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능할까? 딸아이의 버킷리스트를 듣고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애완견 호두는 몸무게가 7kg이라 기내 탑승이 안되기 때문이다. 짐칸에 넣어 이동하는 비인간적인 방법을 쓸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나는 아예 포기였다. 하지만 딸아이는 배를 타더라도 꼭 호두를 데리고 제주 여행을 하고 싶어 했다. 드디어 시간이 길게 난 딸아이가 배편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지성이면 감천일까, 구세주를 만난 것이다. 그것은 바로 티웨이 항공!티웨이는 통상 반려동물 5kg 한도의 규정을 대폭 완화하여 가방 무게 포함 9kg까지 허용하였다. 야호! 우리 가족은 만세를 불렀다.
사실 호두는 입양할 당시엔 몸무게가 3kg이었다. 딸아이는 언제든 비행기 타고 제주를 다닐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크게 기뻐하였다. 하지만 호두는 입양하고 나서도 무럭무럭 자라서 지금은 7kg이 되었다. 보호소에서는 호두의 나이를 2,3살로 추정했는데, 실제 나이는 1살도 안 된 아기였던 것이다. 암튼 호두는 몸무게 때문에 여태껏 제주 여행을 한 번도 하지 못하고 있다가, 이제야 티웨이를 만나 하늘을 날게 되었다.
항공권을 구입한 딸아이는 애견 가방을 사서 호두 훈련에 들어갔다. 날마다 호두를 데리고 버스를 탔다. 가방 안에 간식을 넣고 유인해 쟈크를 채우고 처음엔 한두 정류장으로 시작해서 차츰 시간을 늘려갔다. 어느 정도 가방에 적응이 되었다고 판단하고 비행기 탑승을 시도하였다. 처음이라 불안하여 남편과 나는 일정을 맞춰 동행하였다. 호두는 비행기 안에서 몹시 긴장하였다. 한 시간이 넘게 폐쇄된 공간에 갇혀 있어야 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딸아이가 계속 만져주며 얼르고 달랬지만, 가방 안에서 신음하며 짖기까지 하여 우리는진땀을 흘렸다. 그러나 비행 횟수가 늘어나면서 호두는 서서히 가방에 익숙해졌다. 그렇게 호두가최근제주엘 두 번이나 다녀갔다.
<그림 1> 첫 바다 중문
우리는 호두에게 제일 먼저 바다를 보여주고 싶었다. 제주 여행의 첫 번째 선물로 넓고 한적한 중문 해수욕장의 백사장을 안겼다. 호두가 처음 만난 바다, 늦가을이라 인적이 드문 백사장에서 호두는 난생처음으로 자유를 만끽했다. 항상 목줄에 묶여 행인들을 피해 다니며 도시의 회색 빛 아스팔트 위만 걷다가, 고운 모래밭을 만난 호두는 제 세상을 만난 듯 온몸을 날리며 질주하였다. 그날 우린 처음으로 호두의 진정한 야성을 목격하였다.
목이 마른 호두는 바다를 향해 거침없이 돌진했다. 바닷가로 달려가 물맛을 보고는 짠맛에 놀라 곧바로 뒤돌아섰다. 그러나 끊임없이 철썩거리는 파도가 신기한 듯 다가갔다 도망치기를 반복했다. 운동신경이 남다른 호두답게 파도를 피해 수십 번을 오가다가, 결국은 된통파도를 뒤집어쓰고 말았다. 꺅! 놀람도 잠시, 물 벼락을 맞은 호두의 모습에 우리는 까르르까르르 웃음꽃을 날렸다. 호두가 진정으로 행복해하니 우리도 덩달아 행복해졌다. 역시, 호두를 데려오길 정말 잘했어!
중문의 파도와 만나기 직전의 호두
<그림 2> 행복한 바다 해비치
햇살이 따사로운 날엔 표선의 해비치 해수욕장을 찾았다.드넓은 백사장이 엄마의 자궁처럼 포근하고 아늑한 바다에는 밀가루처럼 곱고 하얀 모래가 가득했다. 백사장이 보통명사가 되기 이전에 해비치 바다의 모래사장은 고유명사인 백사장으로 불렸다고 한다. 이름도 예쁜 해비치는 썰물이 되면 아스라이 멀어져 가는 바다가 백사장을 넓고 깊게 키우곤 한다. 나는 그 광대한 평화로움에 반해 가끔씩 들르는데, 맑은 날 해 질 녘 한라산 뒤로 노을이 붉게 물드는 풍경은 그야말로 삽시간의 황홀이다.
우리가 당도한 곳은 해비치의 북쪽 해변이었다. 사람들이 몰리는 남쪽은 바람이 불었지만, 북쪽은 야트막한 언덕이 바람을 막아주어 포근하였다. 호두는 다시 제 세상을 만났다. 허공을 가르던 작고 하얀 철새들이 수심이 야트막한 바다 위로 미끄러지듯 내려앉았다. 호두가 그냥 지나칠리가 없다. 새떼를 향해 냅다 바다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안돼! 소스라치게 놀란 우리가 소리소리 지르며 불렀지만, 이미 활시위는 당겨졌다. 호두는 발을 찰랑거리며 바다로 뛰어들더니 곧 첨벙거리며 다리와 몸통까지 물에 적시며 달려나갔다. 놀란 새떼가 하늘로 후드득 날아올랐다.
사냥감을 놓친 호두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우리에게 돌아왔다. 몸은 이미 흠뻑 축축해졌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우리는 준비해 간 수건으로 몸을 닦아주고 들뜨고 신이 난 마음을 쓰다듬어 주었다.
햇살이 유난히 따사로웠다. 바다는 파랑과 초록과 보라의 경계를 넘나들며 다양하게 변주되고 있었다. 올레길 3코스를 지나는 올레꾼 두 명이 신발을 벗고 맨발로 물가를 따라 걷고 있었다. 우리는 호두를 데리고 모래길을 천천히 거닐었다. 해변의 모퉁이를 돌고 돌며 따스한 햇살을 만끽했다. 해비치는 우리 가족을 참으로 행복하게 만드는 요술쟁이 바다였다.
행복한 바다 해비치
<그림 3> 다시 또 해비치
바람이 몹시 부는 날에도 해비치로 달려갔다. 지난번늦가을의 해비치가 너무 행복해서 별렀던 것이다. 그러나 바다는 그대로인데 겨울이 깊어가면서 바람이 차고 거세졌다. 엉덩이를 내놓고 달랑 민트색 내복만 입은 호두는 추운 줄도 모르고 천방지축으로 해변을 뛰어다녔다. 딸아이는 서울서 힘들게 공수해 온 비치의자를 조립해서 앉았다. 목마른 호두가 다가와 딸아이가 건네주는 물병에 얼굴을 박고 혀로 물을 말아 올렸다.
잠시 방심한 사이 의자 케이스가 바람에 날려 바닷물 속으로 풍덩 빠져버렸다.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데 호두가 다가왔다. 그러나 주인을 위해 물속으로 뛰어드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파도에 밀려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결국은 내가 건져냈다. 그래도 호두는 끝까지 내 곁을 떠나지 않고 함께 있어주는 의리를 지켰다. 점점 바람이 춥게 느껴졌다. 옅은 구름이 하늘을 뒤덮어 햇살도 매우 약했다. 그렇겠지, 해비치라고 항상 좋을 수는 없을 거야. 의자에 앉아 책도 읽고 한가로이 바다를 즐기는 게 로망이었는데, 안 되겠다. 철수하자! 아무래도 따뜻한 봄날을 다시 기약해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