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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투리 Oct 09. 2023

그 해 겨울

필섭 시점 상춘일기_03




그해 겨울은 '파괴의 신'이 함께 하는 것 같았다. 물건도 사람도 남아나질 않았다.

베란다 앞 감나무에 감이 익어가던 가을, 그는 일이 많았다. 출장도 많았고 마감해야 할 원고도 많았다. 서너 시간밖에 못 자는 날이 많았고 그만큼 피곤해했다. 그즈음 집 안의 물건들이 고장 나기 시작했다. 친구들을 초대한 전날 전기밥솥이 고장 나고 청소기가 빌빌댔다. 겨울이 오면서 전기포트가 고장 나고 냉장고가 작동을 멈추었다.


12월 중순, 상춘은 심각한 어지럼증으로 일요일 새벽부터 꼬박 하루를 응급실에서 보냈다. (역시 갑작스런 공포는 휴일에 온다.) 전정신경염 진단을 받았다. 걷지도 먹지도 자지도 못하는 시간을 보냈다. 이주쯤 지나 증세가 호전되었다 싶었을 때 오른쪽 얼굴에 마비가 왔다.


상춘에게 힘겨운 먹고 마시는 일





새해가 되었고 한파에 수도가 두 차례 얼었다. 하수도가 막혀 주방이 물바다가 된 건 네 번쯤. 주방 쪽 베란다는 결로로 인해 빙벽이 생겼다 녹았다 하면서 곰팡이가 피었다. 난 수시로 바닥의 물을 닦고 곰팡이를 닦다 어느 날엔 걸레를 던졌고 어느 날엔 울었고 어느 날엔 그냥 포기했다.


그때 매일의 중요한 일과는 상춘을 태우고 한의원에 다녀오는 것이었는데, 어느 날은 치료를 마치고 지하 주차장에 와보니 운전석 쪽 타이어가 완전히 퍼져있었다. 저녁 즈음이었다. 난생처음 견인을 했고 타이어를 교체했다.


최악의 한파가 계속되던 어느 날은 집 앞 내리막을 내려가다 차가 멈추었다. 경유가 얼 수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온 동네 경유차가 얼어서 많이 늦을 거라는 견인차 기사님의 전화를 받고 상춘을 택시에 태워 한의원에 보냈다. 나는 근처 카페에서 두 시간 넘게 견인차가 오기를 기다렸다. 경유가 또 얼면 어떡해야 하느냐는 나의 질문에 견인차 기사님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겨울엔 그냥 경유차는 타지 말라고. 고이 모셔두었다 봄이 되면 타라고. 그런 개똥 같은 조언에 대꾸할 힘도 없이 겨울을 지나고 있었다.


뻑뻑한 얼굴은 수시로 만져줘야 한다. 굳지 않도록. 아니 이미 굳었지만 조금은 시원해지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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