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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제주는 수국 세상

제주 일상 그림일기 6

by Lara 유현정 Jun 26. 2022



장마가 시작되었다.

제주에는 장마와 궁합이 잘 맞는 꽃이 있다. 바로 수국이다. 오죽하면 이름마저 수국일까. 물을 좋아해서 장마 때 삽목으로 번식을 시킨다. 나는 수국을 엄청 좋아한다. 유달리 6월을 기다리는 이유다. 산책을 다니며 동네 수국이 활짝 핀 걸 목격했으니, 제대로 구경하기 위해서는 좀 더 멀리 떠나야 한다. 그러나 혹시나 하고 일기예보를 들여다보면, 반가운 해님 대신 주르륵 비를 맞고 있는 우산만 얼굴을 쑤욱 내민다. 어쩌지! 보롬왓 수국을 보러 가얄 텐데..




나와 세 살 터울인 동생이 제주살이를 시작했다. 자매는 평소엔 친구처럼 사이좋게 어울려 지내지만, 속으론 본인도 잘 인지하지 못하는 경쟁심리가 평생 똬리를 틀기도 한다. 언니를 이겨보려 시작한 공부가 너무 재미있어서 끝을 보게 된 동생은, 대학에서 많은 연구와 제자를 길러내고 있다. 작년에는 코로나 기간 재택으로 인터넷 강의를 한다고 노트북을 싸들고 와 우리 집에서 지내보더니, 급기야는 나와 같은 아파트 아래층에 세를 얻게  것이다.  


우리는 어릴 적 추억을 많이 공유하고 있다. 방학이면 둘이 손 잡고 서울 나들이 오신 외할머니나 외삼촌을 따라나서곤 했다. 시골엔 은 외삼촌이 우리와 놀아주었고, 친척인 친구들도 많아서 함께 연을 날리거나 썰매를 타며 이 집 저 집을 즐겁게 쏘다녔다. 할머니 집도 크게 멀지 않아서 내키는 대로 두 집을 왔다 갔다 하다 보, 어느새 방학이 끝나곤 하였다. 어린 시절 자연 속 행복을 경험했기에, 우리는 똑같이 자연을 추구하며 는 게 아닐까 싶다.


동생은 제주에서도 학기말 업무를 처리하느라 여전히 바빴다. 하지만 6월의 수국을 놓치게 할 수는 없었다. 잠시 장마가 주춤한 사이를 틈타 우리는 보롬왓으로 달려갔다. 보롬왓은 바람이 몰아치는 들판을 의미한다. 버려진 30만 평의 황무지가 한울 영농조합에 의해 메밀밭으로 개간되었고, 2015년 축제를 시작하며 메밀의 주산지가 강원도 봉평이 아닌 제주도임을 널리 알렸다. 요즘은 메밀 외에도 계절마다 다양한 꽃을 재배하여 관광객을 모으고 있다. 농업이 1차에서 6차 산업으로 도약하는 본보기가 되고 있다.


보롬왓 들판엔 메밀이 하얗게 흩뿌려져 있었다. 파랗게 얼굴을 내민 하늘에는 뭉게구름이 피어오르고, 멀리 야트막한 오름들이 들판을 감싸며 에우르는 풍경은 숨이 막힐 지경으로 평화로웠다.  얼마만인가. 와본 지가 벌써 두세 해가 훌쩍 지난 것 같다. 그 사이 보롬왓은 수국 정원의 위치가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내가 애정 해마지 않던 1.2km에 이르는 소박한 수국 길이 모두 사라지고, 대신 새로 조성된 정원엔 다양한 품종의 수국이 도시 물을 제대로 먹은 아가씨처럼 세련되 전시되어 있었다. 수국 구경 치고는 실로 화려한 외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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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롬왓의 수국 풍경보롬왓의 수국 풍경




<그림 1> 비석거리 수국 풍경


나의 제주 수국 첫사랑은 비석거리다. 

6월이 오면, 나는 제일 먼저 비석거리로 나간다. 올해도 수국이 궁금하여 일부러 저녁 산책을 나가 보았다. 수국은 토양의 산도에 따라 다양한 색을 데, 비석거리는 알칼리성 토양인 듯 자주색 수국이 활짝 었다. 그중 문섬을 배경으로 한 무더기의 수국이 싱싱하고 탐스런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하도 곱고 예뻐서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커다란 꽃잎 안에 간간이 아주 작은 이 수술을 달고 있었다. 아하, 너로구나. 진짜 꽃! 


수국을 풍성하게 만들어 주는 수많은 꽃잎원래 꽃이라고 한. 공작새가 꼬리를 힘껏 펼치고 아름다운 무늬로 암컷을 유혹하는 것처럼, 수국은 벌과 나비를 불러 모으기 위해서 한껏 치장을 하는 것이다. 몸이 너무 왜소해서 눈에 띄지 않으므로, 온 힘을 다해 자신의 몸을 부풀린다. 누구나 사랑하는 이에게 예쁘고 멋지게 보이고 싶은 것은 본능일 . 생존의 법칙으로 사랑을 갈구하는 수국의 눈물겨운 노력에 나는 목이 멘다. 문득 이 인성 시인의 <수국>이란 시가 떠올랐다.



송이마다

알록달록 변해가며

힘든 슬픔은 가슴에 묻고

예쁜 모습만

당신에게 보이고 싶네요


아무리 나에게

변덕쟁이라 나무라도


꽃 지고 나면

그만이라는

당신 마음만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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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섬 배경의 수국 풍경



<그림 2>  난산리 밭 수국 풍경


길을 나선 김에, 동생과 나는 보롬왓에 이어 아예 혼인지의 파란 수국까지 듬뿍 만났다. 마음은 이미 수국 부자가 되었지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곳이 한 군데 더 다. 바로 난산리 밭 나의 수국 정원! 늦은 점심을 먹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우리는 난산리로 향했다. 입구에서부터 반기는 수국이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벚나무 가로수 아래로 수년간 가꾸어  수국은,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뻗어 한 아름씩 피워낸 희망꽃다발이었다.


장마가 오기 전에도 남편과 함께 다녀왔던 나는 감자를 수확하다 잠시 쉬는 나른한 오후, 수국이 가득한 꽃밭에서 더위를 식혔다. 잠시 차에서 내려 다시 동생과 함께 수국을 감상하는 시간, 이번에는 난산리에서 고군분투한 긴 여정을 떠올렸다. 해마다 6월이면 수국을 삽목 했고, 이듬해 봄이 오면 뿌리내린 수국을 이곳저곳으로 옮겨 심었다. 지금도 큰 나무 그늘에서 뿌리를 내리고 있는 작은 수국은, 내년 봄이면  자기 자리를 찾을 것이다. 난산리 밭은 농사 대신 아예 수국 정원이 되어간. 


한 송이 꽃에는 온 우주가 담겨 있다고 한. 난산리 수국에는 나의 제주살이 역사가 담겨 있. 제주와 수국을 만난 기쁨과 희열은 물론이고, 결국은 실패하고 만 집을 지어보겠다고 실랑이하며 고난으로 얼룩진 하루하루가 고스란히 꽃잎으로 피어났다. 하얗고 연한 파랑부터 짙은 자주색에 이르는 색색의 꽃잎은 나의 희로애락을 노래한다. 수국이 자라는 만큼 나의 열정도 커가고, 꽃 무더기가 피어나는 만큼 꿈도 영글어간다. 지나고 뒤돌아보니 모두가 꽃길이었다.


난산리 수국은 주인의 게으름이 불러온 참사로 잡초가 어마무시로 무성한 땅에서도 잘 자라주었다. 내가 들인 수고 이상으로 곱고 아름답게 피어줘서 너무 고맙다. 동생은 난산리 밭의 수국이 제일 탐스럽고 색도 곱다고 칭찬하였다. 어디 감히 보롬왓 수국에 견줄까마는,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언니의 오랜 정성을 보듬어주고 싶은 우애와 배려라는 걸 내가 모를 리 있겠는가. 우리들 얼굴에 수국처럼 둥근 웃음이 피어올랐다.

 

바야흐로 6월, 수국의 계절이다.

지금 제주는 다시 수국 세상이 되었다.

수국의 마지막은 언제나 난산리 밭 나의 정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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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산리 밭 수국 풍경난산리 밭 수국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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