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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렌타인데이에 걸려온 전화

14년 전, 그날의 전화 한 통이 우리의 시작이었다.

by 지혜여니 Feb 14. 2025

기억나?

14년 전 당신이 나에게 처음으로 연락했던 날.


길가엔 사랑을 고백하는 초콜릿이 가득했고, 연인들로 가득 찬 거리는 온통 핑크빛으로 물들어 있었어.

그런 분위기를 온몸으로 거부하고 싶었는지, 외로운 사람들끼리 모여 회사 동료들과 저녁을 먹었어.


선물 받은 티겟으로 연주회를 즐기고, 20대 후반을 채우는 중인 여자들끼리 분위기 좋은 식당에 갔어. 특별한 날, 특별하게 보내고 싶은 마음에 마신 샴페인 덕분에 살짝 기분이 몽글몽글해질 무렵, 당신의 전화가 왔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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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서 본 지 얼마 안 된 어색한 사이였는데, 갑작스러운 전화라니. 무슨 용건이었는지도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퇴근했느냐? 저녁은 먹었느냐?" 같은 평범한 질문들이었던 거 같아. 연주회를 듣고 기분이 한 껏 올랐던 터라, 음악을 전공한 당신이라 묻고 싶었던 게 많았는지, 첫 통화는 어색하지 않게 이어졌어. 그런데  마침 외로운 여자들끼리 모인 자리에서 뜬금없이 막내가 남자와 통화를 하니, 언니들이 가만두지 않더라. 당신에 대해 이것저것 꼬치꼬치 캐묻는 바람에 난감했었지.



평소 술을 즐기지 않던 나는 그날 처음으로 필름이 끊긴다는 경험을 했어. "술 마시지 말고, 일찍 조심히 들어가세요."라는 당신의 문자를 확인도 못 한 채 친구네 집에서 외박을 했고, 새벽에 깜짝 놀라 집으로 달려가 옷을 갈아입고 출근하느라 정신이 없었어. 그런데 나와 연락이 안 된 그 밤 당신이 내 걱정을 하며 뒤척였다는 걸 나중에서야 듣고 알았어.



그날 이후, 자연스럽게 내 퇴근 시간을 챙기고, 교회에서도 괜히 친한 척 다가왔지. 처음엔 이상하게 느꼈지만, 거부하지 않은 걸 보면 나도 싫지 않았던 것 같아. 얼마 지나지 않아, 예배 직전 반주자가 갑자기 병원에 가게 되면서 내가 긴급 대타로 반주를 맡게 되었었지. 덕분에 당신이 위기를 넘겼고, 그 인연으로 당신에게 식사를 처음 대접받았어.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보려고 애쓰던 당신의 모습이 어찌나 웃기던지. 그때 나에게 호감 있는 당신을 느꼈어.



화이트데이날, 당신은 툭 사탕 바구니를 건네며 "여자들끼리만 다니지 말라"는 잔소리를 했고, 며칠 뒤에 "오다 주웠다"는 듯이 장미꽃다발을 건네며 고백했어. 나와 진지하게 만나보고 싶다고. 못 이기는 척 장미꽃을 받아 들긴 했지만, 사실 무척이나 당황스러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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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꾸준히 나에게 사랑을 표현했고, 늘 먼저 챙겨주는 한결같은 당신의 모습에 어느 순간 나도 마음이 흔들려 당신의 사랑을 온전히 받아들이게 되었지. 그 말도 안 되는 사건이 계기가 되어 평생을 함께 살아가는 동반자가 되었더라.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짧은 시간 안에 황당한 일들이 많았는데, 그땐 그저 신기하게만 생각했었더라고.





몇 번의 밸런타인데이와 화이트데이를 서로 소소하게 챙겨 왔지만, 아이들을 키우면서 편의점 초콜릿 하나를 나눠 먹는 일상으로 변했네.



이번 방학은 처음으로 함께 보내는 시간이라 낯설지만, 신혼 생활이 없었던 우리에겐 참 귀한 시간이 되고 있어. 얼마 전 정리하다가 발견했는데, 아이들이 자란 만큼 매번 생일 때마다 서로에게 써 준 편지도 제법 쌓였더라. 손 편지를 많이 써주는 당신 덕분에 구구절절 담긴 사랑고백들을 다시 펼쳐볼 수 있어 참 다행이야.



오늘, 아이들이 학원에 간 사이 짧은 산책과 데이트를 하면서 차가운 내 손을 잡은 당신이 말했지.



"우린 서로 너무 다른 것 같아. 성격도 정반대고, 손의 온기까지 다르네. 근데 반대인 사람끼리 서로 잘 산대. 그래서 아직까지 잘 살고 있나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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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잘하지 않는 말을 당신의 뜬금없는 사랑 고백에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나도 같은 생각이었어.  한결 편안해진 상황을 즐길 수 있는 요즘이 참 좋거든. 그동안 너무 달라서 이해하기 힘들다고 싸우기도 많이 했지만, 그 과정에서 서로의 모난 부분이 깎이고 동글동글해졌나 봐.



작년에 갑자기 내 몸에 이상이 생기고, 퇴사까지 결정하면서 울적한 날들이 많았어. 당신은 모처럼 선물처럼 얻은 자유를 누리라며 내 앞에선 큰소리치지만, 갑자기 당신이 짊어진 짐의 무게가 배 이상 커졌다는 걸 나도 느껴. 미안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1년만 쉬면서 몸을 돌보고, 아이들과 함께 못해본 시간을 보내라며 배려해 준 당신에게 고마운 마음이야.



14년이 지난 오늘, 같이 손잡고 거닐며 도서관에 왔어. 뜬금없이 글쓰기 책을 대출하길래 놀래서 쳐다보았더니, 날 위한 책 이래! 요즘 글쓰기한다고 애쓰는 모습이 은근 당신 눈에도 보였나 봐.


발렌타인데이라 초콜릿 챙기는 것조차 아깝다고 생각하는 당신을 위해 도서관 앞 카페에서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사줬어.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을 느낀다는 것이 참 좋은 날이네. 당신이 카페에서 책을 펼쳐 든 모습은 처음인데? 순간 심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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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열심히 돈 벌어서 당신이 원하는 걸 척척 사주는 아내가 되어볼게. 그날의 선택이 후회되지 않도록, 앞으로 남은 날들을 매일의 작은 행복으로 채워보자. 고맙고, 사랑해.



2025년 밸런타인데이에 가장 귀한 당신의 아내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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