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추억과 힘듦이 딱 적당한 그 시간.
주재원을 가게 되면 평균적으로 주재기간이 4년 정도이다. 1년도 아니고 2년도 아니고 왜 4년일까? 에 의심을 품어 본 적이 없다. 대부분 회사에서 4년을 해외에 나가서 살게 하니, 그것이 그런가 보다 하고 수긍했는데 내가 나와서 살아보니 왜 4년인지 알 것 같다. 이미 주재원을 마치신 분이라면 지난 시간을 회상하며, 주재원을 이제 막 시작한 분이라면 앞으로의 시간을 생각하며 읽어주시기를 바란다.
가족들이 겪게 되는 어려움을 조금이라도 줄여보고자 대부분 남편들이 먼저 나가게 된다. 남편들은 가족들이 머물게될 집을 알아보고, 은행계좌도 만들고 아이들 학교를 알아보게 된다. 약 3개월 정도, 길게는 6개월 정도 남편은 해외에, 남은 가족은 한국에 떨어져 지내게 된다. 가족 모두 같이 와서 함께 헤매는 것보다 남편이 먼저 조금이라도 익히면 나은 것 같다. 그러고 나면, 와이프는 한국 살림들을 정리하고 남편이 있는 해외로 출국한다. 주재원 와이프는 약 6개월 동안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냐고 매우 바쁘다. 변화된 날씨와 주변환경에 이유 모를 피로가 아주 쏟아진다. 처음에 나도 이렇게 피로감이 심해서 어떻게 지내지? 싶었는데, 6개월 정도 지나니 괜찮아졌다. 그리고 주재원 초기에는 해외여행에 온 것 같은 기분마저 들어서, 음식점이나 카페에 가보는 재미가 솔솔 하다. 그렇게 새로움이 가득한 1년이 지난다. 이때는 신혼기간이나 마찬가지라 마트구경 가는 것마저도 재미가 있다. 이것이 주재원 살이 1년 차이다.
나는 이제 이곳에 잘 적응했다고 생각하지만, 아직 그렇게 말하기엔 이르다. 동남아, 특히 생전 내 인생 처음으로 가정부와 기사를 고용하면서 생기는 해프닝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아파트에 산다면 아파트에 사는 대로, 주택에 살면 주택에 사는 대로 여러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한국의 서비스가 너무 그리워진다. 해외에 살고 있는 유투버들의 유튜브를 보면 알겠지만 동남아시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미국, 영국 전 세계를 따져봐도 한국만큼 무언가 고장 났을 때 잘 고쳐주고 A/S가 잘 돼있는 곳이 없는 것 같다. 특히 이곳은 '환불'이란 없다. '교환'도 잘 안된다. 점차 이러한 시스템에 적응이(적응이라는 말보다는 포기라는 말이 더 어울릴지도) 될 테지만, 초반 2년 때는 속에 화가 쌓여갔다. 돈 쓰며 화가 나거나 이해하지 못할 상황이 종종 벌어지곤 한다. 내가 그 나라 언어가 안되면 나는 더 불편함과 불이익을 감내해야 한다. 한국이 퍽이나 그리워지는 주재원 살이 2년 차이다. 이 시기에 한국의 것과 이곳의 것을 가장 많이 비교하게 된다.
타지살이 1년 차가 지나고 2년 차 즈음 가는 한국행 비행기 티켓은 그렇게 설렐 수가 없다.(그래서 그런지 남편 회사에서는 2년 차에 비행기 티켓을 지원해 준다. 총 세 번인데 한국에서 이곳에 올 때, 2년 차에 한번, 그리고 본국으로 돌아가는 4년 차에 한번) 한국 가서 먹고 싶은 것 리스트를 잔뜩 적어둔다. 만나고 싶은 사람도 잔뜩.. 스케줄이 빼곡하다. 그래서 해외에 나와서 살면 자연스럽게 '애국자'가 된다. 그렇게 2년 차에 다녀온 한국행은 다시 돌아와서 잘 살 수 있는 힘을 잔뜩 실어준다.
가고 싶은 음식점도, 카페에 대한 흥미가 조금은 떨어졌다. 인도네시아에서 레스토랑에 가다보면, 이탈리아 음식이 꽤나 괜찮다는 것인데, 어느 순간 되면 이 집맛이 그 집맛으로 다 비슷비슷하게 느껴진다. 그 음식점은 다시 꼭 다서 맞을 봐야겠어! 하는 음식점이 사실 드물다. 맛이 그냥저냥 다 비슷해진다.
주재원 와이프라면 이곳의 인맥이 좁으니 만나는 사람도 다 거기서 거기고, 모든 사람들이 서로 다 알고 있으며 일상도 거의 비슷해서 다소 무료함과 무기력감이 생길 수 있다. 살짝 이곳의 생활에 짬밥(?)이 생겨서 새로 온 주재원 엄마들을 보면 찡긋 코웃음이 쳐진다. 저 엄마가 이곳에서 느끼게 될 경험들이 무엇일지 보이기도 하고, 주재원 초반에 하는 주재원 엄마들의 이야기와 걱정거리가 다 비슷하기 때문에 그 대화주제는 피로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일상이 항상 새로울 수 없고, 무탈한 것이 감사한 나날이지만 서울에 살다가 이곳에 오면 내가 지금 어떤 이야기를 하는 건지 퍽 이해가 갈 것이다. 한국의 일상이 예능이었다면 이곳의 일상은 다큐랄까...
올해가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주변의 모든 것이 아쉬워지고 아름다워 보인다. 이제야 좀 이나라 언어도 익히고 살만해졌는데 한국에 가야 한다. 막상 가려니 이곳에 힘듦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좋은 것만 기억에 남는다. 한국에 가면 가정부도 없고 기사도 없다. 이곳에서 지내다가 한국으로 돌아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곳에서의 4년의 시간이 하룻밤의 꿈같다고 한다. 내가 언제 그렇게 그곳에 있었나? 싶은 거다.
막 이곳에 왔을 때는 '앞으로 몇 년이 남았네' 싶었는데, 갈 때가 되니 '벌써 내가 가야 하구나' 하면서 모든 것이 아쉽다. 아마도 남편의 심정은 다를 것이다. 남편은 출퇴근 시간 정확하고 야근도 적고 주말은 주말대로 가족과의 시간을 확보할 수 있는 한국행을 지금이라도 당장 택하고 싶을 거다. 회사마다 주재원혜택이 상이하지만 남편을 보면 남편의 영혼을 회사에 갈아 넣었다는 표현이 맞을 만큼 일도 많고 스트레스도 많다.(회사에서 해주는 교육비지원, 주택지원 이 그냥 있는 것이 아니다. 와서 고생해 보니 사실 그 혜택보다 더 해줘도 부족하다 느낄 만큼 고생한다.) 한국 가서 아이들 교육은 어떻게 할지 고민이 가장 깊은 시기이기도 하고 이곳에서 만난 인연들과 인사하고 정리하느라 바쁜 주재원 4년 차이다.
주재기간 4년.
4년이 내가 그곳에 좀 살다가 왔다 고 말할 수 있는 경험의 시간이기도 하고, 그곳에 꽤 적응을 마치고 이제 그곳에 대해 꽤 잘 익히고 오는 시간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5년 이상이 넘어가면 오히려 한국에서 일했던 감이 사라지지 않을까 싶다. 딱 4년이 이방인으로 살고 다시 본국으로 돌아오기 좋은 시간인 것이다. 이것은 나의 주관적인 생각이지만, 주재원살이를 해보니 이 4년의 시간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한국 가면 이곳의 추억으로 우리 가족은 얼마나 또 대화를 많이 하게 되려나..
" 기억나? 우리 인도네시아에 살 때 말이야 ~~~" 하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