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기스탄을 1시간 동안 관람한 후로 엄마의 컨디션은 급속도로 안 좋아졌다. 택시 뒷자리에 탄 엄마는 계속해서 콜록대시며 기운이 없는지 눈까지 감아버렸다. 아지즈는 우리를 영묘들이 모여있는 구르 아미르 광장과 샤이진다에 차례대로 데리고 갔는데, 모두 아지즈의 인맥으로 무료 입장할 수 있었다. 구르 아미르 광장에서 매표소를 지키고 있는 사람이 아지즈를 보더니 손을 내밀며 아지즈에게 다가왔다. 아지즈 역시 아살람 알레이쿰이라고 인사를 건네더니 오른손을 내밀어 악수를 하고 왼손으로 그 사람과 포옹을 했다. 그 사람은 바로 아지즈의 처이모부였다. 아지즈는 처이모부에게 자랑스럽게 우리를 우즈베크어로 소개했고 우리는 이곳도 무료로 들어갈 수 있었다. "우리 아내의 친척이에요. 지난주에 같이 술 마셨어요." 본래 무슬림은 술을 마시지 않는데, 아지즈 역시 규율에서 약간은 느슨한 무슬림인 듯했다. 사마르칸트의 유적지는 정말 화려하고, 볼 것도 많았다. 느낌상 사마르칸트는 한국의 경주였다. 오래된 도시답게 유적이 넘쳐났다. 하지만, 거의 무슬림의 영묘들이고, 엄마가 아프셔서 겉핡기만 할 수밖에 없었다. 엄마는 구르 아미르 광장까지는 택시에서 내려서 아주 천천히 관람을 하셨으나, 샤이진다에 갔을 때는 도저히 못 내리겠는지 택시에 있겠다고 하셨다.
샤이진다 사진(출처 : tripadvisor)
러시아에서 치료받았던 아지즈의 형 영묘들이 대규모로 묻혀있는 샤이진다 근처에는 일반 무슬림들의 묘도 잔뜩 있었다. "우리 형도 저기 있어요." 아지즈는 산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지즈에게는 본래 나이 차이가 나지 않는 형이 있는데, 3년 전 폐병을 앓아 병원을 찾아 러시아로 갔었다고 한다. 우즈베키스탄에는 좋은 병원이 없어, 가족들이 돈을 모아 형을 러시아의 좋은 병원에 보냈는데, 거기서도 크게 호전이 없어 다시 본국으로 돌아와 시름시름 앓다가 하늘나라로 떠났다고 한다. 중앙아시아에서는 좋은 병원 하면 러시아를 손꼽는 듯했다. 아이비에커네도 부부가 결혼하고 몇 년간 아이가 생기지 않자, 아이비에커가 회사에 얘기해서 난임병원 다니느라고 몇 년간 러시아 모스크바에 살았다고 했다. 평소에 생활할 때는 잘 모르겠지만, 큰 병이 나거나 사고가 나서 진단을 받아야 할 때, 병원과의 거리가 먼 것은 얼마나 큰 제약인가. 삼성병원 바로 앞에 사는 내가 평소 느끼지 못했던 불편함이었다.
남자에게 의존하는 우즈베키스탄 여성의 삶 "그럼, 형수님은 어떻게 살고 계세요? 재혼하셨어요?" 내가 묻자 아지즈가 되물었다. "형수가 뭐예요?" "아, 형의 아내요." 아지즈는 한국에서 10년 정도 체류했는데도, 일에 관련된 한국어만 익혔고, 문맹이라 한국어도 읽거나 쓸 줄 몰랐다. 그러기에 농사일과 관련하지 않은 거의 모든 어휘는 잘 모르는 듯했다. 아지즈의 형수는 형이 떠난 후에도 같은 집에 산다고 했다. 나는 문득 형수가 어떻게 생활해 나가는지 궁금했다. 우즈베키스탄에서는 여자는 대부분 사회적 제약이 있어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하고, 남편이나 아들에 의존해서 살기 때문이다. "형의 아들(조카)이 20살이에요. 일해요." 다행히 아지즈의 형은 일찍 결혼해서, 다 큰 아들이 벌써 독립해서 일을 해 가정을 부양하는 듯했다. 우즈베키스탄에서는 노후 대책이 바로 아들이고 따로 저금을 하지 않기 때문에, 만약 남편이 죽고, 자신을 부양할 아들도 없다면, 경제적으로 궁핍해질 수밖에 없는 구조 같았다.
형수가 재혼할 수 있냐고 묻자, 형수는 과부니까 재혼할 수 있지만, 하지 않았다고 했다. 형수는 아지즈의 옆집에 사는데, 아지즈는 어머니를 모시고 있으니, 형수는 남편 없이도 아직 시어머니의 옆집에 사는 셈이었다. 우즈베키스탄은 대가족 문화가 있어, 가족들이 부계중심으로 대부분 모여사는 것 같았다. 아이비에커네도 그랬다. 옆집에 친척이 살아서, 친척 조카가 매일 집에 놀러 오거나 집안일을 도와주러 왔었다.
"아지즈는 돈을 벌면 월급을 아내한테 주고 있어요?" "내가 집에 들어갈 때 먹을거리를 사가요. 고기, 쌀, 야채 이런 것들. 그러면 아내는 요리하면 돼요. 아내가 친구 만나러 갈 때만 돈 조금 줘요." 결국 아내는 하루종일 집에 있으면서 시어머니와 살면서 아이들을 키우고 살림하는 것으로 하루를 보내는 듯했다. 아이비에커네 집에 갔을 때도, 바허네 집에 갔을 때도 느꼈던 건데, 우즈베키스탄에서는 결혼한 여자는 거의 하루종일 집에서 생활하는 듯했다. 경제권도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남편이 장까지 본다면 아내는 슈퍼마켓도 자기가 직접 가지 않는 것이니 거의 집에 갇혀있는 것이나 별반 없었다. 우즈베키스탄보다는 여자에게 제약이 적은 한국에서 온 나로서는 정말 듣는 것만으로도 갑갑한 생활이었다. 만약 나도 여자가 사회생활을 하는 나라에서 오지 않고, 우즈베키스탄에서 나고 자라 여자가 집에 갇혀있는 게 익숙하다면, 남편이 필요할 때만 조금씩 주는 돈만 받고, 거의 집에서 생활을 하는 데에도 행복을 느낄 수 있을까.
우리는 호자 도니요르 묘소(Xo'ja Doniyor Maqbarasi) 앞 약수터에서 물을 떠먹고는 택시로 돌아왔다. 엄마는 더운 택시에 문을 열어놓고 눈을 감고는 뒤로 목을 젖힌 채 거의 실신 직전으로 누워있었다. 엄마의 상태를 봐서는 더 이상 관광하면 안 될 듯하여, 숙소로 돌아가자고 하였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아지즈에게 물었다. "제가 고기를 안 먹는데 혹시 현지 음식점 추천해 줄 거 있어요." "우즈베키스탄 솜사 먹어봤어요? 아주 맛있어요. 솜사는 빵인데, 아... 고기가 안에 있어서 안 되겠네요. 아, 그리고 호텔 앞에 아주 유명한 터키 레스토랑이 있어요. 너무 아름다운 식당이에요. 거기 유명한 음식이 케밥인데..." 아지즈에게 채식이 가능한 식당을 물은 내가 잘못이다. 아지즈는 우리와 내일 관광을 또 같이하길 절실히 바랐지만. 택시 관광은 택시기사도 신경 써야 하고, 엄마도 신경 써야 해서 은근히 불편했다.
호자 도니요르 묘소 앞 약수터
호텔에 도착한 엄마는 그 길로 침대에 드러누웠다. 나는 엄마에게 온전히 쉴 시간을 드리기 위해 유아차를 끌고 주원이와 요기할 것을 찾아 떠났다. 호텔에서 약 10분 거리에 다행히 채식이 가능한 세련된 이탈리아 양식집이 있었다. 분위기 때문일까. 파스타도 조금 나오면서 가격은 현지 물가 대비 너무 비쌌다. 우리가 토마토 파스타를 시키고 쉬고 있을 때, 옆에 아이 2을 데리고 온, 히잡 쓴 여인을 만났다. 아이는 아이를 알아본다. 주원이가 히잡 쓴 여인의 자녀들과 인사를 하고 있자, 히잡 쓴 여인이 대뜸 말을 걸었다. "한국인이세요?" 사마르칸트는 유독 한국어 할 줄 아는 사람이 많았는데, 여기서도 만나다니. 히잡쓴 여인은 몇 년 전 가족 중 한 명이 한국에 일하러 가서, 자신도 한국에 잠깐 갔었다고 했다. 여인은 콩국수와 콩나물무침이 그립다고 했다. 주원이는 오랜만에 중앙아시아 음식을 벗어나 파스타를 먹어서 그런지 맛있다는 말을 연달아하며 성인 1인분의 파스타를 순식간에 다 먹었다. 나와 주원이는 근처 슈퍼에서 야채와 쌀을 사다가 호텔의 주방을 빌려 야채죽을 끓여, 하루종일 제대로 드시지 못한 엄마에게 드렸다. 엄마는 하루종일 굶은 결과 허기가 지셔서 그런지 김가루를 뿌리고, 마늘 피클을 얹어 맛있게 드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