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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국 필 때

제주일상 그림일기 7

by Lara 유현정 Jul 09. 2022



자매간의 경쟁 심리가 이번엔 나를 강타했다. 동생에게 질세라 집안 정리를 시작한 것이다. 야무지게도 동생은 미니멀 라이프를 추구하며 가구와 가전 없이 제주살이를 하겠노라 선언한 상태였다. 그러던 어느 날 잠시 동생집 거실 바닥에 퍼질러 앉아 찐 감자를 나눠먹는데, 바깥 풍경이 새롭게 다가왔다. 아파트 앞 귤밭이 마치 내 집 정원처럼 가까이 느껴지는 게 아닌가. 한 층 아래에 입식이 좌식으로 바뀐 것뿐인데 말이다. 먼지가 켜켜이 쌓여 있던 집은 동생의 손길로 어느새 깔끔하게 변모해 있었고, 가구가 없는 텅 빈 집안은 기의 소통이 원활해서인지 묘한 매력을 발산했다.


나도 따라 할 테야!


동생에게 자극을 받은 나는 마음이 바빠졌다. 먼저 답답하게 공간을 가로막던 거실과 주방의 문을 떼어내고, 베란다를 청소다. 그러자 시야가 트이면서 공간의 넓이가 배쯤 넓게 느껴졌다. 식탁의 배치도 90도 돌려 았다. 그림을 그리면서 바다를 틈틈이 바라볼 수 있게 되어 매우 흡족했다. 맘에 들지 않는 투박한 원목 렌지대는 당근 마켓에 나눔 하고, 슬림한 가구를 들였다. 칼라가 화이트로 통일되면서 주방도 한결 깔끔해졌다. 망가진 안락의자 분해해서 버리고, 가벼운 접이식을 들여놓으니 언제든 치울 수 있어서 가뿐했다.


누군들 그렇지 않겠냐마는, 나도 제주살이 초기에는 미니멀리스트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나도 모르게 하나씩 늘어난 살림이 켜켜이 쌓인 이다. 물론 청소는 기본으로 한다. 매일 청소기를 돌리고 밀대로 먼지를 닦아낸다. 그렇게 청결을 유지하는 것으로 위안을 삼지만, 갈수록 물건이 넘쳐난다는 사실은 진즉 인지하고 있었다. 언젠가는 정리해야지 하며 미루고 있던 참에, 동생이 게으른 언니를 향해 방아쇠를 당긴 것이다.


그렇게 집을 어느 정도 치우고 나서 친구들이 우리집을 방문했다. 서울서 오랜 짐을 안고 사는 그녀들은, 집의 간소함에 놀라워했다. 사실은 아직도 버려야 할 것들이 여기저기 숨어 있는데, 그들 눈을 피해 간 것이리라. 비록 낡고 작은 집이지만, 잠깐 상상력을 보태자 활짝 열어젖힌 베란다 창으로 시야 태평양까지 확장되었다. 그날따라 하늘빛을 닮은 바다가 파랗게 부서지며  해풍이 집 안팎으로 자유롭들락거렸다. 그녀들은 답답한 마음을 시원하게 날렸고, 나의 삶도 한결 가벼워졌다.


온통 푸른 서귀포 풍경


<그림 1> 사려니 숲 가수기목


6월의 어느 이른 아침,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홀로 차를 몰았다. 사려니 숲 때죽나무 꽃들의 종소리가 밤새 나를 깨우던 날이었다. 더 이상 누군가와 시간을 맞추며 기다릴 수가 없었다. 그날은 날이 잔뜩 흐렸는데, 사려니에 도착하니 부슬부슬 보슬비가 뿌렸다. 아직은 관광객들이 움직이기 전이었지만, 한 무리의 부지런한 일행이 옥타브를 높이 숲의 적막을 깨고 있었다. 나는 우산을 펴 들고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인적이 사라진 숲은 안개가 피어오르며 몽롱한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제주사람들은 때죽나무를 종낭이라고 불렀다. 언젠가 우연히 종낭을 처음 만난 날, 사려니 숲에서는 마침 종낭 꽃들의 잔치가 열리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작고 향기로운 종을 종종종 매달고, 땅을 향해 수줍게 미소 짓고 있었다. 그들은 오리 십리나 되는 숲길을 지치지도 않고 줄지어 서서, 작은 종을 앙증맞게 흔들어댔다. 비슷한 시기에 함께 피고 지는 산딸나무 꽃들이, 하늘을 향해 고개를 꼿꼿이 쳐드는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그렇게 귀를 간질이던 종낭의 종소리는 뎅그렁뎅그렁 사려니 숲을 가득 채우고도 모자라, 내 속으로 흘러들었다. 종소리는 겨우내 깊은 곳에서 잠을 자고 있다가도, 여름의 초입에서 나를 흔들어 깨우는 것이. 나는 해마다 6월이면 그 종소리의 부름을 듣는다. 그러나 그날은 이미 종낭의 흔적이 자취를 감춘 뒤였다. 마지막으로 떨군 꽃잎만이 작년의 그 벤치 위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나의 회한을 부추겼다.


미련을 안고 돌아 나오는 길, 속에서 나를 불러세우는 기괴하고 기이한 나무와 마주쳤다. '가수기목'이라는 이름표를 달있었다. 아름답고도 기묘하게 생긴 나무라는 뜻이다. 나무는 팔을 옆으로 잠시 뻗다가 이내 뭔가를 깨달은 듯, 하늘로 쭈욱 수직으로 올라가며 예쁜 잎을 피워냈다.  모습이 마치 숲 속의 합창을 진두지휘하는 지휘자처럼  존재감이 작렬하였다. 종낭의 빈자리에 가수기목을 들여놓고 주변을 둘러보자, 산수국이 이제 막 꽃봉오리를 단장하며 자신의 계절을 준비하고 있었다.


사려니 숲, 가수기목


<그림 2> 사려니 숲 산수국


동생아! 오늘은 산수국이 어떠니?


집 정리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고, 나는 동생에게 사려니 숲 산수국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나 동생은 집에서 바다만 바라봐도 좋다며 굳이 멀리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몇 번의 권유 끝에 제주시 볼 일이 있는 날 동생을 겨우 차에 태울 수 있었다. 지난번엔 수국을 실컷 봤으니, 이번엔 산수국 차례다. 앞다투어 피어나며 온통 제주를 수놓던 수국이 시들시들해지면, 이제 바턴을 이어 산록의 사려니 숲에 산수국이 피어난다. 1년에 한 번 이맘때만 볼 수 있는 산수국을 놓치면 서운하다.


남조로에 차를 주차하고 사려니 숲으로 들어섰다. '신령스러운 곳'이라는 의미의 사려니 숲 숨결이 내게로 다가왔다. 붉은 송이가 곱게 깔린 숲길은 초입부터 산수국이 활짝 피어 우리를 반겼다. 꽃길 따라 병정처럼 줄지어선 삼나무는 늠름하게 산수국을 호위하고, 활엽수들은 가지를 뻗어가며 저마다의 사연을 향기롭게 풀어냈다. 숲은 언제나 아름답고 거대한 시집이 되어 나를 유혹한다. 사려니를 다녀오면, 문득 글이 쓰고 싶어지는 이유이다. 사려니는 나를 꿈꾸게 한다.


풍성한 수국에 비해서 산수국은 날렵하고 새초롬했다. 작은 꽃 주변으로 나비가 날아와 앉은 듯 예쁘게 헛꽃을 피워놓고는, 새색시처럼 빼꼼히 나뭇잎 위로 얼굴을 내민다. 그리곤 이 꽃 저 꽃을 날아다니며 신이 난 꿀벌을 조신하게 맞이한다. 수국이 아직도 자신을 부풀리며 사는 나를 닮았다면, 산수국은 과하지 않게 자신을 내려놓으며 담백하게 사는 동생의 뒷모습을 닮았다. 붉은 화산송이 길을 따라 산수국이 구불구불 끝 간 데 없이 이어졌다. 숲이 깊어갈수록 우리는 고요하고 나직한 숲의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었다.


사려니 숲, 산수국 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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