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를 여행할 때 선뜻 자신의 집으로 초대한 할머니였다. 그때 할머니는 H2를 다시 만나 너무나 반가워하셨다. 눈물을 글썽이며 두 손으로 H2의 얼굴을 비비고, 손에 키스를 퍼부었다. 처음 본 Y와 K와도 두 손을 맞잡고 얼굴 가득 미소를 띤 채 맞이하셨다. 그러나 할머니는 제대로 일어서지를 못했다. 두통이 너무 심해서 몸을 갱신하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대부분 침대나 소파에 걸터앉아 머리를 부여잡고 계셨다.
그런데 그 두통의 원인이 밝혀진 것이다. 다름 아닌 뇌종양이었다. 멕시코의 절친 브랜다로부터 소식을 전해 들은 H2는 마음이 아리고 슬펐다. Y도 마음이 무겁고 착잡하였다. 형편이 어려운 분이라서먼저수술비가 걱정되었다. 링거 한 대 맞고 약을 처방받는 데도 30여 만 원이 나왔으니, 수술비는 수천만 원이 나올 수도 있었다. 그러나 돈보다도 종양 부위가 위험해서 의사가 수술을 권유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의술마저 갖춰지지 않아 할머니는 결국 수술을 포기하였다.
인생은 언제나 행복과 불행 사이를 오간다. 히니아 할머니의 인생도 그러하였다. 할머니는 과거에 어느 병든 노인을 수발한 대가로 현재 사는 집을 물려받았다고 한다. 이제는 효심이 깊은 딸이 곁에서 할머니의 수발을 들고 있었다. 건강할 때 타인을 도와준 공덕은 언젠가 다시 돌아오는 법이다. 인생의 파도를 헤쳐나갈 때코끝을 스치는 바람은 때론 행복으로 때론 불행으로 기억될 것이다. Y는 히니아 할머니가육신은 비록 고통 속에 있을지라도, 진통제를 잘 써서 통증을 줄이고 가족 간의 사랑 속에서 행복하시기를 빌었다.
여행은 인생의 축소판이다. 멕시코 여행도 그러하였다. Y는 행복과불행사이를 오가며 무게의 중심을 가까스로 지탱해 나갔다. 여행 초반엔 H2를 만난 기쁨도 잠시, 온몸을 덮친 독감으로 지독히 아파서 불행하였다. 사흘 밤낮으로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정지된 시간 동안 감각만이 아련하게 남아 있었다. 멕시코시티는 매연 냄새가 코를 찔렀고, 인구 집중으로 도시가 너무 혼잡했다. 밤마다 사이렌 소리가 깊은 잠을 방해했고, 지진으로 숙박하던 아파트가 흔들렸다. 영혼이 탈탈 털릴 것만 같은 불안 속에서, 가장 기대했던 '프리다 칼로 미술관'을 예약까지 해놓고 아파서 못 가게 되어 황망하고 절망스러웠다.
그러나 폭우가 퍼분 뒤엔 다시 햇살이 나오는 법, 쨍쨍한 봄날 같은시간이 다가왔다. 와하까에서 밤 비행기를 타고 날아간 푸에르토 바야르타라는 휴양도시에서의 나날들이었다.Y는 몸이 회복되자 컨디션이 정상으로 돌아와 살 것 같았다. 건강이 행복의 필수조건인 것만은 확실했다. 숙박비가비싼 만큼 침실을 세 개나 보유한 숙소의 거실로야자수가 즐비한 해변의 경치가 가득들어찼다. 하루종일 파도소리를 들으며 소파에서 휴식을 취할 수도 있었고, 심심하면 해변으로 나가 쇼핑과 식도락을 즐길 수도 있었다.
드디어 절정의 순간이 도래하였다. 그날은 마침 2022 월드컵 결승전이 있는 날이었다. 바닷가에선 이른 아침부터 멕시코의 전통 놀이가 시작되었다.높은기둥 꼭대기에 앉은 리더의 피리와 북소리에 맞춰 전통의상을 입은 남자들이 한쪽 발목을 줄로 묶고 차례차례 거꾸로 기둥을 돌면서 땅으로 내려왔다. 관광객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해변에는 대형 스크린을 갖춘 펍이 여럿 있었다. 메시의 광팬인 K는Y와 H2를 데리고 명당에 자리 잡은펍으로 들어섰다.멕시코 시간으로 오전 10시였다. 결승국인 프랑스와 아르헨티나의 경기는 곧 메시와 음바페의 대결이었다.
브런치를 먹으며 응원이 시작되었다. 전반전은 메시의 활약으로 아르헨티나가 무사히 이기는 게임이어서 그다지 재미가 없었다. 그러나 곧반전이 일어나면서 경기는 손에 땀을 쥐게 하였다. 어떤 영화보다도잘 짜인 각본이었다. Y와 H2는 K를 도와 메시를 응원하였지만, 점점 음바페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아직은 메시가왕좌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곧빼앗을 것처럼 패기가 넘쳤다. 그래도 나라는 아르헨티나를 응원하였다. 연장전과 승부차기가 끝나고 우승컵이 아르헨티나로 돌아가자, 크리스마스 복장을 입은 펍의 종업원이 테이블 위로 올라가 호루라기를 불고 손을 휘저으며 신나게 승리의 세리머니를 하였다.
행복이란, 한 가족이 한 마음으로 한 나라를 응원하는 것이다
Y는 여행 중에 다시 한번 읽으려고 들고 간 책, <꾸뻬 씨의 행복여행>에 적힌 행복 리스트가 떠올랐다. 여기에 얼른 목록 하나를 추가하였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에 기구를 타고 둥둥 떠 있는 것처럼 짜릿한 행복이었다. 지구의 반대편 낯선 나라에서 특별한 이벤트를 함께 나누며, 흥겨운 시간을 가족이 함께 보내는 것은 진정한 행복이었다. 한동안 불행은 그림자도 얼씬거리지 못할 것 같이 강렬한 느낌이었다.K는기분이 너무 좋은 나머지랍스터와 맥주를 거나하게 샀다.
푸에르토 바야르타, 월드컵 결승전 응원
H2는 어려서부터 행복에 민감한 아이였다. 새벽부터 출근준비로 바쁜 어느 날이었다. Y는 그날따라 기분이 아주 좋았다. 시간이 지루하게 흐르던 학기말이 끝나고, 손꼽아 기다리던 여름방학식이 있는 날이었다. 아침잠이 많은 Y는 이른 아침의 출근이 늘 버거웠다. 잠도 부족한데 두 아이를 깨워 학교와 유치원까지 등교시켜야 하는 현실이었다. 이런 상황이 끝난다는 생각만으로도 행복해진 것이다. 엄마의 출근시간에 맞춰 졸린 눈을 비비고 일어난 H2에게 Y는 한껏 들뜬 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H2야, 오늘 엄마 기분이 너무 좋구나!!"
"왜? 무슨 일인데?"
"응, 오늘 엄마가 방학하거든."
"엄마! 그럼 오늘부터 우리 식구 행복하게 사는 거야?"
"그러엄. 그렇고 말고. 오늘부터 우리 식구 행복하게 사는 거지."
H2는 행복이란 단어에 힘을 주며 맞장구를 쳤다. Y는 그런 H2를 끌어안고 속으로 눈물을 훔쳤다. 엄마의 출근은 어린 H2에게도 고달픈 현실이었다. 첫 돌이 지나면서부터 하루종일 놀이방에 맡겨져야 했을 때, 엄마와 떨어지지 않으려고 눈물로 생이별을 하던 아이였다. 물론 H1도 마찬가지였다. 초등학교 2학년 때였던가. 밖에서 외식을 하다가 H1의 친구를 만났다. 친구는 하얀 레이스가 달린 옷을 입고 있었다. 어른인 Y가 봐도 예뻐 보였다. Y는 혹시나 해서 물어보았다.
"H1아! 너도 친구처럼 저런 옷 입고 싶니?"
"아니!! 저런 게 뭐가 중요해?"
"헐! 그럼 너는 뭐가 중요한데?"
"나는 그냥 엄마가 집에 있었으면 좋겠어."
Y는 입이 얼어붙었다. 그건 도저히 들어줄 수 없는 주문이었다. Y는 당장 직장을 그만둔다고 생각하니 자신의 존재가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인간의 욕구 중에 가장 높은 차원에 있다는 그놈의 '자아실현' 때문이었다. 이제 막 30평 아파트로 이사하여 경제적으로도 빠듯한 처지였지만, 돈은 그다음 문제였다. 엄마의 빈자리를 채워달라는 소박한 요구는 묵살되었고, 엄마가 집을 지키며 온 가족이 오손도손 살아가는 것은 도시에서는 결코 이루기 어려운 꿈이었다.
그렇게 행복을 갈구하던 아이들은 이제 성인이 되었다. 부모의 그늘을 벗어나 스스로 행복을 가꾸고 있다. 그런데 진정 행복이란 무엇일까. <아주 보통의 행복>을 쓴 서울대 최인철 교수는 "행복은 그저 일상의 삶을 잘 살아가는 것이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의 사소함 속으로 더 깊이, 온전히 들어가는 것이 행복이다."라고 말했다. 그렇다면행복의 조건은 무엇일까. 하버드 대학에서 75년간 행복을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정답은 '좋은 인간관계’였다.배우자와 가족, 친구와 공동체를 통해 좋은 관계를 형성한 사람은 더 오래, 건강하고 행복한 인생을 살고 있었다.
그나저나 H2는 마이애미에서 행복을 찾았을까.
타고난 친화력으로 친구를 주렁주렁 달고 있으니, Y는 크게 걱정은 하지 않기로 했다. 다만 진정한 행복의 능력은 절망 속에서도 다른 감사 거리를 찾을 수 있는 마음에 있을 터이니, 범사에 감사하며 살아가기를 바랐다. 인생은 절대 꽃길만 걸을 수는 없다. 인연이 닿는대로 꽃길이 펼쳐지면 신나게 즐기고, 폭우가 쏟아지는 비 속에서도 기꺼이 춤을 출 수 있다면, 가시밭길이 펼쳐진 고난 속에서도 그 안에 내재된 의미를 찾고 인생을 배워나가며 성장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절망의 구렁텅이에빠진마이애미에서
H2는 이제어두운 불행의 터널을 빠져나와무엇으로 인생을 채우며 행복을 찾아가고 있을지,Y는정녕그것이궁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