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원숭이 대왕과의 결투
<구청을 찾아가다>
원숭이 대왕이 그톡록 힘이 센 비결이 문화비축기지의 썩은 기름에 있다는 걸 알고나서
며칠 후에 할아버지와 재경이는 버스를 타고 마포구청에 갔어.
구청 건물은 학교보다도 훨씬 크고 다니는 사람도 많아서
재경이는 잘못하면 길을 잃을까봐 할아버지 손을 꼭 붙잡고 갔지.
숨이 차서 마스크를 벗고 싶었지만 꾹 참았어.
할아버지도 힘이 드셨는지 가끔씩 나무 의자에 앉아서 쉬었다 갔지.
할아버지가 1층에 있는 안내소에 가서 제복을 입은 어떤 아저씨에게
핸드폰에 들어있는 사진을 보여주며 한참을 설명하자
그 아저씨가 안경 너머로 아리송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어.
“환경과나 공원녹지과에 가보셔요. 4층에 있어요.
그런데 요즘 집에서 재택 근무하는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어서 담당자가 자리에 있을까 모르겠네요.”
할아버지와 재경이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에 있는 환경과로 갔지.
“무슨 일로 오셨어요?”
이모처럼 머리를 짧게 자른 아줌마가 마스크를 고쳐쓰면서 재경이와 할아버지를 번갈아보며 물었어.
할아버지가 좀 설명이 길다고 말씀하시자
그 아줌마가 구석에 있는 의자 두개를 끌어왔어.
재경이에게는 좀 높아서 의자에 앉으면 발이 바닥에 닿질 않았지.
그래도 서 있는 것 보다는 나아서 재경이는 그냥 앉아서 할아버지가 하시는 이야기를 같이 들었어.
“아, 그러셨구나. 그런 일로 여기까지 오시다니 정말 고맙습니다.
저희도 해마다 장마 때면 난지천에 기름이 떠다닌다고 민원이 들어와서 골치였거든요.
그냥 누가 몰래 폐유를 버린다고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네요.
그런데 어떡하죠? 작년까지는 제가 담당이었는데, 지금은 아니고, 지금 담당자는 재택 근무중인데...
아, 잠깐만요. 제게 과장님께 말씀드려 볼게요.”
아줌마가 다른 쪽에 앉아 있던 아저씨에게 가서 뭐라 뭐라 이야기하자
아저씨가 금방 할아버지와 재경이한테로 왔어.
“아이고, 어르신, 정말 고맙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올여름에 장마가 지기 전까지는 꼭 기름이 어디서 유출되는지 알아내서
대책을 세워야 했는데, 조사비도 안들이고 쉽게 원인을 찾은 것 같네요.
문화비축기지는 완벽하게 오염을 제거했다고 들어서 의심하지 않았죠.
의심하더라도 어디서 새는지 알려면 시간과 돈을 많이 들여야 하거든요.
제가 지금 담당자를 나오라고 할 테니 힘드시겠지만 말씀하신 그 장소로 안내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 그럼요 안내하다마다요. 저도 이 동네 주민인데다,
환경을 지키는 일은 어디 사는 누구든 앞장 서야 하지요.”
할아버지의 말씀이 끝나자마자 재경이도 갑자기 하고 싶은 말이 생각났어.
“코로나도 환경이 파괴되서 생기는 거래요. 선생님이 그러셨어요.”
아저씨가 재경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씀하셨어.
“너, 선생님 말씀을 잘 들으니 공부도 잘 하겠구나.”
“공부는 당연하고요. 우리 이재경은 정말 똑똑하고, 씩씩하고 또 용감하지요.”
할아버지가 재경이를 두 팔로 안으며 말씀하셨어.
<사전 준비>
할아버지와 재경이가 구청에 다녀온 지 며칠이 지났어.
구청 아저씨말로는 문화비축기지 지하에 남아있는 기름을 완전히 빼내고,
물 한 방울이라도 지하에서 바깥으로 새어나지 않도록 꼼꼼하게 시멘트로 막는다고 했어.
다행이 그 사이 비가 오지 않았으니까 아마 지금쯤은 단단하게 말랐을 거야.
원숭이 대왕이 그곳을 찾아가도 다시는 기름 한 방울도 찾지 못할 거야.
그리고 드디어 내일! 보름달이 떠서 보통은 원숭이 대왕이 매봉산으로 행차를 가는 날이지.
할아버지와 재경이는 어두워지기 전에 맹꽁이 숲으로 갔지.
숲은 아주 조용했어. 코로나 때문에 숲으로 가는 길의 정자나 쉼터에는
사람들이 앉지 못하도록 접근금지 테이프가 길게 쳐있었지.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도 거의 없고 까악-하는 까치, 꾸우꾸하는 비둘기 소리만 자주 들렸어.
할아버지와 재경이는 혹시라도 원숭이 대왕이 벌써 와 있는지 조심스럽게 살폈어.
하지만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어.
역시나 보통 때처럼 이곳 저곳 먼곳을 다니다가 보름달이 뜨는 날에 맞춰 돌아온다는 이야기가 맞는 것 같았어.
할아버지와 재경이는 제일 먼저 커다란 나무 두꺼비를 찾아가
뱃속에 감추어 놓은 기름 항아리를 찾아냈어.
항아리는 어른 허리만큼의 높이에 외할머니 배처럼 뚱뚱했어.
이상한 냄새가 코를 찔렀어.
할아버지는 남은 기름이 아주 많지는 않지만
그대로 두면 이것만으로도 원숭이 대왕이 먹고 힘이 더 세질 것 같다고 말씀하셨어.
할아버지와 재경이는 물가에 가서 작은 돌을 가져와 항아리 아래 쪽을 깨트려서 작은 구멍을 냈지.
문화비축기지에서 보았던 썩은 기름이 항아리에서 흘러나와
나무 두꺼비가 앉아있는 땅 밑으로 조금씩 스며들었지.
그 다음에 한 일은 나무 매미를 찾아가는 거였어.
매미는 꽃이 모두 져버린 커다란 벚나무에 등쪽을 보이며 매달려 있었는데,
배 쪽을 살짝 뒤집어보니 커다란 구멍이 있었어. 그
리고 그 안에 쇠종이 들어 있었어.
황금처럼 번쩍이지는 않았지만 뭔가 아주 오래 되고 무게가 나가는 것처럼 생겼어.
“재경아, 잘못해서 마술종 소리가 나게 되면 큰 일이 날지도 모르겠다.
혹시라도 우리가 종소리를 듣게 되면 얼음땡이 될 게 분명한데, 이걸 어떻게 하면 좋을까?”
“맞아요. 할아버지, 그 마술종 소리를 한번 들으면 우리도 이 숲 속에서 움직이지 못한다고
쌍둥이 박사가 말한 적 있어요.
그러면 원숭이 대왕이 우리 몸에 화살나무 기름을 바를 테고,
나무처럼 움직이지 못하는 나무 사람이 되어서 원숭이 부하가 되는 거잖아요? 싫어요. 무서워요!”
“재경아, 나한테 좋은 생각이 있다. 내일 저녁에 이곳에 다시 올 때는 솜으로 귀를 단단히 막고 오자.
그러면 우리 귀에는 종소리가 안 들리겠지?
그리고 솜뭉치를 많이 갖고 와서 맹꽁이숲의 동물들 중에 사나운 괴물이나 동물들도 귀를 꼭꼭 틀어막자.
그러면 원숭이 대왕이 아무리 종를 쳐도 얼음땡이 풀리지 않도록 하면 될 것 같구나.
아 참, 혹시 모르니 마술종 안에 들어있는 쇠방울도 솜으로 단단히 싸면 아예 소리가 나지 않을 거야.
그렇게 해두는 게 좋겠구나!”
재경이는 할아버지의 아이디어가 아주 좋다고 생각했어.
이제는 원숭이 대왕이 마술종을 치면 어떻게 하나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어.
아무 것도 들리지 않으면 아무 일도 생기지 않을 텐데 괜히 겁을 먹었던 거야!
“할아버지, 그럼 이제 걱정이 없네요!
내일이면 이 숲 속의 착한 동물들도 마음대로 움식일 수 있겠네요.
제가 도와줄 수 있어서 조금 떨리기도 하지만 정말 기분이 좋아요!
<보름달 아래의 결투>
그렇게 결투 준비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재경이는 흥분이 되어 잠이 잘 오질 않았어.
엄마가 빨리 자라고 해서 침대에 눕긴 했지만,
내일 밤 일이 걱정되기도 하고 기대되기도 하고,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하다 겨우 잠이 들었지.
다음 날 저녁, 할아버지와 재경이는 해지기 전에 맹꽁이 숲에 도착했어.
재경이는 원숭이 대왕이 떡하니 버티고 있을까 봐 겁이 났지만,
할아버지는 낮동안에는 원숭이 대왕이 나타나지 않을 거라며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어.
두 사람은 이전에 재경이네 가족이 소풍 와서 점심을 먹었던 바로 그 테이블,
그러니까 나무 두꺼비 앞에 있는 테이블에서 김밥을 먹었지.
그리고 어제 생각해낸 계획대로 솜으로 사나운 괴물과 동물들의 귀를 막아두고
마술종의 방울도 싸두었어.
잠깐 쉬고 있을 때 재경이의 코에 바람결에 날아온 것인지 살짝 기름냄새가 났어.
어제 깨진 항아리에서 흘러나온 기름 냄새였던 거지.
해가 지기 시작했어. 할아버지와 재경이는 다시 시멘트 전망대로 올라갔지.
해가 완전히 졌고 달빛은 아직 희미했지만 아주 어둡지는 않았어.
바람이 불지 않았는데 저 쪽 보리수 나무 사이에서 무슨 소리가 났어.
할아버지와 재경이는 그쪽을 뚫어지게 봤지.
파르스름하게 눈이 빛나는 원숭이가 임금의자에서 천천히 걸어 내려오더니
쌍둥이 박사 곁을 지나 나무 매미가 있는 나무 쪽으로 향했어.
그러면서 원숭이 대왕은 아주 기분 나쁜 목소리로 말했지
“이번 여행에서는 아무 것도 잡아오지를 못했어.
내 왕국을 더 무시무시한 괴물들로 채워야 하는데, 아무래도 내가 힘이 더 세져야 할 것 같아.
오늘은 기름술을 더 많이 갖고 와서 날마다 마실 거야.
그러니 오늘 밤에는 힘센 괴물들을 많이 데려가야 하겠지.”
원숭이 대왕은 마술종을 꺼내서 흔들었어.
해가 져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지만, 아직 얼음땡이 걸린 괴물과 동물들을 깨우려던 거야.
그렇지만 어디 소리가 나겠어?
몇 번을 흔들어도 종소리가 나질 않는 거야. 원숭이 대왕이 이상하다 싶어 마술종을 살펴보려고 할 때
할아버지가 갑자기 손전등을 원숭이 대왕의 눈에 비추며 소리쳤어.
“이 놈아, 어찌해서 사나운 짐승들을 깨우려는 거냐?”
원숭이 대왕은 갑자기 사람을 만나서 크게 놀랐는지 잠깐 동안 꼼짝을 못하더니,
금새 마술종을 땅바닥에 내던지고는 나무 두꺼비 쪽으로 달려갔어.
할아버지는 원숭이를 쫓아갔고, 재경이는 땅에 떨어진 마술종을 재빨리 주워 할아버지를 쫓아갔지.
원숭이 대왕은 두꺼비 뱃 속으로 들어가 그릇으로 항아리에 안에 든 기름술을 꺼내려 했지만
이미 기름 술은 한 방울도 남지 않았지.
할아버지가 숨 찬 목소리로 원숭이 대왕에게 말했어.
“이제는 소용없다. 썩은 기름은 한 방울도 남지 않았을 것이다.
더 이상 이 곳에서 왕노릇하며 약한 동물을들 괴롭히지 마라.
맹꽁이 숲은 맹꽁이들에게 돌려줘야 한다.”
할아버지가 원숭이에게 다가가 붙잡으려 하는 순간에
할아버지가 그만 땅바닥에 남은 기름에 미끌어져서 넘어지고 말았어.
그러자 원숭이는 그때를 놓치지 않고 달아나려고 했지. 할아버지가 소리쳤어.
“사루야, 불쌍한 사루야, 너를 이곳에서 일허버린 나를 용서해다오.
나도 미안해서 정말 많이 후회했다. 죽은 네 엄마한테도 할 말이 없고...
나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자! 집에 가서 예전처럼 행복하게 살자꾸나!”
원숭이가 잠깐 멈추더니 뒤를 돌아보았어.
눈이 파랗게 몇 번이나 반짝이는가 싶더니 이내 다시 돌아서서 도망가려 했어.
그때 때-앵 하고 마술종 소리가 났어.
재경이가 어느 새 마술종의 솜을 꺼내서 소리를 낼 수 있게 한 거야.
그러니 어떻게 되었겠어. 도망가려던 원숭이 대왕이 얼음땡에 걸렸겠지.
할아버지가 원숭이 대왕의 팔다리를 끈으로 묶어서 움직이지 못하게 했지.
그리고는 재경이가 이번에는 마술종을 때-앵, 때-앵하고 두 번 쳤어.
귀가 솜으로 막힌 괴물들, 사나운 동물들은 그 소리를 들을 수 없었지만,
아기곰과 엄마곰, 맹꽁이들 쌍둥이 박사 같은 착한 동물들은 그 소리를 듣고 움직일 수 있게 되었지.
아기곰과 쌍둥이 박사가 큰 소리로 말했어.
“이제 자유다, 자유! 원숭이 대왕이 붙잡혔다.”
다른 동물들도 팔다리나 날개를 흔들며 외쳤지.
“자유다, 자유!”
<원숭이 사루>
다음날 아침, 할아버지와 재경이는 다시 맹꽁이숲에 도착했어.
멀리서는 몰랐는데 가까이 다가가자 맹꽁이 울음소리와 두런두런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어.
자유를 찾은 맹꽁이들이 숲 이곳 저곳을 뛰어다녔고,
어젯 밤에 떠나지 못한 착한 동물들이 서로 작별인사를 나누고 있었지.
할아버지와 재경이는 맹꽁이숲 입구에서 곧장 나무 두꺼비에게 갔지.
어제 꽁꽁 묶어두었던 원숭이 대왕을 우선 확인해야 했으니까.
두꺼비 안에 쓰러져 있던 원숭이 대왕은 꼼짝도 하지 않았어.
밤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몸도 아주 작아졌지.
아마 기름술을 더 못 먹게 되자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나 봐.
할아버지가 다가가 오래되어 더러워진 원숭이의 모자를 벗기고 얼굴을 들여다 보았지.
“역시 사루였구나. 사루가 사랑을 받지 못하고 버림받더니 괴물이 되었던 거야.
미안하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 편하게 지내자꾸나.”
할아버지는 원숭이, 이제는 대장도 대왕도 아닌 사루를 끌어안고 한참 우셨어.
원숭이는 할아버지 품 안에서 아직도 자고 있었지.
할아버지는 재경이와 쌍둥이 박사에게 꽃집 할머니와 돌아가신 할머니,
그러니까 사루의 엄마가 서로 친구였다는 것과, 사루가 진돗개에게 물리는 바람에
친구 사이가 멀어졌다는 것,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아끼시는 스웨터를 풀어서 사루에게 털모자를 짜 주신 이야기도
자세하게 들려 주셨지.
이야기를 마치고 할아버지는 솔방울처럼 생긴 마술종의 쇠방울을 떼어내어 맹꽁이숲 바깥 쪽 어딘가로
아주 멀리 던지셨어.
방울이 없어져 더 이상 소리를 낼 수 없는 마술종은 기념으로 간직하라고 재경이에게 주셨지.
재경이와 할아버지는 이제 평화를 되찾은 맹꽁이 숲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아직 떠나지 않은 동물들과 인사를 나누었지.
하지만 괴물과 사나운 동물들은 변함없이 옛날처럼 딱딱한 나무 조각으로 그 자리에 서 있었어.
그날 밤에, 신기하게도 아빠가 돌아왔어.
오랜만에 만난 아빠지만 지쳐보이지도 않고 아주 쌩쌩했어.
그래서 재경이는 아빠 곁에 바짝 붙어 마술종을 자랑하며 그동안 맹꽁이 숲에서 일어난 일들을 모두 말했지.
아주 밤이 깊어져서 엄마랑 재연이는 잠이 들었지만,
아빠는 조금도 졸지 않고 끝까지 들어주었어.
두 사람은 자기 전에 굳게 약속했어.
내일은 늦잠도 자지 않고 아침 일찍 일어나 다시 맹꽁이숲에 갈 거라고.
그곳에서 동물과 괴물들을 하나 하나 찾아가서 오늘 못다 한 비밀 이야기를 모두 풀어놓을 거라고.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