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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ra 유현정 Aug 02. 2023

이제는 이실직고를 해야겠다

<실화소설 9> 김비야의 염색체는 무엇일까


Y가 곰곰 생각을 보니,

H2의 인생에는 몇 가지 핵심 키워드가 다.


다들 눈치를 챘겠지만, 첫 번째 바로 '자유'다. 어린 나이에 스스로 미국 유학의 길을 선택하고 홀로 떠난 것도, 성인이 되면서는 지칠 줄 모르는 여행의 욕구가 그것을 증명한다. 요즘 세상에서 자동차와 비행기를 대신하여 도보로 또는 자전거로 대륙을 종단하는 뚝심은 틀에 박힌 삶을 거부하는 자유의 정신에 뿌리를 두고 있다. 무소유를 추구하는 것도 어쩌면 물질로부터의 구속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안간힘이 아닐까. 깃털처럼 가볍고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 같은, 자유라는 가치를 추구하지 않고서는 가능할 수 없는 일이다.


H2가 두 번째로 추구하는 가치는 '봉사'다. 주변의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일에 관심이 많았다. 직업을 선택할 때도 타인을 도와주는 일에 흥미를 보다. 라스베가스의 호텔에서는 고객의 고충을 상담하 해결는 일을 자원했고, 동료와 상사의 인정을 받았다. 봉사와 나눔의 삶은 보통사람들 또는 요즘 젊은이들이 돈과 성공, 인기와 명예 등을 추구하는 것과는 거리가 아주 멀었다. Y는 나이가 50을 넘은 이후에야 뒤늦게 이런 가치의 소중함을 고 있으니,  H2를 이해하고 기특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여권을 재발급받기 위해 잠시 머물아틀랜타에서, H2는 자신의 내면 소리를 똑똑이 들었다. 마이애미 두고 온 무료급식소와 이를 운영하고 있는 목사님 그리고 거기서 일하는 디디를 도와주고 싶다는 마음의 소리였다. 무료급식소는 마이애미에서 배낭을 잃고 절망에 빠져 거리를 배회할 때, 마치 수호천사처럼 다가온 디디가 이끌었던 곳이다. 디디는 그곳에서 H2의 허기진 배를 채워주며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모든 것을 잃은 도시였지만, 그곳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밥을 나눠주고 절망한 H2를 위로한 위대한 곳이다. 


H2는 언젠가 무료급식소를 운영하고 싶은 꿈이 있었다. 그러니 마이애미는 운명인지도 모르겠다. 보통 무료급식소라 하면 노숙자를 떠올리지만, 여기를 이용는 이들은 대부분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이라고 하였다. 미국은 물건이 넘쳐났다. 식재료는 주변의 마트에서 기증을 았는데,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 주고도 항상 남아돌아서 폐기처분하였다. 하루에 한 끼를 제공하지만, 일손이 부족해서 정규 직원 외에 봉사자들이 돕고 있었다. H2는 두 팔을 걷어붙이고 새벽부터 늦은 오후까지 주방에서 음식을 준비하고, 배식을 하며 하루를 보내기 시작하였다.


디디가 다니는 교회에도 같이 나갔다. 무료급식소를 운영하는 사람도 목사였지만, 봉사를 하는 데 있어서 교회만 한 곳을 찾기 어려웠다. 기독교가 뿌리 깊은 사회이니만큼 사랑의 실천에 앞장서고 있는 것이다. H2는 디디와 함께 교회의 행사를 돕는 일에 발 벗고 나섰다. 이러한 진심은 서로 통하는 법이어서 H2는 주변의 사랑을 듬뿍 받고, 나날이 얼굴에 함박웃음이 피기 시작하였다. 자신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일 속에는 보람과 행복이 있다. H2는 자신의 불행 속에 머무는 대신, 타인을 위한 삶 속으로 뛰어들어 기어코 귀중한 행복을 찾아냈다.


세 번째 키워드는 가장 최근에 가치를 알게 된 '명상'이었다. H2는 멕시코로 여행을 떠나기 전, 캘리포니아 샌디에이고에서 여러 달 머물며 수행하명상센터 디어파크에서의 생활을 이어갔다. 틱낫한 스님의 가르침지금에 깨어있음으로써 물질이 아닌 마음의 행복을 추구소중한 배움이었다. 자신의 호흡을 바라보며 마음을 살피는 것은 낯설지만 신선한 경험이었다. 그리하여 매일 명상을 생활화하여 마음을 소중히 다루는 삶은 평생 추구하고 싶은 가치가 되었다.


마이애미에서도 틈틈이 명상을 이어나갔다. 마이애미 해변의 모래 위에서, 공원의 커다란 고목의 나무둥치 안에서, 깜깜한 밤에는 벤치에 누워 달빛 아래서 호흡을 지켜보며 명상을 하였다. 인간이라기보다는 그저 자연의 일부로서 존재한다고 생각하면, 온 우주와 하나가 되는 느낌으로 마음이 평안하고 충만해졌다. Y는 그런 H2의 일상을 전해 들을 때마다 여러 감정이 교차하였다. 한편으론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고된 체험을 해야 만족할까를 생각하면 가슴 한켠이 아려왔다.


마이애미 무료급식소의 풍경




이쯤에서 Y는 아무래도 이실직고를 해야겠다 마음먹었다. H2에게는 탄생의 비밀이 하나 있었다. Y는 시간을 거슬러 거슬러 올라갔다. 마치 연어가 알을 낳기 위해 강을 따라 거꾸로 올라가는 것처럼. 러 날에 걸쳐 간신히 도달그곳에는 Y가 이제 막 H2를 임신했다는 기쁜 소식이 도착해 있었다. 혹시 아들을 바랐던가. 오, 절대절대 놉!! Y는 자라면서 성차별의 경험이 없었고, 오히려 여자이기 때문에 더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그저 H1이 나중에 부모를 모두 잃었을 때, 여자로서 혼자 남겨지는 것이 너무 불쌍했기 때문에 형제자매를 만들어 주려 계획했을 뿐이다.


그러나 주변이 다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우선 남편인 K의 생각을 들어보자. K는 자기와 같은 성을 가진 자식이 하나쯤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남자로서 자신의 분신 같은 아들 하나를 키우는 재미를 만끽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뭐 대를 잇기 위해 사내아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요즘 세상에서 공부한 사람의 평균 정서는 가지고 있었다. 그저 자신이 남자이기에 동성의 자식을 잘 키울 수 있을 거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었다. 하지만 자식은 신의 뜻임을 알고 있기에 포기할 줄도 알았다.  


K의 기대가 이 정도로 순한 수준에 머물렀다면, 장모인 박여사는 아들에 대한 애정이 집요해서 도를 넘었다. 박여사는 꽃다운 나이에 장남에게 시집가서 딸 넷을 낳을 동안 시어머니의 구박을 받은 걸 생각하면 지금도 몸서리가 쳐졌다. 남편의 공부 뒷바라지를 핑계로 시집을 뛰쳐나와 갖은 고생을 다했지만, 다섯 번째로 아들을 낳고 나서는 남 부러울 것이 없었다. 지금도 아들을 낳던 순간의 기쁨은 말로 다 형용할 수가 없다. 하늘을 두둥실 날아본다거나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한 순간이었다. 금이야 옥이야 애지중지 키우며 달콤한 시간을 맛본 것이다.


그런데 셋째 딸 Y 아직 아들이 없어서 서운했다. 첫째도 둘째도 시집을 가서 아들을 하나씩 쑥쑥 잘만 낳았는데, 어려서부터 허약해서 늘 마음이 쓰이던 Y만 아들이 없는 것이다. 박여사는 여기저기 수소문을 하고 사방팔방 알아보며 아들 낳는 방법을 강구하였다. 그러다 드디어 아들 낳는 한약을 지어서 Y 앞에 내놓았는데, 이미 임신이 되어 성별이 확정된 시점에서 약을 먹는다는 것은 누가 봐도 어리석은 일이었다. 하지만 엄마의 정성과 남편의 소원을 생각해서 Y는 두 눈을 감고 그 약을 꿀떡 삼켰다.


뱃속에서 아기는 무럭무럭 자랐다. 그런데 약을 먹어서인지 아기가 H1는 많이 달랐다. 우선 입덧 일찍 멈췄다. 태동도 H1이 수시로 발로 배를 세게 걷어찬 것과는 다르게 순하디 순했다. 뒤태도 두리뭉실한 것이 배만 볼록하던 H1과는 사뭇 달랐다. Y는 한약이 참으로 희한하다고 생각하며, 남편 K에게 아무래도 이번엔 아들인 것 같다고 거의 확신하였다. 박여사와 K 크게 기대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그러면 그렇지! 한약신의 뜻을 거역하고 어찌 무슨 재주를 부린단 말인가!! 


Y는 H2가 딸이어서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보다 딸인 H1의 입장에서 본다면, 동생이 남보다는 여동생이 훨씬 좋은 선물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자매는 자라면서 공동의 관심로 함께 놀기도 좋고, 어른이 되어서는 둘도 없는 친구로 거듭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Y는 H2를 기르는 동안 어디로 튈 지 모르는 럭비공처럼 사내아이보다 더 대범하여 가끔씩 가슴을 쓸어내리는 경험을 하면서, 혼자 속으로 모든 게 그놈의 한약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곤 하다. H2의 염색체가 XY 되 못했지만, H2의 심장 깊숙한 곳에는 염색체 Y보다도 더 화끈언가가 도사리고 있는 것만 같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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