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와 발달장애
외할머니는 아이를 처음 보자마자 손을 잡았다.
아흔 살의 손과 일곱 살의 손이 맞잡혔다.
"이름이 뭐야?"
"○○이."
"○○이? 예쁘다. 이름이 뭐야?"
"○○이."
"○○이? 예쁘다. “
이 대화, 매일 본 장면이다. 우리 집에서.
치매와 발달장애는 의학적으로 전혀 다른 카테고리다.
한쪽은 잃어가고, 한쪽은 쌓여간다.
신경과 전문의가 이 글을 읽는다면
모니터에 손을 얹고 깊은 심호흡을 하고 있겠지.
괜찮아요 선생님, 저도 알아요.
그냥 관찰자 입장에서 말하는 거예요.
임상이 아니라 주방 테이블 위의 얘기요.
둘 다 반복한다. 둘 다 맥락을 건너뛴다.
둘 다 지금 이 순간을 산다. 어제도 없고 내일도 없이,
오직 지금 여기, 이 온도, 이 손의 감촉.
그리고 둘 다— 그 상태 안에서 완전히 자기 자신이다.
수치가 없다. 사과가 없다.
'제가 왜 이러죠' 같은 거 없다.
솔직히 말하면 그게 가끔 부러웠다. 아니, 자주.
외할머니는 아이의 '특이점'을 몰랐다.
진단명도, 치료 스케줄도, 언어치료 여부는
전혀 관심 없는 그냥 예쁜 증손녀였다.
아이의 청청패션을 귀엽다고 했다.
정확히는, 청바지에 청남방이 잘 어울린다고.
기억이 퇴화하는 중에도 패션 감각은 살아있었다.
우얼~ 우리 할머니 맞네. 이게 유전이구나.
근데 순간 울 뻔 했다.
왜냐면 그때까지 아이한테
그냥 예쁘다고만 한 어른이 별로 없었거든.
나조차도 아이의 예쁨보다 느림에 집중하느라
많이 안아주지 못했거든. 대부분 뭔가를 '봤'거든.
언어치료사 선생님 눈으로, 특수교사 눈으로,
혹은 괜찮은 척하는 옆집 엄마 눈으로.
다들 뭔가를 측정하고 있었다.
우리 아이는 늘 측정당하고 있었다.
근데 외할머니는 그냥 아이의 손을 잡았다.
치매 덕분에.
이 문장을 쓰면서 나도 좀 당황스럽긴 하다.
근데 취소는 안 할 거다.
거기서 죄책감이 왔다. 외할머니, 치매 초기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고령이라 이제 뇌가 퇴화한 거다.
여전히 나를 알아봤고, 내 이름도 선명히 기억했다.
20년 만에 만난 손녀딸이 발달장애 증손주를 데리고.
외할머니를 통해 아이가 '그냥 아이'로 보이는 세계를
잠깐 빌리고 싶었던 건가.
이 아이가 그냥 아이라는 걸,
누군가한테 확인받고 싶었나보다.
치매와 발달장애의 가장 큰 공통점은 사실 따로 있다.
둘 다, 죄가 묻는다.
치매는 가족한테 묻는다.
왜 진작 몰랐냐고, 왜 더 챙기지 않았냐고.
발달장애는 엄마한테 묻는다.
임신 중에 뭘 했냐고, 치료는 열심히 하고 있냐고.
뇌가 고장 난 사람은 죄가 없다.
그 옆에 있는 사람이 죄인이 된다.
외할머니 옆엔 엄마가, 내 딸의 옆엔 내가 있었다.
우리는 그날, 같은 죄목으로 처음으로 마주 앉았다.
엄마와 나. 아무 말도 안 했지만.
말 안 해도 알았다. 우리 둘 다 피고석이었다는 걸.
외할머니는 그날 이후 빠르게 나빠지셨고,
5년 전 할아버지를 만나러 가셨다.
아이는 그날 이후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나아졌다.
방향도 속도도 달랐던 그 장면이 여전히 생각난다.
같은 말을 반복하던 두 사람.
서로를 측정하지 않던 두 사람.
그 대화가 제일 순수했다. 그리고 제일 자유로웠다.
뇌가 고장 났다는 건, 세상이 만들어놓은 맥락에서
잠깐 자유로워진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그게 부럽다고 하면—
나는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가.
알면서 묻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