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력서에 당당하게 쓸 거예요.
난 이곳에 '와이프'의 역할로 왔다. 돈을 벌고 싶어도 비자 때문에 벌 수 없고, 나만의 루틴을 갖고 싶어도 국제학교에는 방학은 왜 이렇게 자주 있는지, 1년에 6개월만 학교를 보내는 기분이랄까? 이곳에서는 온전히 확보하다가도 또 쉽게 잃어버리는 것이 '내 시간'이 되었다. 남편은 직장일로 한국보다 곱하기 세배로 바쁘다. 한국에서는 남편이 퇴근 후 집안일을 도와주곤 했지만 이곳에서는 가정부가 있기에 그는 정말 집안일로부터 손을 털털 털었고 남편은 '바깥사람' 나는 정말 '안사람'이 되었다. 나는 나로 살아가기보다 누구누구의 엄마로 역할을 많이 시간을 보낸다. 이렇게 약 4년이 넘는 시간을 해외생활을 했는데, 그것도 흔한 미국이나 유럽도 아니고 인도네시아에서 주재원 생활을 했는데 이 시간은 내 경력이 될 수 없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몇 년 후 한국으로 간다면 나는 당당히 이력서에 나의 주재원 생활을 경력으로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이유는?
가족들을 위해 이곳 식자재로 최대한 한국음식에 가깝게 만들어 먹였다. 자카르타에서 장보기란 한 곳에서 끝나지 않고 이곳저곳 둘러보며 장을 봐야 한다. 사계절이 아닌 건기와 우기로 나뉜 이곳 계절에서 나고 자란 식재료에 대해 잘 알고 있다. 두 번의 이사를 한국처럼 깔끔한 포장이사가 아니라 이곳 현지 이사를 하면서 이사의 참 매운맛도 보았다. 나에게 잘 맞는 집을 찾기 위해 현지 가정부를 구해서 여러 가지 해프닝도 겪어 보았다. 자카르타 골목골목을 알고 있고, 이곳의 음식이 어떤지 맛도 보았다. 풍문으로만 들었던 이슬람 종교에 대해서도 몇 년째 그들의 종교행사와 의식을 체험하고 있다. 내 가족을 위해 일상을 잘 살아내려고 온 것이 내 역할이기에 이곳의 삶을 남편보다 더 잘 알고 있다.
아이들의 학교에는 약 22개국의 나라 엄마들이 있다. 그 엄마들과 모두 다 연락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학교에서 주최하는 여러 가지 부모를 위한 모임에서 엄마들을 만난다. 1년에 한 번 있는 학교에서 주최하는 UN데이를 통해서 3일 동안 여러 가지 행사를 거치며, 내 아이들과 내가 얼마나 다양한 나라의 사람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고 있는지 느낀다. 나에게는 이러한 부분이 특별함이지만 학교에서 여러 나라 친구들과 함께 생활하며 피부, 종교, 나라에 대해 편견 없이 커가는 나의 아이들에겐 어느새 이러한 것이 일상이다. 이렇게 다양한 나라의 엄마들과 소통하며 나의 시야는 넓어질 수밖에 없다. 아이들 학교에서 룸맘(반대표 엄마)을 하면서 그리고 다양한 국적의 나라 엄마와 교류하면서 쌓인 내 경험은 이곳에 살지 않았으면 몰랐을 부분이다.
인도네시아 언어를 조금 배워보니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의 문화와 경제( 인도네시아 언어와 말레이시아 언어는 매우 비슷하다. 싱가포르에는 말레이시아 언어도 꽤 사용 가능한데 그곳에서 인도네시아언어를 써도 통하는 이유이다.)가 완전히 새롭게 보였다. 아마도 내가 인도네시아에서 살아보지 않았더라면 싱가포르 여행은 그저 마리나베이센즈, 창이공항의 물폭포가 인상적이었다로 끝났을 테지만, 마주하고 있는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가 어떻게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을까? 나 나름대로 그 관계를 한번 추측해 본다. 그리고 화교들의 대단함을 다시 느낀다. 이 세 나라의 관계망을 어렴풋 봐도 이렇게 재미있는데 깊숙이 공부해 보면 또 얼마나 흥미로울까 생각이 든다. 싱가포르를 다녀오고는 국제관계학에 관심이 생기기도 해서 나이 마흔을 앞두고 다시 공부하는 것을 잠시 상상해 본다.
내가 인도네시아어를 공부하고 있을 줄은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나에게 제2언어란 영어 밖에 없었는데, 내가 하루 3개 국어를 하며 살 줄 누가 알았겠나! 내가 지금 사용하는 바하사는 돈을 버는 바하사가 아니라 돈을 쓰는 바하사에 한정되어 있지만, 아직 남은 시간 동안 나는 여전히 바하사 공부를 더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언어를 하나 더 배우니 나의 식견이 더 넓어지는 것을 느꼈고 영어와 바하사 둘 다 할 수 있다면 마흔틴이 되어도 새로운 직장의 문을 두드려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자신 있게!
주재원을 와보니 정말 주재원이 많구나!라는 것을 이곳에 와서 느꼈다. 세계 곳곳에서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주재원 생활을 하고 있다. 주재원 생활을 맛보기 전에는, 상상도 해보지 않았던 나라에서 사는 것이 '두려움' '걱정'이 가득이었다. 이제 2년 내에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니 벌써 남은 시간들이 짧게 느껴지고 아쉽다. 주재원에 와서 적응할 때쯤 돌아가야 하는 현실이 너무 아쉽다. 주재원이란 부부 중 한쪽만 경제활동을 할 수 있기에 다른 사람의 커리어는 4년간 쉬는 것과 다름없다. 하지만 커리어를 4년간 쉰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4년간 주재원 배우자보다 더 큰 경험을 하고 가기에 당당하게 주재원 와이프도 경력에 크~게 쳐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세계 곳곳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을 주재원 와이프 분들! 그 시간이 여러분의 경력이 되실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