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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ra 유현정 Jul 08. 2023

주렁주렁 친구들이 달렸네

<실화소설 6> 친화력의 대명사 김비야


하늘이 무너져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했던가.


H2가 여권을 재발급 받기 위해 애틀랜타를 왕복하는 사이, Y는 새로운 정보 하나 알게 되었다. 아직 은행이용할 수 없는 H2를 위해 은행을 통하지 않고도 간단하게 해외로 송금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해외에 계좌가 없는 여행자가 돈이 떨어졌을 때 이용하면 아주 좋은 방법이었다. 우리나라는 카카오뱅크에서 제공하는 WU(웨스턴 유니온)이 있었다. 그동안 카카오가 불철주야 달려온 노력의 결실을 따먹게 되다니,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그런데 돈을 수령하려면 역시나 본인의 증이 필요했다. 여권을 잃어버린 상황이었지만, H2가 누구던가. 친화력의 대명사 김비야였다. 마이애미에서  지 한 두 주 사이에 H2는 벌써 친구들을 주렁주렁 거느리고 있다. 이제는 절친이 된 자신에게 처음으로 말을 걸었던 디디 외에도 디디의 언니와 디디와 함께 일하는 동료들, 급식소를 운영하는 목사님, 영주권 신청을 도와준 교회의 봉사자 등등으로 친분을 넓혀 나갔다. K와 Y H2의 새로운 친구를 통해 급전을 부치고,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Y는 새삼스럽게 H2의 친화력을 리조리 어보게 되었다. H2는 우선 언변이 유머러스하 거침이 없었다. 아마도 중학교를 다닐 때였을 것이다. H2는 청운 양로원에 봉사를 다닌 적이 있었다. 거기서 아주 귀여운 할머니를 만났는데,  무척이나 맘에 든 모양이다. 할머니 어깨를 여기저기 주물러 드리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갑자기 삼천포로 빠졌는데, 혼자가 되신 멋쟁이 할아버지(Y의 시아버지)를 소개해 드리겠다고 한 것이다. 웃지 못할 이 도발적인 사건은 수줍은 할머니의 거절로 마무리가 되었지만, 양로원에 한바탕 웃음을 선사하였다.


미국에서 교환학생 과정을 끝내고 잠시 한국에서 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도, 수업 시간마다 엉뚱한 질문으로 교실을 웃음바다로 만들곤 하였다. 어려서부터 질문이 많아 Y도 진을 빼던 아이였다. 오죽하면 선생님도 그런 건 시험에 나오지 않는다며 답을 회피하셨을까. H2는 가끔 마음이 동할 때 급우들을 설득하여 학급에서 반장을 맡았다. 한 번은 선거 공약으로 교실의 신선한 공기를 내걸었는데, 자신이 뱉은 말을 끝까지 책임지기 위하여 새벽에 출근하는 Y를 따라나서곤 하였다. 성실과 신의로 제일 먼저 등교해서 교실 창문을 활짝 열고 급우들을 맞이하였다.    


이처럼 관계 초기에는 유머와 사교성이 힘을 발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성실과 책임과 신의가 더 중요해진다. 거기에 배려와 공감까지 겸비한다면, 비록 길 위에서 만난 관계라 할지라도 절친으로 발전하게 될 가능성 농후다. 그러나 이러한 덕목의 밑바닥에는 언제나 열린 마음이 려 있야 한다. 서로가 상대에 대해서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야, 우정이라는 값진 선물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우정이란 마음의 문을 닫아걸고 사는 사람은 평생 경험할 수 없는 고귀한 감정이요, 인생의 크나큰 자산이다.




H2의 친화력은 멕시코에서도 통했다. 하긴 여행자의 미소만 한 세계 공용어가 어디 있으랴. 인종과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어 거침없이 다가가는 H2의 소와 친화력 앞에서는 모두가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Y와 K 멕시코 여행 중에 한 가정에 초대를 받 하루를 묵었다. H2가 한동안 머물던 히니아 할머니의 집이었다. 저녁에 바비큐 파티를 하고 있는데, 주변에 사는 친척들이 계속 찾아왔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H2 곁으로 몰려들었다. 그 사이 멕시코에서 쌓은 H2의 인맥이었다.


그들과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H2는 시코에 입국할 때도 도보로 입성했지만, 여정을 이어나갈 때도 남들이 선호하는 편안한 루트는 사양하였다. 틀에 박힌 것은 뻔하다는 이유였다. 굳이 고생을 사서 하는 이유는 예기치 못한 상황 속에서 만나는 뜻밖의 연이 가슴을 설레게 만때문이다. 그리하여 홀로 머물던 푸에르또 바야르타를 떠날 때도 히치하이킹을 하였다. 운명의 신이 이끄는 대로 자신의 여정을 맡겼다.


H2는 몇 개의 승용차를 놓치고, 결국 픽업트럭을 얻어 다. 트럭이 도착한 곳은 바다에서 그리 멀지 않은 작은 도시 익스타파였다.  트럭을 운전하는 젊은이 혈연에 관계없이 돌보고 있 히니아 할머니 집이 있었다. 할머니는 H2를 반겼고, 자연스레 할머니 집에 묵게 되었다. "나의 집은 곧 너의 집이다(Mi casa es tu casa)"라는 멕시코 속담이 있다. 아무리 누추한 환경이라도 기꺼이 자신의 집을 나누는 아름다운 풍속이다. 생면부지의 낯선 이방인에게도 자신의 공간을 나누기를 꺼리지 않다. 한마디로 정이 흘러넘쳤다


그곳에서 H2는 멕시코 여행 내내 이어진 절친과 끈끈한 인연들을 만다. 버스를 타고 정해진 루트를 따라갔다면 결코 만날 수 없는 우연이었다. 여행의 고수답게 H2는 이런 사실을 이미 체득하고 있었던 것이다. 멕시코는 아직도 대가족 사회였다. 그들의 정신을 지배하는 가톨릭 종교는 낙태를 금지하였기에, 피임이 일반화되지 않았던 시절의 할머니들은 자녀가 열 명에서 스무 명까지 되었다. 게다가 친족 사회여서 인근에는 수많은 친척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 수시로 들락거리며 홀로 된 노인이 외로울 틈을 주지 않았다. 독거노인의 고독이란 선진국의 어두운 그림자일 뿐이다.   


H2는 히니아 할머니 집에서 숙식을 해결하다가, 인근에 살며 가끔 할머니를 방문하는 브랜다를 만나게 되었다. 브랜다는 히니아 할머니의 조카였다. 이미 두 명의 자녀를 둔 싱글맘이었지만, 연배가 H2의 언니뻘이었기에 둘은 곧 친구가 되었다. 멕시코는 한 경제 발전에 박차를 가하는 개발도상국가였다. 하지만 정치가 엉망 탓에 빈부의 격차가 심했고, 서민들의 생활은 궁핍하였다. 시급 1, 2 달러를 받고 생활하느라 휴일도 없이 달려야만 했다. 교육의 기회도 불평등해서 대학은 엄두도 내지 못했고, 고등학교조차 등록금이 비싸서 허덕거렸다.


H2는 그러한 브다를 공감하고 응원하며 한동안 브랜다의 집에서 지냈다. 삶의 무거운 짐을 지고 바쁘게 살아가던 브다도 새로운 친구를 만나 생활에 활력을 얻었다. 브다가 일을 마치고 돌아온 밤이나 주말엔 같이 주변의 공원에 산책을 나가 끝없는 수다의 삼매경에 빠져들었다. 러던 중 브다가 과달라하라에 살고 있는 엄마를 만나러 가는 길에 H2를 동행하였다. 브다 남친의 고물 트럭을 타고 여러 시간을 달려 도착한 집에는 화나라는 이름의 할머니가 혼자 살고 계셨다.


멕시코의 인연들, 화나(좌)와 히니아(우) 할머니


H2의 새로운 여정이 시작되었다. 주변의 친척들이 모여 즐거운 시간을 보낸 후, 브 다시 일을 하러 집으로 떠났다. H2는 화나 할머니의 집에 머물며 말벗이 되어 주었고, 할머니는 딸의 친구인 H2를 위해 아픈 무릎을 딛고 일어나 요리를 하였다. 성격도 화통하고 유머가 많은 할머니라 H2와는 찰떡궁합이었다. H2가 먼저 인연을 맺은 히니아 할머니와는 자매지간이었다. Y와 K가 익스타파를 방문했을 때,  할머니는 원인 모를 두통으로 고생하고 있는 히니아 할머니의 병문안을 하고 연말을 함께 지내며 우애를 다지고 있었다.


Y는 그들과 하룻밤을 보내며 많은 생각이 들었다. 사실은 멕시코 여행을 하는 내내 거머리처럼 따라붙은 생각들이었는데, 현지인의 삶을 가까이서 목격하며 더욱 울컥해진 것이다.  사이 독감에 걸려 몸 휘청거렸지만, 마음이 더 아팠다. 멕시코 사람들이 결코 게으른 사람들이 아닌데, 젊은이들은 열심히 일을 해도 제대로 보상을 받지 못하는 사회구조 때문에 고생을 하고 있었다. 또 노인들은 아파도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한국에서 구입해 할머니들의 선물로 가져 머리 지압기와 무릎 통증 완화제들은 그들의 고통에 비하면 새발의 피로 여겨져 마음이 아려왔다. 아무래도 앞으로 후진국 여행은 더 이상 못 다니겠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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