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산청의 한적한 마을. 그곳엔 연로한 목사님 부부가 운영하는 작은 단식원이 있었다. 지인이 내게 이곳을 추천해 준 건, 내 생활을 옆에서 지켜보던 그가 한마디로 정리한 이유 때문이었다.
“암은, 네가 너무 바쁘게 살아서 생긴 거야. 몇 날 며칠 그냥 푹 자. 나도 그랬어.”
그는 자신도 견디기 어려운 일을 겪었을 때, 바로 이곳에서 며칠을 내리 잤다고 했다.
나에겐 상급병원의 본격적인 진단이 이루어지기 전, 남은 일주일이 있었다. 회사에는 갑작스레 휴직계를 냈고, 가족에게도 갑작스레 작별을 고해야 했다. 모든 것이 예상 밖의 속도로 흘러갔다. 이곳 산청에서의 일주일이 과연 내 생각을 정리해줄 수 있을까?
단식원의 하루는 숯가루 한 숟갈로 시작됐다. 방 한 켠, 조촐한 탁자 위에 과거 꿀을 담았을 법한 플라스틱 통이 놓여 있었다. 그 안엔 까만 숯가루가 소복이 담겨 있었다.
“이거 먹으면 몸이 정화돼요.”
목사님의 사모님은 단호하면서도 따뜻하게 말씀하셨다.
물을 한 모금 머금고, 숯가루를 퍼서 입에 넣었다. 숯가루는 입안에서 파스스스— 눈 녹듯이 사라졌다. 그 순간, 그 까만 맛도 함께 사라져버렸다.
잔을 내려놓자, 탁자 한쪽에 놓여 있던 노트 한 권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그건 사모님이 지난 밤 방에 놓고 간, 단식원을 거쳐 간 이들의 ‘기적의 후기 노트’였다.
“피가 맑아져 아토피가 다 나았어요. 기적이에요.”
“하와이에서 올 때만 해도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감사합니다.”
“사모님 덕분에 건강해져서 갑니다.”
낡은 노트 속, 각양각색의 필체로 쓰인 글들. 의심 많은 나지만, 적어도 이 후기들이 ‘친필’이라는 건 확실했다. 현대의학도 못 고친다는 병들이, 이 허름한 시골집에서 나았다는 이야기들. 진짜일까?
믿고 싶기도 하고, 믿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기적이라고 하기엔 너무 소박한 곳, 기독교 색채가 진한 이곳에서, 종교색 없는 나는 멍할 뿐이었다.
믿는 것도, 믿지 않는 것도 아닌 상태. 그저 머릿속이 하얗기만 했다.
잠시 후, 거실에서는 예배가 시작됐다. 시골집 특유의 나무 냄새가 은은하게 퍼지는 가운데, 연세가 80은 족히 되어 보이는 목사님이 자동 성가 반주기를 켰다. 사모님은 성가책 더미 속에서 한 권을 꺼내 내게 건넸다.
“시작성가 115번, ‘수난 기약 다다르니’입니다.”
성가책을 펼치려 손끝을 갖다 대자, 종이가 바람 한 줄기에도 펄럭일 듯 얇았다. 마치 오래된 성경책에서나 볼 수 있는 반투명한 종이. 손가락에 힘을 조금만 줘도 찢어질 것처럼 여리고 가벼웠다. 종이가 찢어질까 성가책을 한장씩 넘기자, 사모님이 성가책을 대신 펴주었다.
목사님, 사모님, 그리고 허름한 거실. 그 한가운데, 도시의 고층 빌딩에서 ‘똑소리’ 나게 일하던 박 과장은 없었다. 대신, 멍하니 숯가루를 넘겨버리고 나무 거실바닥에 안장다리를 하고 앉아있는 여자 하나만 이곳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여자의 일주일은, 지금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