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피로는 갑상선 때문이었어

갑상선암 일기 2

by 새벽숨

피검사 결과를 보았다. 병원에서 일해도 이런 전문적인 수치에 대해서는 까막눈이므로 임병선생님이 하나 하나 설명해 주셨는데, 일단 염증수치는 낮고 간 수치도 정상이었다. 하지만 빨갛게 보이는 항목들, tsh, T3, T4. 아직도 잘 모르지만 어쨌든 남들보다 수 십배는 높거나 낮았다. 고령 환자 분들에게서도 쉽게 볼 수 없었던 수치이며 갑상선 전문 내과로 가보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소견이었다. 일단 피곤함의 원인은 알았으니 기분이 좋았다. 임병선생님께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산뜻한 마음으로 일을 쉬는 주말에 가볼 내과를 알아보았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대부분인 곳에서 보릿자루마냥 꽂혀있는 내가 조금 우스웠지만 참에 잘 됐다 싶었다. 내 피곤함을 당당하게 표현할 수 있는 이유가 생긴 것 아닌가. 그동안 잠도 잘 자고 고된 노동을 하는 것도 아닌데 왜 피곤한지에 대해 말할 수 없었다. 업무 중간에도 잠이 오는 것은 성실하지 못하다는 것을 뜻하는 듯하여 화장실, 탈의실에서 5분 정도 몰래 자는 날이 점점 많아졌는데, 이제야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난 불성실한 것이 아냐! 그냥 몸에 이상이 좀 있는 거야!" 검사결과에 대해 '내가 어쩔 수 없이 졸고 있다는 것을 해명'하는 것에만 의미를 두었을 뿐 내 몸에 켜진 빨간불이 얼마나 짙은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새벽씨, 들어오세요."


진료실로 들어가 의사께 피검사 결과를 보여 드렸다. 살이 찌지 않았냐고 물어보셨지만 취업 후 줄곧 빠지기만 했다고 말씀드렸다. 의아한 듯 날 보시더니 설명하시길, 지금 난 갑상선기능저하증이고 남들보다 피로한 것은 물론 추위에 약하고 적게 먹고도 살이 찌는 상태라고. 이름도 긴 저 병명을 한번에 알아듣지 못했고 그냥 몸에 이상이 있구나 정도로 이해했다. 그리고 초음파 검사를 한 후 다시 진료를 보았다. 선생님은 내 쪽으로 모니터를 돌려 주시며 말씀하셨다.




"지금 보시면 아시겠지만 갑상선 안에 혹 같은 게 보여요."


"아, 네."


"보통 혹이 있으면 95%는 양성이에요. 길 가다가 지나가는 여성 분들 대부분이 이런 혹은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혹이 있는 사람들 중에서 5%는 악성종양일 수 있거든요. 양에 따라서 대충 판별이 가능한데 일단 조직검사는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목에 긴 바늘을 넣어서 검사해야 하는데, 별 거 아니겠지만 혹시나 해서 하는 거니까 걱정하진 마시구요."




뭐가 복잡해졌다. 원래 진료를 다 본 후 약속이 있었다. 대학생 때 서울에서 1년간 미디어 쪽으로 공부하면서 알게 된 은사님이 계신다. 업무차 잠깐 부산에 내려오셨다가 서울로 돌아가시 전, 날 잠깐 만나주시기로 하신 것이다. 여유있게 병원에 왔지만 예상치 못한 검사가 추가되는 바람에 까딱하다가는 약속 시간에 늦을 것 같았다. 그래서 미리 문자를 드렸다.


< 선생님, 사실은 제가 지금 병원인데요. 검사가 조금 추가되어서요 ^^;; 늦어질 것 같으면 다시 연락드릴게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죄송해요ㅠ >


서울에서 오신 선생님을 기다리게 할 순 없었다. 초조한 마음으로 검사를 기다렸다.


"새벽씨, 들어오세요."


오늘 참 여러 번 내 이름이 불리는구나. 검사실로 들어갔는데 치과 의자같은 곳에 앉으란다. 그리고 왼쪽으로 고개를 돌린 후 침을 삼키면 안 된다는 주의를 받았다. 아무런 긴장도 없던 그때, 내 시야에 들어온 '너무나 긴 바늘'. 순간 바늘을 따라 시선이 움직이면서 '아, 아까 목에 긴 바늘을 넣는다고 했었지'하며 마음의 준비를 안 한 심장이 갑자기 떨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저렇게 긴 바늘을 넣으면 목을 그대로 통과할 것 같은데', '긴장해서 담 오는 거 아니야?' 등의 생각이 지나가는데,


흡!



아프진 않았지만 당황스러웠다. 등에 침 한 번 제대로 맞은 적 없는 내 몸에, 그것도 목에 저렇게 긴 바늘이 들어오다니. 눈을 뜨고 있기도 뭣해서 감고 있었는데 바늘이 이리저리 움직인 것 같다. 그래, 조직검사이니 갑상선 조직을 건지려면 여기저기를 건드려야 하겠지. 눈을 감은 터라 더 적나라하게 느껴진 목을 뚫은 바늘의 감촉. 또 경험하고 싶진 않은 편함이었다.


검사 결과는 다음 주에 나오지만 나는 토요일 격주 근무를 하는 병원 근로자이므로 2주 후에나 예약이 가능했다. 왜 병원들은 주말에 오후 근무를 하지 않는 것인가 의문을 품었다가 그럼 내 근무시간도 동시에 늘어나는 것이므로 당장 마음을 접고, 격주 근무를 감사히 받아들이며 2주 후에 검사 결과를 확인하기로 했다.


병원을 나선 후 부랴부랴 부산역까지 지하철을 타고 갔다. 다행히 내가 먼저 도착했고 검사를 받은 사실조차 잊을만큼 선생님과 수다를 떨었다. 그만큼 갑상선 질환이란 내게 아무런 타격을 주지 않았다. 오히려 내 피곤함을 설명할 수 있게 해줘서 고마웠을지도 모른다.




모니터 앞에서 신명나게 졸아버린 2주를 보낸 후 검사 결과를 확인하러 병원에 내원했다. 내 황금같은 놀토를 이렇게 병원에 쏟아붓는 것이 얼마나 아까운지 모른다. 회사를 다니면서 주말이 더 귀해졌고 그런 주말을 앗아가는 병원 스케줄은 더 싫어졌다. 가장 싫은 것은 오전근무만 하는 병원에 가야할 때면 늦잠도 포기해야 하는 것이다.


내 이름이 불렸다. 진료실로 들어갔지만 의사선생님은 날 쳐다보시지 않았다. 다만 "검사 결과가 나왔는데요."고 하시며 니터를 보여주실 뿐이었다. 선생님의 눈 대신 모니터를 보면서 검사 결과를 듣는데, 이게 지금 나에게 하는 말인지 버스에서 흘러나오는 라디오 뉴스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현실성이 없었다. 검사 결과가 충격적이어서가 아니라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가 그저 방송되는 것 같이 느껴졌다. 분명 이야기의 주제는 내 사생활과 밀접한 것임에도 화자는 나와 유대감이 없었고, 꽤 중대한 이야기인 것 같은데도 오늘 먹은 점심 메뉴를 이야기하는 것과 같은 비중으로 언급되고 있었다. 진료실에서 나를 뺀 모두가 내 암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 때의 내 눈동자는 무념한 회샛빛이 아니었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