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킷 13 공유 작가의 글을 SNS에 공유해보세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향 기

[ 소품 小品 - 6 ]

by 노힐 Mar 01. 2025
아래로

[소품 小品-6] 【 향 기 】



말라깽이가 술잔을 비우고 입술을 쓱 문질렀다.

"하필 붉은 술을 주문하다니 이거 남자에게 좋다는 술 아닙니까? 두 세잔 마시면 여자 생각이 나겠는데요?"

채기가 보기에는 이 말라깽이 젊은 친구는 경험도 부족해 보일 뿐만 아니라 천진한 면이 그대로 드러나는 스타일이었다. 비록 취중이긴 하지만 경솔한 말이 자꾸 신경 쓰였다.

"형님들 앞에서 말하기는 부끄럽지만, 저는 외로움이 많아요. 그만큼 여자도 많지요. 헤헤. 지금 여자 친구와 만나면서도 한동안 다른 여자를 사귀기도 했으니까요. 그런데 마음은 늘 허전합니다."

말라깽이는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는 여자와 함께 여행을 떠나게 된 이야기를 했다. 기억력은 비상해서 여행 중에 마신 음식과 술의 종류도 같이 늘어놓았다. 이야기가 얼마나 상세한여자의 외모와 말투까지 머릿속에 그려졌다. 살집이 있고 눈매가 시원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와 이야기하고 사진 찍고 배를 타고... 모든 게 순탄했어요. 밤에도 그랬어요. 베개를 짚고 그녀를 내려보면 그녀도 틀림없이 그 순간을 즐기며 행복해하는 것 같았어요. 저도 좋았어요. 그런데 마음이 허전했습니다. 시간이 멈췄으면 했지만 거리의 자동차를 보면 빨리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니까요. 그것 참."

채기는 자신이 말라깽이에 비해서 부족하다고 느껴졌만 그냥 한마디를 무심히 던졌다.

"이봐, 딴 건 모르겠고 5박 6일 여행이라니, 난 그냥 부럽기만 한데 뭘 그래. 비용도 꽤 들었겠군."


"그건 외로움이 아니지. 불안 같은데."

은殷이 안경을 벗고 손등으로 눈을 문지르며 말했다. 채기는  은殷의 어두운 눈매에 꼬리가 살짝 위로 향한 것에서 약간의 장난기를 느꼈다.

"그건 네가 불안하기 때문이야. 뭐라고? 응, 그렇긴 하지. 미래는 예측 불가니까. 내가 말하는 건, 너 모습에 대한 너의 불안을 말하는 거야."

"모습은 이만하면 괜찮지 않나요? 하하하, 채기형! 뭔 말인지 통역이 필요합니다."

말라깽이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응응... 나도 잘..."

"내가 볼 때는 상대가 너를 알아볼까 봐 불안한 걸로 보여. 말라깽이가 어떤 사람인지, 네가 생각하는 너의 본모습을 여자가 눈치챌까 불안한 거지. 자기의 본모습을 알게 되면 여자는 떠날 것이라는 생각도 그렇지만, 그보다는 본모습을 숨길 자신이 없는 거야."

은殷은 술잔을 건네며 쾌활하게 웃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뭐 그렇게 고개를 삐딱하게 볼 필요 없어. 그냥 넘겨짚어 봤어. 어. 쩐. 지. 말라깽이는 그런 인류일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어. 과 여유는 부럽구만."

채기는 말라깽이의 잔에 술을 채웠다. 셋 만 모인 것은 처음이지만 어색하지는 않았다. 몇 명만 더 왔으면 런 이야기는 불가능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은형, 말라깽이 본모습이 뭐죠?"

"몰라. 말라깽이가 알겠지.... 호색한. 하하하"

"맞아요. 맞아. 제가 좀 밝히긴 해요. 하하 "

"나 원.. 우리 조직에서 그거 모르는 사람이 있나요?"

채기는 은殷에 대해서 별로 아는 것이 없었다. 처음 모임에 왔을 때 성에 쓰는 한자가 '거북 채'로 쓰인다는 것을 알고 몇 차례 장난을 건 적이 있었다.

'우리네 선조가 자네 부족을 많이 잡아먹었지. 효험이 좋았거든.‘

은殷에 대한 소문이 있기는 했지만 채기가 믿을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은행장의 아들이라거나, 국정원에 있었다거나, 출가한 적이 있다거나 하는 등등...


은殷은 술병을 흔들어 본 다음 채기의 잔을 채웠다.

"이 상처 보여? 그래? 안 보여?... 오래되어서 희미해졌나 보네. 한 4,5개월은 바닷가에를 머문 적이 있네. 그시절엔 '다방'이라고 하는 곳이 있었다고. 겨울에는 보리차 냄새가 가득한 곳이지. 다방에 일하는 여자에게 끌려 거의 매일 밤 다방을 찾았어. 갈 때마다 볼 수는 없었지만 일주일에 두, 세 번은 얼굴을 볼 수 있었지.  나는 온갖 말로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했다네. 결국 데이트 약속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어.

그날 밤에는 항구에 정박 중인 배가 한 척도 없었어. 이유는 몰라. 파도도 잔잔했는데 배가 없으니까 바다가 넓은 공터 같더라구. 장판 같은 바다 위에 뜬 차가운 달이라니. 비현실적이었지. 그녀와 나는 낚시꾼들을 피해서 항구 모퉁이, 테라포트 무더기가 시작되는 곳 근처에 갔지. 거기선 테라포트를 '각돌'이라고 해. 서로 얽힌 각돌바다 속으로  잠긴 것을 보면 겁이 나. 그런데 알 게 뭐람. 취한 데다가 그 여자를 안고 싶은 생각뿐이었으니까. 잠시의 포옹 후에 키스를 했지. 그녀는 조심스럽게 받아주더라고. 내손이 그녀의 치마를 걷어올렸지. 치마가 몇 겹이나 되었는지 꽤 두껍고 무거워서 주섬거리다가 끝내 거기에 닿았어. 뭔 말인지 알지?"

"아.. 네."

채기는 자기 목소리 끝이 살짝 흐렸다는 것을 느꼈다. 말라깽이는 쿠션을 껴안고 잠이 들어 있었다. 은殷은 말을 이었다.

"곧 찾아올 촉감의 기대 때문에 몸이 굳었나 봐. 그녀는 허리를 살짝 틀었는데. 나는 그만 아찔해져서 중심을 잃고 말았지 뭐야..."

"중심을 잃다니요?"

"말 그대로야. 비척거리다가 물에 빠지고 말았지. 하하. 우라질!"

"저런 저런!! 어떻게 그런 일이!"

"겨울 바다가 얼마나 찬 지 알어? 헤엄은 칠 줄 알았지만, 공포심에 허우적거렸어. 허우적거릴 수록 무서움이 더했지. 낚시꾼이 내민 낚싯대를 잡고 올라오다가 각돌에 미끄러졌어. 각돌에 붙어사는 따개비에 왼쪽 뺨이 찢어지기까지 했다네. 맙소사."

"어이쿠...!"

은(殷)은 표정이 신중해지더니 술을 한잔 들이켰다. 안주를 휘적이다가 고기는 먹지 않고 기름이 떨어지는 녹색 야채를 한가닥 집어서 조금 먹고 바로 내려놓았다.

"추했어.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면서 공포에 질린 표정이라니. 젊은 나이도 아니었는데 말이야. 그녀가 내 표정을 봤다고 생각하니까 견딜 수가 없었어. 나 참... 그러나 깨달음은 있었다네. 바닷가는 언제나 위험하다! 그거지. 하하하! 나무관세음보살!"


종업원이 와서 빈 접시를 챙겼다. 어디서 비누향이 났다. 은(殷)은 고추 절임추가로 주문했다.

"이거 고추 색깔 그대로 살아 있것이죠?"

"그럼요, 맛이 좋아요."

"아니, 머리 감았어요? 샴푸냄새가....?"

"한밤에 머리는 안 감죠. 좀 전에 손을 씻어서 그런가 봐요."

종업원은 샐쭉거리는 표정으로 빈 접시를 들고 갔다.

"그래서 그 여자분과는 어떻게?"

"어떻게 되긴. ’그냥 여관에 가자고 하지 그랬어요.‘라고 하더라. 그 후로 서로 잘 지냈지. 내가 그 마을을 떠나기 전에 그녀가 먼저 떠났어. 어느 날 갔더니 일을 그만뒀다고 하더라."

고추 절임맛이 있었다. 식감이 살아있끄트머리는 쫄깃해서 서로 입을 오물거리는 모습을 보며 역시 주문을 잘한 것이라고 했다.

"채기는 우리 모임 중에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나?"

"없어요. 나 같은 샌님에게 누가 마음을 두겠습니까. 형님처럼 바닷가에서 좋은 여자를 만나면 주접이라도 떨겠지만요. 하하"

"응? 주접? 이봐, 채기군. 내가 취한 건 맞지만 굳이 '사랑'이라는 말을 쓰지 않아서 그런 건가? 말라깽이의 불안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고 우적 댄 수치는 결코 잊히지 않는 것이라네. 하지만 결국은 욕정이지. 《여인의 향기》에서 탱고 장면이나 징계위원회 연설을 명장면으로 꼽곤 하지만 나는 프랭크 슬레이드 대령의 다른 대사를 주목한다네. 대령이..."

"중령입니다."

"아, 중령이었던가? 역시 샌님 소리를 들을만하군."

채기는 조금 기분이 상했다. 샌님을 자칭할 때는 몰랐는데 다른 사람이 지칭하자 본모습을 들킨 것 같았기 때문이다.

"중령이 여자의 몸을 설명하는 장면이 있어. 그는 천국으로 가는 길이라고 했지. 아주 노골적으로. 나는 그래서 중령의 입이 인류의 반, 남성을 대신하고, 남성의 불행을 말했다고 봐. 거기에 사랑이니 연애니 했다면 재미가 없었을 거야"

"재미? 그건 영화에 불과하니까 그런겁니다."

"누가 뭐래? 영화 맞어. 비슷해. 《여인의 향기》가 아니라도 채기 군은 언젠가 알게 될 거라고 봐. 여인의 향기를 말했다지만, 그건 감추기 위해서야. 물타기지. 당신의 향수는...? 하고 말이지. 그래봤자 자고 싶다는 거 아닌가? 남자는 다 비슷해. 결국에는 허생원으로 남을 것이 뻔해."

"그럼 여자는요? 허생원도 있지만 성서방네 처녀도 있어요."

"아니 우리가 논쟁 중인 것은 아닌데, 갑자기 욱하는 것은 또 뭐지? 풋."

 殷은 몸을 숙이며 안경을 고쳐 썼다. 그리고 말투를 고쳐 말했다.

"채기 군도 한번 얘기해 보오. 내 들어줌세." 


 {        

'채기, 자취방이 여기서 멀지 않지? 영화관에 가기 전에 좀 씻고 싶은데. 오늘따라 푹푹 찌네.'

채기는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나 분명히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갑자기 머릿속이 꽉 찼는지 바늘 하나도 들어갈 여지가 없어 다음 단계로 생각이 옮겨지지 않았다.  

'편의점에서 시원한 맥주도 사가자. 시간이 많이 남잖아.'

8월의 오후 두 시. 땀에 흠뻑 젖어 채기는 대문을 열고 대리석 계단 옆을 조심스럽게 걸었다. 그녀도 허리를 조금 숙이고 주인집의 눈치를 보며 채기 뒤를 따랐다. 베니어판을 붙여 만든 펄럭문에 걸린 열쇠를 번호를 돌려 열고 채기는 그녀를 안으로 안내했다.  연탄아궁이에 붙은 계단에 신발을 벗고 방으로 올라섰다. 방안에는  낡은 커튼이 햇빛에 달구어지고 있었다. 선풍기를 켜자 강한 담배냄새가 함께 돌기 시작했다. 채기는 이불을 치우면서 말했다.


'이리로 와. 선풍기 앞에 앉어. 맥주 지금 마실래?'

'아니 씻고 마시는 게 좋다. 어디서 씻으면 돼?'

'아궁이 옆으로 가면 돼. 위에 샤워기가 붙어 있어. 왼쪽으로 돌면 바로 남은 연탄이 쌓여 있는데, 거기에 물 안 튀게 조심...'

그녀는 말이 끝나기 전에 방을 나갔다. 잠시 뒤에 청바지의 허리띠를 푸는 소리가 들리더니 샤워기에서 물이 내리기 시작했다. 채기는 서둘러 방을 치우며 맥주를 따서 몇 모금을 마셨다. 그리고 벽에 등을 붙이고 담배를 피웠다.손가락 사이의 담배가 덜덜 떨렸다. 채기는 그녀와 이렇게 있어도 되는 것인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생각하려 애썼지만 물소리만 차분하게 들렸다. 담배를 비벼 끄는 순간, 밖에서 톡, 톡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아궁이가 있는 통로 벽 쪽에 붙은, 골목으로 나있는 가로세로 두 뼘쯤 되는 유리창에 작은 돌이 부딪는 소리였다. 채기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런 제길!'


- 채기형! 채기형!

늘 밤늦게 술에 취해 오거나 돈을 빌리러 오는 후배 녀석인데, 한낮에 오는 것은 처음이었다.

- 채기형! 안에 있어요?

녀석은 쉽게 물러설 것 같지 않았다. 채기는 녀석을 우선 돌려보내야 할 것 같아서 돈을 주머니에 구겨 넣고 방문을 열고 계단으로 내려섰다. 그때였다.

'어맛!'

여인의 나신이 통로 왼쪽으로 후다닥 사라졌다. 그녀는 아궁이와 샤워기 사이의 비닐 커튼 닫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일까 통로에는 비누향이 가득했다. 채기는 잠깐 멍했지만 간유리에 다시 톡!하는 소리가 나자 신발을 꺾어 신고 밖으로 뛰어 나갔다. 후배 녀석에게는 시골에서 선배가 찾아왔다고 둘러댔다. 녀석이 바로 가지 않아서 같이 담배를 한대  피워야 했다. 방에 다시 들어갔을 때, 그녀는 젖은 머리를 선풍기에 말리며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리고 채기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 씻어도 금세 땀이 흐르네. 가 왔나봐? 이런.. 차라리 그냥 영화관 안에서 시간 보낼까?'

}



"우하하핫!"

은(殷)은 배를 잡고  웃었다. 그럼 그렇지! 우린 고려의 후손이 맞아! 그럼 그렇고 말고!

정말 재밌는 이야기네! 은(殷)은 손을 내밀어 악수까지 청했다.

"샌님도 보통 샌님은 아닐 줄 알았다니까. 이거야 말로 '버들은 가지마다 푸르고, 도화는 송이마다 붉다'는 말이네. 푸르고 붉은 젊음이라네. 비록 허생원만큼 낭만적이진 않지만."

"후훗... 그런가요? 전 갑자기 추억 소환이 되어서 갑자기 우울해지는데요? 제가 쓰는 비누인데 그런 향기인지 몰랐어요. 뭐라 표현할 수 없는 향기가...."

"그녀의 나신은 어땠어? 낄낄.. 이봐, 채기군. 혹시 달달박박과 노힐부득의 이야기 들어봤어?"

"뭔 제목이..."

"이야기를 모르는군. 아까워, 관음보살을 만날 뻔했는데. 푸하하핫! 이젠 샌님이라 하지 않을테니 우리 종종 얘기하자고. 내 예상이 맞다면, 그날 이후 얘기도 있을 것 같네."

"아뇨, 없습니다. 그녀와는 더는 만날 일이 없어요."

"거봐, 결국 관음보살을 만났다는 뜻인거군."

    

그때 말라깽이가 깨어나며 말했다.

"아니 안깨우고 뭣했어요? 지금 몇 시예요?"




keyword
이전 05화 눈발 속 전화박스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