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홍수가 나는 동안, 제주는 무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폭우는 콘크리트 도시가 아니라 현무암 제주에 뿌렸어야 했는데, 제주 하늘은 무심하게 쫀쫀한휘핑크림만 뭉게뭉게 피워냈다. 서귀포의 여름은 습기와의 전쟁으로 시작된다. 어느 해인가 한 달 내내 지속된 장마로, 집안 곳곳에 곰팡이가 피는 걸 목격한 적이 있다. 물에 흠뻑 젖은 목도리가 온몸을 칭칭 휘어 감는 듯, 습도가 100을 기록하는 날이 많았다. 지레 겁을 먹은 나는 서울로 달아나 버렸다. 하지만 내 삶을 비집고 들어온 제주 친구들과 함께 지내게 되면서, 습기를 다루고 여름을즐기는 방법을 하나씩 터득해 나갔다.
제주생활 초기엔 남편과 함께 돈내코계곡을 즐겼다. 수영을 못하는 남편에겐 안성맞춤이었다. 나는따로 제주의 리조트 야외 수영장을 다녔다. 책 한 권을 들고 가면, 성인풀은 한적했기 때문에 야자수 그늘 아래 썬베드에서 오후 늦게까지 놀 수 있었다. 서울 친구나 조카가 놀러 오면 해비치나 협재로 나갔다. 어스름 일몰 시간이다가오면 에메랄드빛 바다가 붉게 물들고, 하늘엔 삽시간의 황홀이 펼쳐졌다. 내 가슴도 뜨겁게 바다처럼 일렁거렸다.
차차 스노클링에 취미를 붙이면서는, 여기저기 알려지지 않은 바다를 찾아다니기 시작하였다. 제주 토박이 친구가 안내하는 곳과 입도한 친구가 물색해 둔 곳을 열심히 따라다녔다. 그렇게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결국 내가 안착한 곳은 외돌개로 유명한황우지 선녀탕이다. 전국을 돌아다니다가 이만한 곳이 없다며 황우지에 정착한 어느 스노클링 애호가의 이야기가 바람결에 들려왔다. 이곳은 제주의 핫플레이스다. 도민답게 뜨거운 한낮에는 관광객들에게 내어주고, 나는 한가로이 새벽에 즐긴다.
한여름의 뭉게구름
<그림 1> 새벽엔선녀탕
친구는 몇 명이 모여서 노는 게 좋을까?
상황에 따라 그 수를 맘대로 정할 수는 없지만, 나는 셋이서 노는 걸 가장 좋아한다. 둘은 오붓하지만 재미가 덜하고, 셋이 모여야 이야기가 깊고 다채롭게 뻗어나가며 만남의 밀도가 높아진다. 넷은 둘씩 편이 갈라지기가 쉽고, 다섯이 넘어가면 이야기가 겉돌고 정신이 없다. 자고로 3은 완벽한 숫자라고 한다. 여행을 할 때도 세명이 다닐 때 성공할 확률이 높아진다. 의견이 달라도 중재자가 있어서 편이 갈라지는 일 없이 균형점을 찾게 된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나는 유독 셋이 만나는 친구들의 모임이 많다.
제주에서도 셋이 만나는 친구들이 있다. 같은 동네에 모여 사는 우리는 수시로 숲길을 걷고 올레길을 걷는다. 그러나 여름이 오면 당장걷기를 반납하고, 바다로 뛰어든다. 어서 오라고 바다가 자꾸 부르는 데다가, 자타가 인정하는 최고의 스노클링 장인 선녀탕이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올해도 우리는 이른 아침 선녀탕으로 출근 도장을 찍으러 다녔다.
선녀탕은 물고기들의 천국이다. 다들 물속에서 미끄러지는 모습이 유려하다. 그런데 오늘 내가 마지막이라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서울행을 앞두고 아쉬운 걸음이었는데, 다들 이심전심으로 모여들었다. 흑백 줄무늬의 커다란 돌돔도, 몸을 비트는 놀래미와 선녀탕의 마스코트인 노란색 줄무늬돔도, 그동안 못 보던 은빛 물고기와 어린 멸치들, 투명한 파란색 물고기도 떼를 지어 나와 나를 환송했다. 어쩌다 새끼를 데리고 나타나는 한치나, 스멀스멀 움직이다 숨어버리는 문어는 보지 못했지만, 그만하면 훌륭했다.
바다의 댄싱 퀸
그러다 미역을 만났다. 미역은 선녀탕 가장 깊은 곳에 퇴적된 하얀 모래 주변의 크고 작은 바위에 뿌리를 내리며 집단으로 자생한다. 미역은 물살에 흔들린다. 파도가 일 때마다 온몸을 자유롭게 흔드는데, 그 떼춤이 열정적이다 못해 유쾌하다. 마력을 뿜어내며 나의 엉덩이를 들썩이게 만든다. 에라, 모르겠다. 나도 따라 온몸을 s자로 흔들며 팔다리를 흐느적거려 본다. 물살은 어느새 왈츠가 되고, 우리는 박자를 맞춰가며 함께 춤을 춘다. 바다의 댄싱 퀸 미역과올해의 마지막 춤을 추었다.
한 시간 정도 신나게 수영을 하고 나면 나른하다. 흡족하게 스노클링도 끝내고, 짐을 챙겨 가파른 돌계단을 오르다가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문섬 위로 피어오른 뭉게구름이 선녀탕에서 풍덩 수영을 한다. 선녀탕에선 구름마저도 하나가 된다. 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 하루를 시작하는 이 기분,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내 여름날 최고의 사치다.
한가로운 새볔의 선녀탕
<그림 2> 한낮엔 무두망개
가끔은 둘이 노는 게 더 신날 때도 있다.
바로 나의 제주 마당발 친구 옥을 만나 여기저기 쏘다닐 때가 그렇다. 원석처럼 빛을 내며 자신의 인생을 야생마처럼 질주하는 그녀는 언제나 자유롭고 용감하다. 나보다 먼저 제주에 정착한 그녀는 제주 곳곳을 손바닥처럼 훤히 꿰고 다닌다. 우리는 쿵작이 곧잘 맞아서 나는 한동안 그녀를 따라 제주의 오지를 누볐다. 어쩌다 그녀를 만난 건 커다란 행운이었다.
여름 바다가 우리를 다시 불러냈다. 우리는 하도리로 해수욕을 떠날 참이었다. 먼길을 떠날 때는 그녀의 전기차가 효자 노릇을 한다. 그러나 충전이 덜 된 차는 바로 애물단지로 전락한다. 우리는 충전소를 찾아다니느라 애를 먹었다. 몇 번이나 허탕을 치고, 겨우 태흥3리 행복쉼터에서 급속충전기를 찾았다. 급할 것도 없으니 충전을 기다리며 정자에서 노니는데, 멋진 작품이 눈에 들어왔다. 덩굴이 벽을 타고 오르면서 나무를 그려낸 것이다. 줄기와 가지가 정교한 것이, 그림은 인간의 전유물만은 아니었다.
유레카!
옥이는 또 나를 감동시켰다. 그녀가 인도한 하도리 무두망개는 갯담이 둥글게 둘러쳐진 자연 양식장이었다. 나는 에메랄드 물빛에 반하고, 한적한 분위기에 기뻐서 환호했다. 멀리 행원리의 풍차마저 멋진 그림을 그려주고 있었다. 우리는 오리발을 끼고 바다로 나갔다. 하얀 모래바닥에 아른거리는 물 그림자가 내 가슴에도 아롱졌다. 물결을 따라 계속 나아가자, 예쁜 해초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서식하는 물고기도 다양했다. 썰물이라 수심도 적당해서, 안전한 망망대해를 헤엄치는 기분으로 벅차올랐다.
수영을 하다가 숨이 가빠지면, 바다 위에 누웠다. 소금물이 받쳐주는 탱탱한 부력으로 세상 편안하게 하늘을 바라보면, 세상만사도 덩달아 태평해진다. 구름은 한없이 게으르게 흘러가고, 짝을 지어 하늘을 나는 바다지빠귀도 다들 무심하다. 잠시 곤히 단잠에 빠져든 친구를 곁에 두고 파도 멍도 해본다. 이른 아침 길을 나섰는데, 시간은 어느새 저녁이 되었고, 물때는 다시 밀물이 되었다. 급기야는 파도가 우리 텐트를 침범할 기세다. 하도리가 멀긴 멀어도, 바다의 역사를 새로 쓴 날 올여름 최고의 추억을 안겨주었다. 나의 여름날이 햇빛에 그을린 피부처럼 짙게 여물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