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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람 Oct 30. 2020

9. 우울증, "할 줄 아는 게 없구나."

우리는 언제나 함께였다.

 말 그대로 정신없이 살았다. 어느덧 스물아홉이 된 나이의 개수에 조급해진 나는 온갖 공채와 시험에 응시했다. 그중에는 공무원 시험도 있었다. 7급 시험이 두 달 남았고 계리직 공무원은 3개월을 앞둔 상태였다. 고작 두 달로 7급은 무리였다. 하지만 계리직은 한국사와 컴퓨터 일반, 우편 및 금융 상식의 3개 과목만 공부하면 된다는 정보에 무턱대고 달려들었다.

 확실히 급했다. 3개월밖에 남지 않았기에 닥치는 대로 열심히 했다. 점심을 먹는 시간이 아까워서 다이어트용 도시락을 냉동실 가득 쌓아놓았고 먹고 있는 시간도 아까워 한국사를 복습했다. 잠들기 전까지 외웠던 내용을 되새겼고 꿈에서까지 공부했다. 태어나서 이렇게 열심히 공부했던 적이 있던가, 싶었을 정도로 외우고 또 외웠다. 까먹으면 다시 외우면서, 나는 내 머릿속 기억이 스물여섯 살 시절보다 나아졌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우리와 나의 거리가 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시험 결과는 참담했다. 계리직 자체가 우발적인 시험인 데다가 우정국에서는 뽑을 생각이 없다는 양 난이도를 이상하게 조정해놨다. 두 과목만 풀고 남은 한 과목은 한 번호로 찍은 사람은 운 좋게 과락을 면해 합격했다. 평소에 2, 30점 받은 사람들이 찍어서 80점이 나왔다며 기뻐했다. 반대로 모의고사 내내 전국 1%에 들었다는 사람들은 참혹한 점수를 끌어안고 울고 있었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한국사 과목에서 유명한 J 강사님은 이번 계리직 시험을 10년 전 7급 공무원 수준의 문제라고 꼬집으며 참고하지 말라고 했다. 컴퓨터 과목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던 Y 강사님은 긴급 유튜브 방송을 열어 수험생을 달래주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앞으로의 수업 방향을 어떻게 잡아야 할지 모르겠다"라고 했다. 고지된 범위를 초월한 시험지는 강사에게도 커다란 골칫덩어리였다.

 그럼에도 일반 공무원과 달라 계리직을 얕보는 사람이 많았던 터라 "시험을 망친 것은 당신들이 열심히 하지 않아서가 아니냐"는 악플에 나와 수험생들은 속수무책으로 상처 받았다. 수험생은 다 같은 수험생이다. 직업에 귀천이 없듯 시험에도 귀천이 없다. 나랏일을 하겠다는 예비 공무원들의 마인드에 억장이 무너졌다.

 언제나 도움이 되었던 사촌오빠의 입에서 저 말을 들었을 적엔 진심으로 화가 났다. 이러나저러나 나의 열심을 무無로 돌려버린 출제진이 한없이 미웠다.



 이렇게 열심히 했는데도 안됐는데 앞으로는 어떡할까 하는, 숨이 턱 막히는 참담함에 또다시 정신과를 찾아가 잠시 끊었던 약을 다시 시작했다. 우리는 내게 바짝 붙었다.


"우울증 문제가 아니라 네가 멍청해서 못한 거야. 나한텐 잘못이 없어."


 우리는 내가 자신을 비겁한 핑계로 삼은 거라고 주장했다. 눈물이 났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통곡했다. 큰 소리로 울며 베개를 집어던지고 발을 구르고 소리를 질렀다.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았다. 나는 제대로 할 줄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으니까. 지금부터라도 죽는 방법을 연구해볼까 하는 터무니없는 상상까지 했다. 하지만 상상은 상상에서 그쳤다.

 우리는 내 손목이 벌겋게 될 때까지 마구 긁어댔지만 곧 멈췄다. S양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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