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을 숨기기 위해 담담함을 가장하기도 한다. 아무렇지 않은 듯 허리를 꼿꼿이 세워보지만, 헐벗은 마음은 시린 바람이 불고, 외로움이 딱딱하게 굳어버린 나뭇가지를 할퀴고 지나간다. 어찌나 이를 악물었는지 잇몸을 타고 비릿한 피맛이 느껴지지만, 버텨야만 한다. 도망치면 안 돼. 옆사람에게 기댈 것 같으면 차라리 죽어버리는 것이 낫다.
자존심. 그깟 것이 뭐라고. 품에 안겨 눈물 한 번 마음껏 흘려버리지 못했는지. 지키고 싶었던 것은 자존심일까? 아니면 상대방의 마음속 내 자리일까? 못하면 버림받는 줄 알았다. 그냥 존재하는 것 만으로는 사랑받지 못하는 줄 알았다. 내가 그저 가만히 누군가에게 사랑받을 수 있을까? 내 몫의 일을 해내는 것만이 인정받을 수 있는 길이야. 강박은 그렇게 마음의 시위를 당긴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이 결함 투성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나 같은 사람을 누가 좋아하겠어? 나를 제대로 알면 모두 나를 떠나갈 거야. 숨겨야만 해. 그래야 버림받지 않을 수 있어.' 그래서 항상 가면을 쓴 채 살아간다. 멋지고 아름답고 능력 있고 자상하고 배려 깊은, 그런 사람으로 평가받고 싶어 한다. 그런데 이것이 쉽지가 않다. 맞지 않는 옷을 입으려다 보니 어딘가 꽉 끼이고 불편하다. 금세 진이 빠지고 힘이 든다. 하지만 이미 무대 위의 내 모습이 진짜라고 호언장담해왔다. 이제 와서 화려한 옷을 벗어던질 용기가 나지 않는다. 모두 나를 거짓말쟁이로 여길 것 같고 그런 비난을 견딜 수 없을 것 같다. 무시당하기 싫다. 결점 투성이 나를 다른 사람에게 들키고 싶지 않다. 그래서 맞지 않는 옷에 몸을 맞춘다.
겉은 화려해졌지만 속은 공허하다. 끝없는 연기에 지쳐버렸다. 나만 생각하고, 자유롭게 행동하고 싶고, 화내고 싶은 일들이 너무 많지만 나는 언제나 무대 위에 서야 한다. 무대 뒤쪽으로 빠지면 쉴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넘기고 싶지 않다. 나는 인정받아야 하고, 주목받아야 한다. 공허한 마음을 채울 방법은 오직 그것뿐이다. 그래서 나는 무대를 떠날 수 없다. 휴식과 편안함은 죄악이다. 게으른 나로 돌아가서는 안된다. 거울을 바라보며 끊임없는 자기 검열과 사투를 벌여야 한다.
"인정받고 주목받으려면 무대 위에 서야만 하는 거야? 그게 정말 네가 원하는 거야?"
준비되지 않은 불안, 잘 해내지 못할 것 같은 불안, 사람에 대한 불안, 거절당하기 싫은 마음, 짐이 되고 싶지 않은 마음, 실패에 대한 걱정, 실패한 이후에 대한 걱정, 낙심에 대한 두려움, 해결하지 못하면 어쩌지? 조바심으로 안절부절못하게 되고 마음의 결핍을 확인사살당할까 봐 겁이 난다. 약한 모습을 절대 들켜서는 안 된다. 꾹꾹 눌러 담고 밀봉해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구석진 곳으로 밀어 넣어버린다.
"자존심만은 지켜야 해. 아무도 나를 무시하지 못하게 할 거야."
"누가 그토록 너를 무시했어?"
"대놓고 무시하는 사람은 없어. 모두는 서로를 평가하고 있지. 앞에선 그럴 수도 있다고 말하지만 속으로는 비웃고, 경멸하고, 깔보고, 무시하고 있을 게 분명해."
"사람들에게 무시당하지 않는 것이 그렇게 중요해?"
"내가 그들에게 무시당할 이유가 없으니까."
"무시하지 않는 걸 어떻게 확인할 수 있어? 대놓고 표현하지도 않는데?"
"표정, 눈빛, 말투를 보면 알 수 있지."
"그런데 궁금한 게 있어. 왜 다들 너를 무시할 거라고 생각해? 내가 보기엔 넌 꽤나 멋진 사람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