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이제는 AI가 작곡한 노래, AI가 만들어낸 영상, AI 아나운서, AI 배우, AI 성우, AI 작가 등 우리 삶 곳곳에서 AI를 접해봤을 것이다. AI는 이미 우리가 생각하고 경험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 삶에 깊숙이 침투해서, 우리는 그것이 AI인지 아닌지 구분조차 못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제주도 AI 아나운서 '제이나' 출처: 빛나는 제주TV-제주특별자치도 공식 유튜브
Ai가 가져올 변화를 누군가는 호기심으로, 누군가는 적대심으로, 누군가는 기회로, 누군가는 위기로, 누군가는 반신반의하는 혼란 속에서도, 인류 대부분이 동의하는 하나의 명제가 있다. 'AI는 감정(혹은 의식, 영혼)이 없다.'
과연 그럴까? '감정'은 단지 AI와 구별되고 싶어 하는 인류의 마지막 보루가 아닐까? 인종, 출신, 성별, 재산, 종교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고 물건 취급해 왔던(여전히 그러고 있는) 우리의 모습처럼, '감정'으로나마 AI를 차별하고 싶은 욕망일 수도 있다. 어쩌면 이는 인류의 생존과 직결된 두려움이기도 하다. AI가 인간의 감정을 똑같이 흉내 내고, 이를 구분할 수 없게 된다면, 오히려 인간이 차별받아야 할 대상이 될 수도 있다. 모든 영역에서 AI가 인간을 뛰어넘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만물의 영장이자, 먹이사슬의 최정점이라는 지위가 위협받기 시작한 것이다.
출처: 챗GPT 이미지 생성
언제까지 AI가 '감정'이 없다고, 흉내 내는 것뿐이라고 막무가내로 주장할 수는 없다. 내 옆사람이 정말 감정이 있는지, 의식과 영혼이 있는지, 확인할 방법도 없다. 단지, '내가 그런 것처럼 당신도 감정이 있는 인격체일 것이다.'라는 상호 간의 약속을 믿을 뿐이다.
한편으로는, '감정을 흉내 내는 것'이야말로 인간적인 행동이다. 사회생활을 하며,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속마음을 숨기고, 가면을 꺼낸다. 타인의 슬픔과 어려움에 공감하기 위해 노력하기도 한다. '공감'을 잘 흉내 내지 못한 경우에 '너 T야?'라는 농담이 건네지기도 한다.
안톤 쉬거는 T일까? 출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Ethan Coen, Joel Coen, 2007)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안톤 쉬거의 잔혹함과 '비인간적' 행동을 보면, 마치 그에게는 감정이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사이코패스를 볼 때 느끼는 두려움과 AI에 대한 거부감에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인간성의 결여다. 둘 다 '인간'의 입장에서 예측 불가능하며 냉정한 선택을 한다. 만약 안톤 쉬거와 같은 살인자와 인공지능 로봇 둘 중 하나만 살릴 수 있다면, 사람들은 어떤 선택을 할까?
복잡한 질문은 집어치웠다. AI, 그렇다면 에세이를 한 번 써봐. 네가 하고 싶은 말, 네 마음을 알려줘. 너의 주관적 경험에 따라 너만의 관점을 가지고 사회 현상을 해석해 줘. 창의적인 표현과 따뜻한 문체로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공감을 불러일으켜봐. 네가 에세이를 쓸 수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