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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사랑 Sep 19. 2021

곱슬머리 여신은 없다

젊은 곱슬머리의 슬픔

드라마 대본에 못생긴 여자가 등장한다. 당신이 만약 드라마 PD라면 이 못생긴 여자의 모습을 어떻게 구체화시키고 싶을까? 화면 속 배우가 어떤 모습을 해야 못생겼다는 설정에 시청자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을까? 드라마 '그녀는 예뻤다'에서는 악성 곱슬이었다. 좀 많이 섭섭한 아빠의 유전자가 몸속 어딘가 꼭꼭 숨어있다가 사춘기 시절 뒤늦게 발현되는 바람에 역변해버리고 말았다는 설명과 함께. 그녀의 등장 씬은 꽤나 강렬했다. 드라마 속 아빠를 쏙 빼닮아 홍조 가득한 얼굴에 부스스한 곱슬머리.


드라마 그녀는 예뻤다에서 못생긴 설정의 악성 곱슬 여주인공. (출처: the official YouTube page of MBC, MBCdrama)


나는 곱슬머리다. 숱도 많고 머리카락도 두꺼워서 미용실에 갈 때마다 돈을 더 받아야 한다며 한 소리씩 들었다. 그러면서도 수개월마다 미용실에 꼭 가야만 했던 이유는 곱슬머리는 지저분하고, 곱슬머리는 해결해야 할 문제이며, 곱슬머리는 못생겼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남자들에게 입영통지서가 머리발 걷어내고 민낯으로 가는 티켓이라면, 여자들에게는 아기 초음파 사진이 그렇다. '임신해도 예쁘다'는 연예인 기사는 '임신하면 예쁘기 힘들다'는 의미가 숨어있다. 내가 임신했을 때를 생각하면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적어도 날 때부터 곱슬이던 나에게는 그랬다.


임신 사실을 알자마자 입덧과 함께 가장 큰 도전으로 다가온 것이 헤어 스타일이었다. 매직 스트레이트 펌으로 머리를 정돈할 수 없게 되었다. 아직 채 인간의 모습을 갖추지도 못하고 젤리 곰 같은 모양으로 내 뱃속에 자리 잡은 아기가 걱정되었다. 태아에게 헤어 약품이 안전한지 과학적으로 검증된 것은 아니라 하니 영 내키지 않았다. 조금 안정기에 들어선 후에도 나중으로 미뤘다. 불룩 나온 배로 미용실 의자에 대 여섯 시간 앉아있는 것은 나에게도, 아기에게도 무리였기 때문이다.


'아기 낳으면 해야지' 했던 것은 '수유 끝나면 해야지, 둘째 나오면 해야지'가 되었다. 헤어 스타일, 하이힐, 패션, 화장, 렌즈. 나를 치장해주던 것들이 더 이상 내 본래 모습을 가려줄 수 없었다. 엄마 아빠에게 물려받아 세상에 나올 때부터 결정되어있던 나의 모든 것들이 포장지를 벗기듯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예쁘지 않아 보였다. 아기를 위한 것이었지, 나를 위한 것은 아니었다.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아기를 위해 잠시 내가 못생김을 선택했다고 생각했다.



산드로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  @Naver 미술 백과



산드로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이라는 그림이 있다. 미술 칼럼니스트 이민수 님의 '명화 속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비너스의 특성은 둘로 구분된다. 하나는 육체적인 아름다움과 쾌락적인 사랑, 다른 하나는 영혼의 아름다움과 정신적인 사랑.


그런데 그 두 가지는 불가분의 관계다. 플라톤 철학에 영향을 받은 르네상스 시대 신플라톤주의자들은 인간이 육체적 아름다움에 대한 깊은 성찰을 통해 정신적인 아름다움을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나는 그림 속 여신 비너스의 흠잡을 데 없는 육체적 아름다움을 통해 우리가 지금까지 사랑하지 못했던 조금 다른 종류의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그림 속 비너스는 컬리 헤어(Curly hair)를 가졌다. 곱슬머리라고 하지 않고 컬리 헤어라고 한 이유는 우리가 갖고 있는 곱슬머리에 대한 오해 때문이다. 앞으로 이 매거진에서 차차 그 오해에 대해 다루어 볼 예정이다. 그녀는 컬리 헤어의 여러 타입 중에서 Wavy 혹은 S'wavy의 컬을 가진 천연 곱슬머리로 보인다. 윗머리는 컬이 좀 더 타이트하고, 살짝 묶어서 어깨 아래로 드러난 속 머리는 컬이 좀 더 느슨하다. 모낭의 위치에 따라 컬의 종류가 다른 것은 파마머리와 구별되는 천연 곱슬머리의 큰 특징 중 하나다.





비너스의 곱슬머리를 좀 더 확대해서 자세히 보자. 그림 좌측, 바람의 신 제피로스의 입김에 머리카락이 날리는데도 컬 모양이 뚜렷하게 잡혀있다. 컬 주변에 컬을 지저분하게 만드는 부스스한 잔머리(정확한 용어로는 프리즈 Frizz)도 없다. 이것은 건강한 곱슬머리의 특징이다. 오랜 기간 동안 수많은 미술가와 대중들로부터 작품의 주제로 환영받아 온 아름다움과 사랑의 결정체, 미의 여신 비너스가 곱슬머리였던 것이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몸에 천연 곱슬머리 비너스. 그 무엇으로도 꾸미거나 가공하지 않은 본연의 모습이다. 임신을 시작으로 육아를 하며 모든 포장지를 벗겨낸 내 모습은 참 싫었는데,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곱슬머리 비너스가 예뻐 보인다. 그녀는 자연스럽다. 거리낄 것이 없고 불편할 것이 없었던 에덴동산의 하와 같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벗어젖혀버리는 브래지어나 집에 오는 차 안에서부터 빼 버리는 렌즈 따위는 없다. 모든 것이 편안하다.


그런 비너스에게 한국 미용실 룩북 Lookbook에 있는 흔한 여신머리를 붙여 상상해 보자. 그랬다면 그녀가 가진 아름다움이 지금과 같은 평가를 받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미용실 룩북 속 헤어 스타일은 유행에 따라 빠르게 다른 것으로 대체되기 때문에 언젠가는 촌스러울 수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비너스가 가진 육체적 아름다움이 인간의 마음을 초월하는 정신적 사랑과 영혼의 아름다움에 도달하게 만든다는 평가는 받기 어렵지 않았을까?



나의 천연 곱슬머리.



곱슬머리 바이블이라 불리는 Lorraine Massey의 'Curly Girl: The Handbook'에 이런 말이 나온다.



It's your head, not your hair, that needs straightening.
(곧게 펴져야 할 것은 당신의 머리카락이 아니라 생각이다.)



모두가 여신이 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곱슬머리가 여신이 될 수 없다는 오해는 곤란하다. 몇 세기를 걸쳐 아름다움의 상징으로 사랑받아 온 미의 여신 비너스도 곱슬머리였는 걸. 곱슬머리는 가려야만 아름답고 펴야만 예쁘다는 것은 우리가 오랫동안 가져온 편견이다. 건강하게 관리한 곱슬머리는 충분히 아름다움의 한 종류를 대표할 수 있을 만큼 아름답다. 


곱슬머리에게 필수로 여기던 매직 스트레이트 펌이 우리 사회의 미의 기준마저 편평하게 만들어버린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면 좋겠다. 곱슬머리는 머리카락이 원래 가진 결합을 분해하고, 뜨거운 열과 약품으로 납작하게 고정해놓아야만 아름다울 수 있다면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악성이라는 두 글자를 앞에 붙여 고치기도 어려운 병이 되어버린 오명을 벗고 곱슬머리가 가진 원래의 아름다움을 되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취향의 문제는 될 수 있어도, OX의 문제는 결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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