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같은 오늘은 없다
작은 에피소드와 함께 시작된 하루는 평소와 다른 오늘을 만들어주었다.
직장 다니느라 바쁜 며느리는 시댁일에는 명절과 주말 외엔 왕래를 하지 않는다. 퇴사 후, 한결 여유 있는 며느리에게 오늘 시부모님 병원을 챙기는 미션이 주어졌다. 처음 있는 일이기도 하고, 오후에 예정된 스케줄이 있었지만 시부모님께서 병원 진료를 받으시는데 며느리로서 함께 가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아침 일찍 아이들을 등교시키고 급히 시부모님을 모시고 병원에 갔다. 진료 전 검사예약도 되어있기에 늦지 않게 서둘러 갔는데, 예약일자를 착각하셔서 오늘은 검사와 진료를 받을 수 없다는 소식을 들었다. 며느리가 아침부터 큰맘 먹고 움직인 거라 짜증 날 법도 했으나, 민망해하는 어머님의 표정을 보니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병원 일정이 한두 건도 아니라 젊은 사람도 충분히 할만한 실수이기에 괜찮다고 이해했으나, 시부모님 입장에선 무척이나 당황스러운 듯 보였다. 카카오택시를 이용해 집에 다시 모셔드렸다. 결국 택시비만 왕창 나오게 된 사건이 오늘 아침에 발생한 것이다. 근처에서 몇 시간 후 다른 일정이 있었던 터라, 아침 9시부터 외출한 나에게 생각지도 않은 작은 틈이 주어진 상황이었다.
똑같은 오늘은 없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 아침부터 시부모님께서 주신 작은 이벤트 날이라니~ 그리 예상치 못한 사건으로 웃음이 났다. 뜬금없이 주어진 자유 시간이 생겨 참 감사했다. '지루할 것 같은 일상에 똑같은 오늘은 없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인식하게 된 아침이었다. 이 작은 틈은 귀한 시간이란 생각에 급히 병원 근처 일찍 오픈한 카페를 찾아 방문했다. 온전히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 모처럼 일찍 움직여 카페에 앉아 라테 한 잔의 여유를 보내며 들고 나온 책을 펼치니 괜스레 웃음이 났다. 그리 작은 행복을 충전하는 날이 되었다.
우리는 매일 똑같은 아침으로 시작하여 바쁘게 보내다가 잠자리에 들며 하루를 마감한다. 삶은 반복되는 일상이라 무료하거나 지루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워킹맘 시절엔 똑같은 시간에 일어나 출근하고, 일하다가 녹초 된 몸으로 퇴근해 아이들을 돌보고 쓰러져 잠들던 시간들로 반복되는 삶이 무의미해 보였다. 쳇바퀴 돌고 있는 나날이 너무 지쳐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퇴사 이후, 막상 반복된 직장생활이 사라지고 나니 그 지루한 삶에도 매일 특별한 일상들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이제야 깨달았다.
삶의 큰 변화를 거치면서 오히려 전업주부의 삶은 무료하고 지루할 것이라 예상했지만, 내 예상은 첫날부터 완전히 빗나갔다. 아침부터 아이들을 위한 일상에 좀 더 치중하며 나의 손을 거치는 일들이 많아지고, 오히려 정신없이 더 바쁜 하루를 보낸다. 처음 겪어보는 상황들에 적응도 어렵고 당황스럽게 하는 일들 투성이었다. 낯선 시간들이 다가올 때마다 늘 처음의 순간들이 나의 발목을 잡았다. 직장생활이든, 전업생활이든 똑같이 주어진 하루였지만, 완전히 다른 삶이 펼쳐졌다. 그나마 이런 생활도 6개월째 접어드니 서서히 적응되기 시작해 참 다행이다 싶다.
길고 긴 겨울방학을 마치고 개학과 동시에 집 밖으로 나왔다. 그 시간 동안 수고했던 나를 위해 잠깐의 틈을 만들어주면서 나를 위로하고 사랑하기로 했다. 자주는 아니어도 카페에 앉아 혼자 책도 읽고, 이리저리 다니면서 조금씩 다른 배움들로 채워나가기로 했다. 어쩌면 그동안의 삶과 다른 삶을 채워가기 딱 좋은 기회였다. 평소에 다니던 길 말고 다른 방향으로 움직여보고, 집 근처가 아닌 조금 먼 다른 도서관을 방문해 낯선 공간에서의 어색한 나를 만나기도 했다.
내향적이고 익숙한 것을 좋아하는 나의 성향과 반대로 새로운 것들을 마주한다는 것이 무척 떨리고 어색했지만, 지금 누리는 그 새로움이 삶의 또 다른 희망처럼 다가왔다. 다양한 연령층을 만나고, 그들의 인생 스토리를 들으며 배워가는 삶의 지혜도 생겼고, 평소 읽지 않던 책들을 만나면서 예상과는 다른 경험을 채우기도 했다.
매일 똑같은 일상은 없다.
모두에게 주어지는 24시간을 365일 똑같이 만나는 일은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누군가는 그 시간들을 좀 더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누군가에게는 더 귀한 의미 있는 시간들로 채운다는 것을 배우게 되는 요즘이다. 어제와 다른 오늘을 마주하며, 채우는 경험들로 오늘과 다른 내일을 만난다. 때론 내가 경험하지 못하고 생각만 했던 일이 예상과는 다르게 흐르기도 한다는 것을 알았다. 처음 만나는 이들과의 교류를 통해서도, 삶의 견문이 넓혀지는 경험도 쌓게 된다. 내가 가는 길만이 옳은 건 아니라는 것, 나와 다른 이들의 삶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 똑같은 반복 속에서도 사소한 특별한 시간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배운다.
지금까지의 삶이 지루한 반복이었다면, 오늘부터의 삶은 반복 속의 특별한 시선을 찾아가는 날이 되고 있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들에 나의 선택으로 채울 수도 있고, 내가 선택하지 못하는 상황도 다름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을 배운다. 내 삶이 그리 충실히 채워지다 보니, 아이들의 삶조차도 내가 이끌기보단 함께 가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을 깨우치고 있다.
<80일간의 세계일주>를 읽으면서 철두철미한 계획적인 사람, 포그도 중요한 순간에 예상치 못한 결정을 하고 움직이는 것을 엿볼 수 있었다. 늘 나의 계획대로 이루어지는 삶이 아니기에, 그처럼 어떤 어려움과 시련이 닥쳐와도 그것을 덤덤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채워보기로 했다.
오늘 이렇게 특별한 하루를 만들어준 시부모님께 감사하다. 그리고 그 특별한 사건을 의미 있는 시간으로 받아들인 나에게도 감사하다. 매일 주어지는 오늘 속에 작은 것을 살피는 시선을 통해 좀 더 귀한 2025년의 삶을 채워가기로 마음먹은 시간들에 감사하다.
내일은 또 어떤 사건들이 나에게 다가올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