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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발 속 전화박스

[소품 小品 - 5 ]

by 노힐 Jan 21.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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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품-5 【눈발 속 전화박스】


덜컥 걱정이 되었어.

... 지하철을 타고 오면 돼.라고 했을 때.

아, 알겠어.라고는 했지만, 그 도시에 살면서 한 번도 지하철을 타본 적이 없거든. 몇 번 버스가 가는지도 몰랐고. 3년을 도시에 살면서 말이지. 하숙집과 학교. 하숙집과 영화관. 내가 다닌 곳은 그게 다가 아닐까 싶어.


내일 '아루바'에는 가지 못하겠다고 말하자 친구 녀석은 심드렁하게 말하더라. 입학 준비 같은 거 하는 거냐? 좋겠다. 나? 집에선 재수하지 마랜다. 취직하거나 군대 가야지. 그 말을 들었을 때 약간 두근거렸는데 역사 선생이 말했던 '네 놈들이 세상에 나가면...'이라고 했던 그거 때문이었을 거야. 천덕꾸러기 같았는데, 녀석이 어른처럼 느껴졌거든. 녀석이 다른 곳으로 가는구나. 나만 남겨진 느낌이었나봐.


그날 자전거를 타고 갔어. 응. 자전거를 타고 학교를 다녔어. 당신이 다니던 학교 앞을 지나다녔고. 야간자습 끝나면 새들을 높인 자전거에 엎드려 연화여고의 길고 높은 담장 옆을 달렸지 뭐야. 비가 올 때면 페달을 천천히 밟으며 바퀴가 아스팔트를 즈리는 소리를 즐겼지. 아니, 뭐 그렇게 까지야... 지나 보니 그랬다는 거지.

그날 당신 앞에 털썩 앉았을 때 입술 꼴이 그게 뭐냐는 핀잔을 들었는데,  기억나?  2월 찬바람을 한 시간 넘게 맞았고 그 카페를 찾는데도 한 시간이나 걸렸으니까. 여하튼 무척 추웠다. 그날.  아냐, 사실이야. 지금처럼 인터넷이 있었다면 모를까. 노선도 모르는 버스보다는 차라리 천변을 따라 '대명동' 이정표가 나올 때까지 밟으면 된다고 생각했나 봐. 아마 그랬을 거야.

들떴어. 다음 날을 걱정할 필요 없이 당신 손잡고 거리를 걸을 수 있겠다 싶었거든. 그리고 그 다음 날도 다음 날을 걱정할 필요 없이 다시 만나고. 우린 이제 어른이고 대학생이고 맥주도 마시고 청소년관람불가 영화도 볼 수도 있었겠지. 그럼, 당연하지! 우리에게 유예된, 세상 즐거운 것들이 곧 풀려나기 직전이었으니까.


...그건 기억이 안 나. 그렇지만 당신은 그날 의외로 초췌했고 즐겁게 보이지 않았으니까. 나도 김이 빠져서 집에 가고 싶었어. 돌아올 때는  사람들이 없는 천변을 달렸는데 더 추웠어. 이층 하숙방 앞에 자전거를 던져두고 방에 들어가니까 온몸이 와들와들 떨렸어.

학생, 대학 가면 기숙사 들어간다며? 이젠 자전거 필요 없지 않아? 주인 아주머니였어. 반찬은 별로였지만 나한테 잘해 주었지. 학생 이제 어른이네. 입학 축하해. 가끔 놀러 와. 형님이 섭섭해 하겠네. 응. 형님은 하숙집 아들이야.

바로 그날이었을 거야. 자전거를 타고 눈 발이 날리는 길을 달렸어. 연화여고 앞 공중전화에서 전화를 했지. 그래? 당신도 기억하지? 전화박스 안에는 다발에서 떨어진 꽃송이가 흩어져 있었어. 털이 달린 붓 같은 것도 있었고. 졸업 축하 꽃다발을 보면 그날이 생각 나. 전화박스 안으로 눈보라가 몰아쳤어. 당신은 재수를 위해 서울로 간다고 그랬어. 이제 연락은 안 될 거라고.

...뭐라 할 말이 없더군.


그날 밤은 잠을 이루지 못했지. 조촐한 송별식 중에, 형님이 준 술 탓도 있겠다 싶어. 어떤 감정, 감각, 내가 뭘 느끼고 있나? 무슨 생각이 들면 말이지, 내가 알 수 있었던 것은 가슴이 계속 뛰고 있다는 거였어.

다음 날 정든 하숙집을 나왔지. 자전거는 두고 왔어. 응? 아냐. 돈은 받지 않았어.  


"사랑해. 그때도 지금도."

"길게 말하는 거 싫어하는 거 알면서도... 말이 길었지?"

"긴 얘기는 싫지만, 괜찮아. 아직 시간 많아."

"오래전, 그땐 그랬어. "


그녀는 몸을 돌려 내 가슴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나도 알아... 봐, 지금도 가슴이 뛰고 있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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