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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신

[소품 小品-8]

by 노힐 Mar 19. 2025

[소품 小品-8]

【 답신 】


여기도 눈이 내렸다네.

이틀 전에 내린 눈은 백설기 같아서 눈 쌓인 머리가 바람에 날더니 오늘 내린 눈은 눅찐한 것이 가슴을 짓누르는 무게감이 있어. 역시 방송에서도  '무거운 눈'이라고 하더라. 적절한 표현 같아.

그렇지만 자네가 보내 준 사진에 비할 바는 아니지.  한 번도 북해도에 가본 적은 없지만 실제로 보면 대단한 광경이겠지? 《설국》보다 더 설국이겠지?  니가타현보다 더 북쪽이 아닌가. 북해도. 

일본은 한 번도 가본 적은 없지만 '나가타', '후쿠오카', '이바라키' 라고 하면 그 어느 먼 나라보다 훨씬 이국적인 느낌이나. 사람들 어떨까. 부끄러운 듯 친절한 여자들과 목에 힘을 주지만 예의가 바른 남자들이 있을 것 같아. 사무라이가 든 칼 앞에서도 예의를 바르게 하면 어쩐지 목숨을 구할 수 있을 것 같은. 한 번도 일본이란 나라에 가 본 적이 없어. 일본인을 만난 적도 없지.


그 사진. 아름다운 자네의 설국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와는 같은 시공이 아니라는 부재증명인지, 나는 모르겠네. 그렇지만 그 사진 덕에 눈과 마음의 씻김이 된 것 같아. 설국, 먼 산 너머의 신계神界. 살아있는 것이라곤 눈 덮인 산등성이를 넘어가는 차가운 바람뿐이라는 듯, 그 아래 모든 것들이 순백무구의 바람 아래  엎드려 숨죽이고 있. 순백.

그렇지만 이 말은 해야겠네. 나 역시 자네의 시공엔 부재중이야. 나는 여기 남겨졌고 선택권이 없다네. 어쩌면 자네는 내가 외롭기를 바라는 것 같아.


어린 시절 그 마을에도 눈은 내렸다네.  공장의 굴뚝 연기는 대개는 검은색이었는데 어떤 날은 흰색이었어. 무거운 공기 탓인지, 연기의 무게 탓인지, 그와는 상관없는 안개 때문인지 동네에 자욱한 연기가 끼면 전깃줄에 앉은 참새들도 보이지가 않았어. 거기에 무거운 눈까지 내리면 마을은 육중한 침묵에 빠져들지. 눈이 녹기도 전에 그 위에 다시 눈이 내리고 그것들이 조금씩 녹으면 골목과 시장통은 한밤의 은밀함 같이 질척거렸어.

바다가 가까운 곳도 아닌데 시장은 말이야, 연탄재, 강철, 어른들의 묵은 때의 냄새와 차가운 비린내가 얽혔지. 생선 가게에는 뻣뻣하게 등이 굽은 생선이 눈을 크게 뜨고 있, 생선을 사러 온 할머니들 앞에 놓인 고무통에 두꺼운 도마에서 잘린 생선 대가리가 휙휙 쓸려갔어. 흐르는 핏물을 피해 뒤꿈치 들고 지나가봤자 낡은 운동화엔 늘 물이 스며들었지. 양말은 연한 분홍빛이 들었어.

눈은 순백으로 쌓 질척이는 소리로 변해. 어떤가? 우리가 연속적인 시공에 존재하고 있다면 자네와 나는 확실히 상호 부재중이라고 할만하지.


그녀는 잘 지내고 있는가?

자네의 메일을 받고 답신을 보내야 할지 그냥 둬야 할지 고민을 했다네. 우린 더 이상 젊은이도 아니고 질투보다는 회한(恨)이 문제가 되는 시즌 아니겠는가.    

그래서 말하건대, 그녀가 갖고 있는 헤드폰은 내가 선물한 것이 맞아. 그 헤드폰을 아직 갖고 있는 줄은 몰랐네. 옛 애인을 추억하기보다는 그녀의 알뜰한 성격 때문일 걸세. 틀림없을 거야. 자네가 고통받을 하등의 이유가 없다네. 나는 여기에 있고 자네는 그녀와 있지 않나. 내가 엄두도 내지 못할 순백의 장소에 그녀와 함께 있으니 자네같은 부자(富子)에겐 질투보다는 소유가 어울려.

 사실, 그녀는 자네의 명석함과 미래지향적인 태도를 칭찬했지. 자네가 그녀와 만나고 있다고 말하지 않았어도 난 이미 알고 있었어. 언젠가 모임에서 그녀는 자네의 맞은편에 앉아 '아니 얼굴색과 어울리지도 않는 목도리고 하고 있네! 애인이 선물한 것이로군!'이라고 하니까 자네는 ' 하긴, 밤에만 봤으니까.'라고 하지 않았나. 나는 그때 목도리그녀의 선물이라는 것을 알았지.  다행이잖아. 승에서 결로 뛰어넘어도 자연스러운 것이. 

그렇지만

가끔 새벽에 깨어나면 아직도 그녀를 욕망해. 나의 세계에선 그래. 그러나 그뿐이야. '욕망'이란 단어가 없었다면 난 그저 희미한 기억이라고 했을 테지.


잘 지내기를 바래. 안녕.

너의 오랜 친구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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