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살다 보면, 서울사는 친구들이 많이 놀러 온다. 여행하는 마음으로 떠날 수 있는 곳이기에 그러하겠지만, 이유야 어찌 됐든. 나는 그럴때마다 논어의 학이편 제1편에 나오는 군자의 3樂 중 한 구절을 떠올리며 읊조린다. "有朋(유붕)이 自遠方來(자원방래)면 不亦樂乎(불역락호) 아라."그야말로 친구가 있어 먼 곳으로부터 찾아온다면 즐겁지 않겠는가. 제주에서의 만남이 이처럼 각별한 이유는,추억과 그리움을 켜켜이 껴안고 바다를 건너고 산길을넘어오는 여정이 애타게 기다리는 마음과 교차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나 코로나가 세상을 휩쓸면서 세태가 많이 바뀌었다. 서로에게 민폐가 될 수 있기에 가능한 만남을 자제하다 보니, 옛 친구들은 언제 볼 지 기약이 없어졌다. 대신 제주 친구들과 소소하게 시간을 보내거나 혼자 노는 일에 익숙해졌다. 이렇게 친구들의 방문이 뜸해진 사이, 대학 후배 C로부터 연락이 온 것이다. 언제 만났는지도 까마득한 그녀였다. 그러니까 그녀가 오랜 꿈을 실현하려 아프리카로교육 봉사를 떠나기 직전, 환송회에서 본 것이 우리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손으로 꼽아보니 꼭 6년 만이었다.
그녀의 방문을 기다리며나는 우리가 함께 한 시간을 곱씹어 보았다. 우연히도우리는 여러 번 같은 학교에서 근무하였고, 내게 마지막이었던 혁신학교를 함께 지원하기로 의기투합하면서 인연은 더욱 끈끈해졌다. 그토록 질긴 인연이 왜 이토록 느슨해진 걸까? 나는 오랜 시간 묻어둔 과거를 파헤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우리가 만남의 공백을 길게 가진 이유들이 표면으로 서서히 떠올랐다. 그동안 무의식에 깊이 처박아 두고 한 번도 꺼내보지 않은 상처가 실체를 드러냈다. 그러니까 상처를 인정하기 싫어서 애써 그녀를 피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아무 잘못이 없는데, 나는 스스로 상처를 입고 웅크리고 있었다.
왜 행복하지 않았을까?
우리가 함께 근무한 서울형 혁신학교는 처음이라 할 일이 많았다. 교사들은 다들 의욕이 넘쳤는데, 정말 아우토반이 따로 없었다. 아이들의 웃음을 보려고 각자의 재능을 뽐내며 맘껏 질주했다. 보람이 컸다. 아이들이 행복한만큼 여기저기서 과부하가 걸렸지만, 우리 사전에 브레이크는 없었다. 다 같이 액셀을 밟으며 속도를 높였다. 추진력이 좋은 C의 액셀은 단연 최고였다. 나는 그녀를 만류하기는커녕, 선배라는 자존심 때문에 매번 따라잡으려 애를 썼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고, 매일 일상의 배터리는 간당간당했다. 이러다간 길 위에서 영원히 휘발될 것만 같았다. 살고 싶었다. 나는 속도를 반납하고, 아우토반에서 뛰어내렸다. 이른 명퇴였다.
<그림 1> 개구리의 합창
그리고 느린 섬 제주에 둥지를 틀었다.
지난 일은 다 가슴에 묻고, 한라산 설문대 할망의 품에 기대어 걷고 또 걸었다. 조금씩 저녁노을처럼 고요한 평화가 마음 안에 곱게 내려앉았다. 가만히 들락거리는 숨을 바라보며 그제야 살아있음을 실감했다. 걷기는 일상으로 스며들며 나의 배터리를 채워주었고, 주저앉은 나를 일으켜 세웠다. 앞으로는 절대 속도에 속지 않으리라 되뇌었다. 아직도 질주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는것은 힘이 들었다. 속도가 남긴 트라우마는 그렇게 그녀와의 해후를 멀찍이 떼어놓았다.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이른 시간에 아침 산책을 나섰다. 정모시 공원을 돌아 서복 공원으로 이어지는 길이 그날따라 무척 시끄러웠다. 천지가 개벽할 소리에 이끌려 당도한 곳은 공원 안의 작은 연못이었다. 연못위 데크로 만들어진 다리로 올라섰다. 오 마이 갓! 내 생애 이렇게 많은 개구리를 본 적이 있던가. 아직 수련이 번지기 전의 한산한 연못은 온통 개구리 천지였다. 생존과 번식을 위한 열정의 무대가 펼쳐지고 있었다. 짝을 찾은 개구리는 아직 보이지 않았지만, 그것은 생의 절정을 향해 질주하는 뜨겁고도 처절한 떼창이었다.
하물며 인간은 누구나 자기 몫의 열정을 갖고 태어난다. 내가 교직에서 쏟아낸 건 무엇이었을까. 자존심으로 시작해서 자긍심으로 이어지긴 했지만, 나는 정말 행복했던 걸까. 그때 우리가 중간중간 브레이크를 밟고자신을 돌보는 노련한 여유를 부렸다면, 그리 급하게 쫓기듯 무대에서 뛰어내려 오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나는 과연 끝까지 완주했을까? 관객이 떠나고 박수와 환호도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홀로 덩그러니 남겨진 텅 빈 무대에서, 열패감과 미안함에 허망함과 서운함까지 더해지며 서러웠다.
그때는 옳았던 것이 지금은 틀릴 수 있다. 죽도록 일만 하는 것은 언제나 옳지 않다. 마침표를 찍어야 할 때 회한을 남긴다. 우리 모두 열정의 시대를 통과하느라, 부서지기 쉬운 마음 안 어딘가에 내밀하게 곪은 상처가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굳게 닫아걸었던 내 진짜 마음은, 오직 그녀 하고만 나눌 수 있는 이야기였다. 이제 상처를 인정하고 그녀 앞에 드러내서 함께 치유하리라. 문득 그녀가 미치도록 보고 싶었다. 그녀를 극진히 환대하고 싶었다.
사람이 온다는 건,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것은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가 함께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 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 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 정현종, <방문객> -
짝을 찾는 개구리의 뜨거운 열정
<그림 2> 연꽃의 노래
우리는 섶섬이 보이는 자구리 횟집에 마주 앉았다. 나는 비빌 언덕을 잘 알고 있었다. 명퇴를 생각하며 진지하게 답을 구하러 온 그녀를 앞에 두고, 선배답지 못하게 푸념을 했다. 한라산 소주를 타고 술술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조금씩 마음을 열고 상처를 드러냈다. 과연 그녀는 넉넉한 사람이었다. 크고 다정한 마음으로 나의 상처를 감싸 안았다. 그녀는또 여전히 지혜로워서, 다시는 진흙탕에서 허우적거리지 않도록 내게 꼭 필요한 질문하나를 가볍게툭 던졌다.
" 아무리 그래도 선생님이 정말 잘했다고 생각하는 거가 있을 거 아니에요?"
"그렇지. 그건 축제였어. 정말 최고의 축제였지! 난 전교생을 자발적으로 참여시키기 위해 공들여 판을 키웠어. 주변 학교에도 소문이 돌며 아이들이 모여들었고, 캠프 파이어가 끝날 때까지 모든 열정을 쏟아부었지. 그러느라 에너지를 모두 소진하고, 나도 따라서산화된 거야. 그걸로 끝이었지. 30년을 몸 담았던 나의 연극 무대가 그렇게 막을 내린 거야. 아이들이 즐겁고 행복했으면 된 거겠지. 뭘 더 바라겠어.나는 그날 밤늦은 회식자리에서 아름다운 밤이라고 자평했어. 어쩌면 나도 덩달아 행복했던 거 같아. "
그녀는 내게 마법을 일으켰다.
사람이 온다는 건, 정말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녀의 방문이 내게 더 특별했던 이유는, 그녀가 자신의 일생과 함께 어디선가 헤매고 있던 나의 일생도 사이좋게손잡고 데려왔기 때문이다. 상처로 얼룩졌다고 괴로워하던 과거는 어느새 가장 빛나는 한때가 되어 있었다. 무더운 여름, 그녀는 목마른 내게 청량한 소다수가 되어 주었다.
계향충만(戒香充滿)
그녀가 떠나고, 서복 공원 연못에는 그녀를 닮은 연꽃이 맑고 향기롭게 피어났다. 한 송이 연꽃은 진흙탕의 연못을 향기로 채운다. 결코진흙에 물들지 않는 그녀는 연꽃처럼 그윽한 향으로 주변을 정화한다. 그녀는 연꽃의 줄기처럼 부드럽고 유연해서, 융통성이 있으면서도 자기를 지키고 산다. 그녀는 진정한 멋을 지닌 친구다. 자신의 꿈을 위해 나머지를 기꺼이 포기할 줄도 알고, 그런 자기 비움을 통해 스스로 빛이 난다. 내가 그녀를 좋아하는 이유다. 또 연꽃은 피면 필히 열매를 맺는다. 꽃 피운 만큼의 선행은 꼭 그만큼의 결과를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