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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각 번호 4번으로 출근합니다

달걀 한 알만큼 미움 덜어내기

by 서이담

체중 조절을 하면서 손쉽게 단백질을 채울 수 있는 먹거리를 찾다 보니 자연스레 달걀을 많이 먹게 되었다. 운동 유튜버들이 자기 냉장고 리뷰를 하면서 본인은 달걀을 일반 사람들보다 많이 먹기 때문에 좋은 달걀을 주문해서 먹는다는 걸 보고, 나도 달걀을 좀 좋은 걸 먹어야겠다 싶었다.


좋은 계란을 고르기로 마음을 먹으니 누군가가 내게 달걀 위에 쓰여있는 번호 끝자리에 ‘4’가 있는 건 되도록 먹지 말라고 했던 말이 기억났다. 달걀 위에 있던 번호, 그건 달걀의 생산 일자와 사육환경 등 여러 가지 정보를 담은 ‘난각 번호’라는 것이었다. 난각 번호의 첫 네 자리는 닭의 산란일자이며, 그다음 다섯 자리는 농장의 고유 번호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맨 끝자리는 닭의 사육환경을 나타낸다.


끝자리 숫자 1은 실외에서 자유 방목해 키운 것, 2는 비교적 넓은 실내에서 키운 것, 3은 단층 케이지, 4는 층층으로 켜켜이 쌓인 케이지 안에서 길러진다는 걸 의미한다. 4의 사육환경에서 자란 닭은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자연스레 그 닭이 낳은 달걀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기 때문에 되도록 4번이 쓰인 달걀은 사 먹지 말라고들 했다. 하지만 대부분 우리가 구입하는 크고 저렴한 달걀은 난각 번호 끝자리가 4다. 난각 번호 1인 달걀은 일반 마트에서는 잘 찾아볼 수도 없다. 이런 정보를 신경 쓰게 되고 나서는 마트에 가서 귀찮더라도 달걀 포장 박스를 살짝 열어서 난각 번호를 확인하고는 2정도의 달걀을 장바구니에 담게 되었다. 나름 나와 가족의 건강에 대해 신경 쓰고 있다는 생각에 이렇게 달걀을 구입하면 돈을 쓰고도 뿌듯해진다.


어느 날은 회사에서 일을 하다가 갑자기 주변을 둘러보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나는 난각 번호 4의 환경에서 일하고 있구나.’


입사 초만 해도 대학생이었던 내가 이렇게 취업을 해서 고층빌딩에서 일할 수 있다는 걸 자랑처럼 생각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이 사무용 건물은 생산 효율 때문에 개인에게 충분한 공간을 허용하지 않는 켜켜이 쌓인 케이지 같은 것이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개별성과 충분한 사회적 거리를 보장받지 못한 채 타인들과 너무도 가까운 거리에서 깨어있는 시간의 반 이상을 일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부리를 타인의 몸통에 부딪히는 일을 피할 수 없고, 그렇게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고, 또 그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또 새로운 상처를 주고받게 되는 것이다.


사람을 원망했다. 저 사람의 무지함이나 무례함 때문에 내가 상처받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상처와 흉터는 특정인의 어떠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에게서 상처를 받지 않을 수 없게끔 우리가 너무 가까웠던 거다. 더욱더 애석하게도 우리 모두는 그 케이지에서 풀려날 수 없었던 것이다. 그에게 가졌던 미움이 계란 한 알정도 덜어졌다. 나는 조금 더 가벼워졌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좀 더 마음의 거리를 두자고 마음먹는다. 지금 당장 이 좁은 케이지에서 벗어날 수는 없지만 내 마음속 공간은 얼마든지 늘릴 수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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