 그 의견에 찬성을 했지만 오직 케니만 반대를 하였다. 이유는 단순했다.
'내가 우승자인데 왜 상금을 나눠가져?'
그녀는 경쟁이 종료되고 10년 동안 총 11명을 출산했다고 주장했으나 그중에 두 명은 출생 등록이 제대로 되지 않아 인정을 받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세 명의 아이를 사산하였는데, 그 시점까지만 하여도 사람들은 사산아도 출생 숫자에 포함된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밀러의 유산을 집행하는 측에서 케니가 출생한 사산아를 출생 수에 포함시켜야 되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였다. 그래서 소송 과정에서 그녀가 출산한 사산아들이 어떻게 태어났는지, 한 번이라도 숨은 쉬웠는지, 심장은 뛰었는지 등이 자세하게 묘사되었다. 자식이 죽은 것도 큰 고통인데 그것을 다시 한번 들춰내는 것은 엄마에게 정말 잔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결국 그녀는 재판 도중 소리를 지르며 법정을 뛰쳐나가 개처럼 취급받고 있다고 울부짖고 말았다. 이렇게 고통스러운 과정 끝에 사산아들은 출생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였고 결국 케니는 11명 중 6명 만을 인정받아 상금을 받을 수 없었다. 그래도 그녀는 이에 굴하지 않고 추가로 소송을 제기하여 2억 원 정도의 합의금을 수령하였다. 우승자들이 받아간 20억 원에 비하면 보잘것없지만 가난했던 그녀에게는 그래도 무척이나 큰돈이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신분 노출을 꺼려 언론에서 Mrs. X라고 불린 폴린 메이 클락은 출산 경쟁이 종료된 시점에서 24세로(혹은 25세로) 가장 젊은 여성이었다. 그녀는 24세 때에 이미 10번(혹은 11번)의 출산을 했는데 그중 다섯 명은 결혼한 남편과의 사이에서, 나머지 아이들은 동거했던 남자와의 사이에서 낳았다. 비록 전 남편과 헤어지고 나서 다른 남자와 산 것이었지만 정식으로 이혼 서류를 처리할 돈이 없었기 때문에 법적으로 전 남편과 혼인을 한 상태였다.
그런데 이번에도 밀러의 유산을 집행하는 측에서 또다시 그녀가 출생한 아이들의 적법성에 대해서 딴지를 걸었다. 이유야 어떠하든 혼외 관계에서 아이들을 출산한 것이니 과연 이 아이들을 경쟁에 포함시켜야 되는지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결국 온타리오 상급 법원과 캐나다의 대법원(Supreme Court of Canada)까지 거쳐 밀러의 유서에서 말하는 '아이들(Children)'은 '출생 등록이 된 아이 중 결혼한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만을 의미한다고 정의되었다. 정말 밀러 본인이 그렇게 생각했을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지만.
한편 그녀와 그녀의 동거남은 출산 경쟁에 참여하면서 클락이 가장 많은 아이를 출산하게 되면, 즉 남자가 가장 많이 임신을 시키면 상금을 반으로 나눈다는 계약을 맺었다. 클락이 그렇게 많은 임신을 원했는지 원하지 않았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남자가 주도한 이 계약의 내용과 그의 폭력적인 성향을 고려하면 그녀가 더 이상 임신을 하지 않고 싶었어도 어쩔 수 없이 계속 임신을 해야만 했을 것이다.
당시 사회 분위기 상 혼외 관계로 아이를 출산한 것만 해도 크게 비난받을 일인데 출산 경쟁을 위해 동거남과 계약까지 맺었다니 그녀는 무척이나 공격하기 쉬운 대상이 되었다. 결국 소송 과정에서 계약의 내용과 동거남의 가정 폭력이 대중에게 낱낱이 공개되었고 그녀는 웃음거리로 전락하고 말았다. 클락 또한 이 모든 고통스러운 과정 끝에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다섯 명만 인정받아 상금을 받을 수는 없지만 케니와 마찬가지로 추가적인 소송을 통해 합의금만 2억 원 정도를 받을 수 있었다.
그레이스 배그나토는 이탈리아에서 온 이민자의 딸로 미국에서 태어났고 6살 때 토론토로 이주하였다. 남편은 이탈리아에서 이민을 온 사람으로 처음 남편을 만났을 때만 해도 그녀는 이탈리아어는 하지 못했다. 하지만 6개월 만에 이탈리아어를 배웠고 그 이후에도 동네 사람들에게서 다양한 언어를 배워서 총 다섯 가지 언어를 이야기했다. 그녀는 그런 능력을 바탕으로 법원에서 이탈리아어 번역원으로 일을 했다.
그녀는 평생 동안 24번을 임신을 했고 총 12명의 자녀가 생존했다(위의 가족사진을 참조). 그녀는 언제나 출산 경쟁이 있었든 없었든 자신은 자식을 낳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출산 경쟁이 시작되기 전 이미 13번의 임신을 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출산 경쟁이 종료되었을 때 그녀는 그 기간 동안 총 9명의 자녀를 출산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한 명은 어찌 된 일인지 출생 등록이 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직접 출생 등록을 했다며 출생 관리소가 기록을 찾아내지 못하면 다 부숴버릴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리고 한 명은 사산을 했기 때문에 총 7명만 인정받을 수 있었다.
앞의 두 명의 사례와는 달리 그녀는 더 이상의 소송을 제기하지 않아 결국 한 푼도 손에 쥘 수 없었다. 아마도 모든 것에 진저리가 났거나 아니면 12명의 아이가 집에서 기다리고 있고, 일도 나가야 하니 그냥 다 때려치우자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 눈에는 영국 사람이든 프랑스 사람이든 아일랜드 사람이든 이탈리아 사람이든 다 거기서 거기로 보인다. 마치 우리나라 사람이나 중국 사람이나 일본 사람이나 조선족 사람이나 남들이 보면 다 거기서 거기로 보이듯. 하지만 우리가 중국 사람을, 조선족을, 동남아 사람들을 무시하고 가난한 사람을 무시하듯 당시 캐나다도 이민자들을 싫어했고 가난한 사람들을 싫어했다. 당시 온타리오의 장관 중의 한 명은 '말 못 할 수준의 여성'들이 낳은 가난한 자식들은 나중에 우리 삶의 질을 떨어뜨릴 것이라고 말을 했을 정도였다. 이쯤 되면 이 출산 경쟁은 100년 전 캐나다에서 벌어진 말도 안 되는 '세상에 이런 일'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저 형태만 다른 약자에 대한 차별이 아닌가 싶다.
참고자료
This American Life: 668 Babies Got Bank
Historicist: The Great Stork Derby
그 외 위키피디아 및 구글 News Archive 등등
후기
이 이야기를 처음 들은 것은 2019년 2월 This American Life라는 팟캐스트를 통해서였다. 이 This American Life는 매주 일요일 한 시간 분량으로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미국의 라디오 방송인데 시대가 변하여 이제는 미국 밖에서도 팟캐스트를 통해서 손쉽게 들을 수 있다. 1995년부터 시작했으니 벌써 26년이 넘은, 말 그대로 장수 라디오쇼라고 할 수 있겠다.
어쨌든 그 방송을 통해서 처음 Stork Derby를 들었을 때부터 꼭 블로그에 소개하고 싶었다. 거의 백 년 전에 일어난 일이지만 아무래도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토론토에서 벌어진 일이니 왠지 남의 이야기 같지가 않았다. 그래서 This American Life의 대본도 읽어 보고, 관련 기사들도 찾아보았지만 중간에 추진력을 상실하여 정작 글로 옮기지는 못했다.
하지만 최근 이 이야기가 브런치에 쓰기에 적당한 주제라고 생각되어 예전에 출력해 놓았던 대본과 관련 기사들을 다시 읽어보았다. 그리고 글에 쓸 사진들도 구글에서 검색을 해 보았다. 본문에서도 언급했듯 백 년 정도 전에 벌어진 일이지만 생각보다 많은 신문 기사와 사진을 찾을 수 있었다. 당시 캐나다와 미국 신문에서 정말 많이 보도가 되었나 보다.
이렇게 Stork Derby에 대한 정보는 검색만 하면 쉽게 찾을 수 있다. 80년대 이를 다룬 책이 출판되기도 하였고(너무 오래되어서 도서관에서 구할 수가 없었다. 우리 동네 대학교 도서관에는 있던데 도서관 카드가 없어서 아쉬웠다), 2000년대 초반에는 관련 다큐멘터리가 제작되기도 하였다. 그것 말고도 이제는 구글에서 수많은 인터넷 기사들이 검색이 되는데 그중에서도 내가 주로 참고한 This American Life의 에피소드가 가장 인간적이었다.
이 에피소드는 스테파니 푸(Stephani Foo)라는 미국의 작가가 만들었다. 그녀의 에피소드는 다른 글들과는 달리 차별을 당한 여성들을 위주로 이야기가 진행되기 때문에 큰 공감이 되었다. 나의 공감은 이 황당한 경쟁이 벌어진 토론토가 낯설지 않아서 비롯된 것일까 아니면 그 여성들처럼 외지인으로 살고 있어서 비롯된 것일까.
결국 그 공감이 여기까지 글을 쓰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