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저리 헤맨 사람의 레시피
우리 셋은 무거운 어둠이 내리고 있는 보도 위를 넓은 보폭으로 걷고 있었다. 파리의 팔라스 등급 호텔의 레스토랑에 예약해 놓은 저녁 식사를 하러 가는 길이었다. 파리에서 오픈한지 1년 만에 미슐랭 2스타를 받으며 주목받은, 클래식하고 절제된 미의 음식을 내는 곳이었다. 호텔의 정문을 비추는 붉은 빛이 희미하게 보일 만큼 가까워졌을 때 S가 걸음을 멈추더니 ‘잠시만’ 하고 말했고 우리는 가로등이 만들어낸 노란 원 위에 멈춰서서 비밀스러운 웃음을 터트렸다. 남자인 S는 가방을 열어 조금 더 격식을 차린 윗옷으로 갈아입었고, 여자인 우리 둘은 괜히 머리 모양을 매만지고 어둠만 비치는 거울을 들여다보며 더듬더듬 립스틱을 바르는 둥 형식을 갖춘 장소에 어울리는 행색을 갖추기 위한 나름의 의식을 치렀다.
이 건물 안에서 일을 한지 벌써 반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정문을 통해 들어가는 것은 인턴십 인터뷰를 위해 처음 방문했을 때를 제외하면 처음이었다. 기대에 부푼 마음으로 호텔에 도착하자 우리와는 비교도 안 되게 멀끔하게 차려입은 직원들이 능숙한 동작으로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 곧이어 남자인 S에게 정식 복장을 갖추지 않은 남자 손님은 레스토랑에 출입할 수 없다며 자신들이 준비해놓은 정장자켓으로 갈아입을 것을 권했다. 나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터져 나오는 웃음을 온 힘을 다해 참아야 했다. 이곳의 기준에 비하면 우리가 흉내 낸 격식은 격식도 아니었던 것이다.
자리를 안내받고 주문을 마친 후 친구가 처음으로 꺼낸 말은 오늘은 내가 타지에서 인턴십을 마친 걸 기념하려고 방문하게 되었지만 우리가 이런 곳에 식사를 하러 오기엔 너무 이른 느낌이 든다는 것이었다. 여럿이 자신의 삶을 바쳐 만들어놓은 화려하고 거대한 세계의 일부가 되어 일해보는 것은 특별한 경험이었다. 하지만 역시 무언가 축하할 일이 있을 때가 아니면 이런 곳에 앉아 식사를 하고 있는 일은 우스꽝스럽게 느껴지는 것이다. 나는 일주일 전만 해도 하나 하나의 요리들이 재료에서부터 시작해 자신의 단점을 하나 둘 깎아내고 장점을 살려 빛을 내는 일을 거쳐 테이블 위에 선보이기까지의 과정을 속속들이 알고있는 내부자였다. 나는 그날 저녁 내내 이 레스토랑에 침투한 비밀 결사대의 일원이 된 것만 같았다.
우리는 항상 주변의 사물과 관계 맺어야 하는 운명을 타고 났지만, 그 운명이 망신스러워 질 때는 자기 주변의 사물과 자기 자신의 값을 동일시 할 때 인 것 같다. 과정을 경험해보면 간단 명료하게 알 수 있는 것을 의자에 앉아 맛만 보고는 이게 무어다 뭣이다 맞춰보려는 시도는 흡사 눈먼 사람의 더듬기 같다. 어떤 훌륭한 맛이 탄생하는 과정은 그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우선 그 계절에 가장 좋은 맛을 내는 재료를 찾고, 그 재료의 맛을 가장 최고로 끌어올릴 수 있는 방법을 이렇게 저렇게 연구해보면 그만인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 옆 테이블에 앉은 흰 머리의 노부부는 이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애송이들이 와 있다는 듯 기분 나쁜 티를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후식으로 나온 초콜렛을 먹으며 신음소릴 내는 모습을 보는 내 눈에는 그의 입으로 들어간 음식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그걸 만들어 내는 동료들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이다. 비슷한 때 한국의 한 미식 평론가가 설탕을 써서 맛을 내는 한식 문화를 비판하며 파인다이닝의 주방에는 설탕이 없다는 소릴 공개적으로 했었다. 그가 단 하루만 주방에서 일을 해 보았다면 파인다이닝의 주방에는 설탕은 포대로 쌓여있고 꿀도 바께쓰로 마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나는 바보같을 정도로 열심히 일했다. 배우는데 너무 진지하게 임했기에 주방 내부에서 핸드폰을 한 번 들여다 본 적도 없었다. 그 말인즉슨, 보이는 것이 전부인 것처럼 보이는 요즈음 내 친구들은 내가 보낸 시간과 경험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이 하나도 없다는 말이었다. 그 안에서 나는 하루 10시간이라는 시간동안 쉴 새 없이 달렸다. 나는 말도 안되는 실수도 많이 저질렀지만 재료를 일정하게 자르는 일에도 음식의 모양을 살려 담는 일에도 점점 능숙해져 갔다. 그런데 이렇게 매일 10시간씩 어떤 일을 계속 한다면 사실 무슨 일이든지 잘 하게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차피 하루에 10시간이 넘게 일해야 한다면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해서 훌륭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하루 중 가장 긴 시간을 어떤 일을 하면서 보내게 된다면 그게 다른 무엇보다 나라는 사람을 만들어 갈 틀이 될 것이라는 것도 예상해야 했다. 흔히들 말하는 자아실현은 나중에 하고 세상과 타협하라는 말은 실은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다. 우리가 매일 하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자기실현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내가 하는 일이, 내가 하루 중 시간을 보내는 장소가,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가 내가 먹고 마시는 음식과 음료처럼 나라는 사람의 물질을 구성하고 만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다음날 우리는 평소의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다시 만났다.
캐주얼한 식당에서 봄의 샐러드로 점심식사를 함께 했다.
아임 낫 파인 다이닝
잠깐 걸쳤던
옷을 다시 벗으면서
놀이가 끝난다.
놀이가 끝나면 어떻게 되지?
이제 그만 모험을 끝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