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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비안나이트

[소품 小品 - 4 ]

by 노힐 Sep 18. 2024

소품-4 【아라비안나이트】



"자기는 다 좋은데. 너무 진지한 게 문제야.

유머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우니깐. 별명이 샌님이었지?"

"샌님? 뭐 아무렴 어때. 나만 아니면 그만이지."

"사람들과 좀 어울리기도 하고 유도리도 챙기고 그래봐."

"........"

"하긴, 자기는 나름의 깡다구가 있긴 하지. 나랑 잘 때."

채기는 응수하지 못한다.

"이봐이봐. 또 표정이 굳었네."

"내 표정이 뭐."

"됐고, 내일 신참들 앞에서는 그런 표정은 곤란하지. 쫄지말고!  무시당하지 말고! 경력직답게 자신 있게 들이대라구."

"그래야지.... 그전에 내 깡다구 한번 더 보여줄까?"

"흠... 깡다구 완충?.... 좋아!"




채기는 수원 별실에 들어섰다. 명찰을 받아 걸고 원형으로 놓인 의자에서 지정석을 찾아 앉았다.  정장 차림의 사람들이 속속 들어오기 시작했다.  조직은 채기에게 두 번째 회사다. 경력직으로 선발되었지만 부장으로부터 연수 3일은 참석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연수 이틀째인 오늘의 프로그램은 [나를 말한다]. 

홈페이지에서 프로그램 이름과 그 내용을 확인했을 때, 채기는 아랫배가 출렁거렸다가 누가 꽉 잡아서 당기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민성대장증후군. 그것이었다. 교감신경 흥분, 과다하게 분출되는 아드레날. 대장 평활근의 수축...  

그의 선조를 종적으로 추적해 보면 어느 진화가지에서 과민성대장증후군파 분류유전적 조상이 있을 터. 이것이 생존에 뭐가 유리했을까. 채기의 침착하고 진중한 성격에 수십 년을 따라다닌 과민성증후군. 그것은 아랫배를 비워 둔 인체모형에 딱 맞는 장기 모듈을 장착한 것과 같았다.

채기는 사람들이 웅성대는 곳은 늘 피하고 싶었다.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아랫배에 장착된 모듈이 작동했다.


스무 명쯤 돼 보이는 사람들이 앉아있었다.  

채기의 왼쪽에 앉은 여자는 자기 왼쪽의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었고 오른쪽 남자는 오른쪽의 여자와 대화했다. 그들은 어느 유명인이 출연한 영화와 자신이 다녀 본 카페에 관하여 얘기했다. 네 명 모두 활기찼고 중간중간에 소리 내어 웃기도 했다. 맞은 편도 마찬가지였다. 만약 맞은편에 앉은 '이영찬'_건장한 몸을 자랑하며 신나게 떠들고 있는_을 들어내고, 자신을 혀놓더라도 자신을 빼고 좌우로 짝을 지어 대화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단 하루 만에, 며칠을 합숙이라도 한 것처럼 친하게 보였다. 오른쪽에 앉은 남자는 말하는 중에 가끔 팔꿈치로 채기를 건드리기도 했는데 살짝 돌아보며 목례를 했을 뿐이었다.


"암스테르담의 고흐 미술관이 가장 인상적이었죠. 호주의 울루루에선 자연의 위대함을 느꼈다면 고흐 미술관에서는 인간의 위대함을 느꼈어요."


오른쪽의 남자는 힘줄이 불거진 손등을 정연하게 움직이며 말했다. 그의 손목에서 반짝이는 시계갈색의 미끈한 피부 채기주눅 들었다.

채기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아랫배에 한 손을 대고 다른 손을 들어 진행자로 보이는 사원에게 말했다.


"저기, 화장실에 다녀와야겠는데요?"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작은 별실에 정적이 흘렀다. 웅성거림이 멎는 그 순간. 소음의 파장이 요동치다가 갑자기 아래로 뚝 떨어 그때. 기는 정적을 뒤로하고  살짝 발을 끌면서 화장실로 향했다. 그는 변기에 앉아 '다녀와야겠는데요?'는 참으로 멍청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똥을 싸지르고 싶다는 문명어이긴 하지만 확실히 분위기와 어울리지 못하는, 분위기에 지배된 자의 어투였다.

아니, 어쩌면 힘줄 손등을 가진 녀석의 말이 듣기 싫었거나 그의 말을 방해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채기는 그 녀석이 확실히 싫었다. '다음번에는 그냥 조용히 일어나서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양복 좌우를 여미면서 걸어 나와야겠어.' 돌아와 자리에 앉을 때는 화장실 냄새가 따라왔을까 봐 신경이 쓰였다. 채기는 행사 시작 직전에 한번 더 화장실에 다녀와야 했다.


의 아랫배와는 상관없이 프로그램은 순항했다. [나를 말한다] 2분간 자기소개를 하고 두 개의 질문을 받고 다음 사람을 지목하는 방식이다. 채기는 진행되는 내내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저는 고등학교 졸업식이 끝난 뒤 담임선생님 보낸 문자를 아직 기억합니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혼자서 가라!' 깊은 뜻을 모르지만 저는 강해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 회사에서 보게 될 강한 사람이 바로 저일 겁니다."

"모르죠. 강한 거와 강한척하는 것과는 다르니까요."

"...... 전 강하다고 생각합니다."

 

'신입다워. 서로 까칠하지만 주목받는 데는 성공한 셈이야.' 채기는 자신의 고등학교 생활을 떠올렸다.

'저 놀란 사자 녀석이 나를 지목하면 고전문학 선생 이야기를 해야겠군. 아냐.. 학교 이야기를 따라 한 것으로 보일까?...... 잘만 말하면 자연스럽고 괜찮은 일화일 거야. 그래, 뭐 어때.' 지목의 순간이 다가오자 채기는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음으로 지목된 자는 여자였다. 짧은 소매를 손으로 당기며 여자는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 어떤 사람일까요? 그것은 여러분보다는 우선 저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네요."


여자의 이야기는 지겨웠다. '틀림없는 관종일 테지. 자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것이 진취적이고 개방적인 삶이라니......' 채기는 지쳐갔다. 여행에서 출발하여 자기 다짐으로 환원되는 이야기는 여행 급급론자의 말로 들렸고 경제로 푸는 이야기는 잘난 척하는 놈으로 보였다. 가끔 회사의 모토를 들먹이는 자들도 있었는데, 그에게는 경험부족자로 보였다. 가장 거슬렸던 녀석은 에머슨의 말을 유창한 영어로 옮기며 'my superior! 저는 여러분에게 배울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라고 말한 자였다.  


그러나 이 불필요한 시간이 더욱 길게 느껴지는 것은 아직 자기 순서가 오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채기 아랫배 손을 올리며 이거 다시 화장실에 가야 하나 싶었을 그때, 시작할 때부터 눈에 띄는 외모를 지닌 여자가 지목을 받았다. 채기는 자신도 모르게 거북목을 들어 10시 방향에서 일어서는 여자를 쳐다봤다. 그녀의 외모는 단연 군계일학이었다.


 "많은 사람들 앞에 서봤지만, 언제나 긴장되네요. 동기 여러분 너무 반갑습니다. 저기 연단 위에 앉으신 분은 부장님이신가요? 이거 끝나고 우리 회식하는 거죠?"


웃음이 터졌다. 신입들은 양손으로 엄지를 들어 올리며 환호했다. 그런데 군계일학이 말을 이어나간지 5초 정도 지났을까? 넓지 않은 별실에 이상한 냄새가 풍기기 시작했다.

'아잇'하며 코를 가리며 낮은 비명을 흘리는 여자도 있다. 군계일학은 두 손으로 마이크를  잡고 말했다.


"자-자- 저에게 집중해 주세요. 한눈팔지 마시고 저를.. 어맛! 이게 무슨 냄새예요?"


그것은 이상한 냄새가 아니라 지독한 냄새였다. 채기 역시 냄새가 코에 닿는 순간, 뭔가 불길했다.

진행자가 나섰다.

"아-아- 이거, 저한테까지 왔어요! 아하하하! 우리 신입 중에 뿡뿡이가 있었군요! 여러분 10초만 동요합시다. 핫핫핫-!"


낭패였다. 사람들이 자신을 쳐다보는 것 같았다. 채기는 땀을 흘렸다. 좌우에 앉은 남녀 웃음을 참느라 어깨를 들썩였다. 채기 자신도 이렇게 지독한 방귀냄새는 경험한 적이 없었다.  


"누군지 모르지만 우리 뿡뿡이 덕분에 분위기가 확 좋아졌어요. 그렇죠 여러분-  아,, 정말, 이런 일이 다... 그래도 이분은 오늘 먹은 음식을  공개해야 합니다. 이건..  위험해요. 하하. 이런.. 저기 이유진 씨, 어떻게 계속하실 수 있겠어요? 방독면은 없어요. 하하"

"아니요. 호호. 말을 잇기가 어렵네요. 게다가 다 까먹었어요. 그냥 다음 분 지목할래요. 저기 앉으신 채기님! 학교 다닐 때 틀림없이 별명이 '재채기'였을 것 같네요. 설마 방귀대장 뿡뿡이는 아니죠?"


별실은 웃음꽃이 피었지만 채기는 도망치고 싶었다.

자신의 모교 K고 3학년 6반. 멀쩡한 친구였는데 인민군을 닮았다고 해서 졸업할 때까지 민군아~라고 불렸다. 역시 멀쩡했는데 입술이 두껍고 피부가 검다고 해서 부시맨이었고 그냥 얼굴이 검다고 해서 '연탄'으로 불린 친구도 있다. 그곳은 야생이었다.


채기는 웃음이 가득한 진행자에게 마이크를 건네받고 천천히 일어섰다. 모두의 눈길이 채기에게 쏠렸다.

'아냐 이건 신고식이고 저들은 나보다 어려.' 여자 친구도 껴들었다. '하긴, 자기는 나름의 깡다구가 있긴 하지.' 그는 직감으로 '제가 그런 것이 아닙니다.'라고 하는 것은 조직이나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이미 그를 이루는 세포막 하나하나는 붕괴되어 버렸지만,

그는 조금이라도 버티고 싶었다. 


"혼자 놀기의 진수를 보여드리겠습니다."




술이 몇 차례 돌았다. 군계일학은 폭탄주 제조에 나섰고, 채기는 술에 취해 그녀의 폭탄주를 앞에 두고 절을 했다. 부장은 채기를 일으켜 세우며 주변에게 다시 소개했다. 그리고 무슨 개뼈다귀 같은 혼자 놀기라며 술을 계속 권했 주변에서는 오빠, 형님 하며 노래를 권했다. 채기는 자신이 앞으로 이 회사에서 어떻게 불릴 것인지 알고 있었다. 오명은 받아들이되 깡다구를 보여줘야 했다. 

채기는 마이크를 들고 무대에 올라갔다.


"전산실의 뿡뿡이- 인사드려요-"

모두 환호했다. 그리고

'아라비안나이트'가 시작되었다.

 

이토록 뛰는 가슴

그때는 몰랐었네

내 마음에 꿈을 심은

환상의 아라비안 나이트

어제는 잊어버려

오늘을 사랑하네

내 마음에 꿈을 심은

환상의 아라비안 나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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